솔직히 이진욱이 백수 소설가 지망생 역할을 잘해낼 거라고 생각 못했다.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에서 여자친구한테 쫓겨나고 친구한테 눈칫밥 먹는 연기를 꽤 잘하던데. 미남 배우에게는 이런 ‘생활 연기’를 할 기회가 거의 없지 않나?
하하. 미남 배우라서가 아니라, 내 외모에서 오는 캐릭터의 제약은 있는 거 같다. 나도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그런 캐릭터를 선뜻 제안하는 분들이 없었거든. 우여곡절 끝에 영화 시나리오를 봤는데 신과 신 사이의 정적이 참 좋더라고.
이진욱이 이 영화를 작업하던 때가 2016년이었다. 어떤 사건을 겪고 대중 앞에 나서기 조심스러웠던 시기, 주인공 ‘경유’를 연기하면서 개인적으로도 어떤 영감을 받았나?
무슨 일이든 겪는 당사자는 그 시간 동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상황 속에 떠밀리게 마련이다. 내 개인적인 일도 있었지만, ‘경유’를 연기하면서 캐릭터가 답답한 현실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내딛는지를 함께 고민할 수 있었다. 상황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고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간접 체험했달까.
어쨌든 그 작품이 숨통 트이는 계기가 됐나?
한 걸음 내딛는 게 참 어렵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진짜 별것 아니거든. 첫걸음을 떼는 것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발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 ‘경유’를 연기하고 나니까 용기도 생기고, 아마 영화 보신 분들은 공감할 거다. 지금 나를 바꾸기 위해 어떤 거창한 계획 세우고 이루는 것보다 아주 작은 성취감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하다못해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보는 거다. 그걸 지키는 나 자신이 엄청 뿌듯할걸? 사실 별것 아니지만.
근데 영화 속에서 정적을 연기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기가 진짜 어렵지?
맞다. 행간의 의미를 표현하는 연기가 어렵다. 차라리 오열한다거나, 분노하는 감정 표현이라면 어려워도 할 수는 있거든. 공백의 연기는 숨소리 하나, 작은 눈썹의 움직임 하나에서도 의미를 줄 수 있다. 연기를 거의 14년 정도 해왔는데 ‘평범하게 밥 먹는 모습’ 같은 것이 정말 어렵다.
드라마 <보이스 2>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마지막 회에 시청자들 화병 난 건 알고 있나? 폭발 사고가 났는데 주인공들이 죽은 건가?
하하. 나도 그렇게 전개될 줄은 몰랐다. 시즌 3이 되어야 실마리가 풀릴 것 같다.
<보이스 2>도 그렇고 <리턴>도 그렇고, 장르적인 쾌감이 있는 드라마였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재미를 느끼나?
장르물이긴 하지만 ‘생활감이 묻어나는 연기’가 가능한 캐릭터들이었다. 물론 <보이스 2> ‘도강우’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긴 했지만 <리턴>의 ‘독고영’은 평범한 형사였다.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면 되게 편하다. 나 자신을 편안하게 풀어놓고, 내려놓을 수 있다.
원래 되게 태평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가슴속 불덩이를 꺼내게 된 것 같다는 얘길 한 적 있다. 불덩이라는 게, 연기에 대한 욕심을 뜻하나?
그걸 포함해서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더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얘기도 되고. 그동안 나는 그저 편하게만 살아왔다.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려고만 했다. 배우로서 느끼는 한계가 분명 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을 뛰어넘으려고 노력 중이다. 내 안에 끓어오르는 뭔가가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가는 단계다.
<아레나>가 그 열정을 높이 평가해서 ‘PASSION’ 부문 상을 주는 거다.
근데 사실 상 받는 게 처음이다. 아주 어렸을 때 SBS 드라마에 출연한 신인들에게 거의 다 주는 ‘뉴스타상’이 있었다. 그거 말고 처음이다. 14년 정도 연기하면서 상을 받을 기회도 몇 번 있었는데 타이밍이 별로 안 좋았던 것 같다. 가장 최근에도 상 받으러 오라고 한 적 있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상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에이어워즈 수상이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이제 남들의 평가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나?
누군가 내가 출연한 작품을 보고 개인 감상을 내놓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욕을 해도 상관없다. 개개인의 자유니까.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고, 참여한 관계자들과 의견을 나누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사람들의 평가에 귀는 기울이지만 휘둘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사실 인터넷 기사 댓글 보는 것을 좋아한다. 다들 어쩜 그렇게 표현력이 좋은지, 혼자 스마트폰 붙잡고 막 웃을 때가 많다.
2018년은 열정을 불태운 특별한 한 해였나?
그럼. 대중도 그렇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고, 나 자신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감이 생겼다. 누구나 슬럼프가 있거든.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아도 본인이 만족이나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시기가 있다. 매번 연기 변신하면서 많은 캐릭터를 소화할 순 없다. 연기 변신을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거고. 결국 어떤 시도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 자신에게서 희망을 봤기 때문에 2018년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드라마 두 작품을 연달아 하면서 하얗게 불태웠다.(웃음)
하필 또 추운 날은 춥게 찍고, 더운 날은 덥게 찍었더라고. 정말 고생 많았다.
하하. 2018년 한파와 폭염을 모두 촬영 현장에서 경험했다. 추울 땐 아무리 껴입어도 춥고, 더울 때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도 열정으로 버텼지. 하하.
2019년 1월호니까, 올해 다짐을 한 번 듣고 끝내겠다.
이제는 어른 배우로서, 감동을 주는 연기를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어른 배우’가 뭔가?
음, 그러니까 ‘저 남자랑 연애하고 싶다’ 이런 느낌 말고 의지하고 싶은 듬직한 남자 배우. 배우로서 호불호의 문제를 벗어나서, 신뢰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저 배우가 연기하는 작품은 꼭 보고 싶다’ 이런 느낌 있잖아. 2019년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으면 한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를 우연히 다시 봤는데, 되게 멋있게 나오더라. 근데 나는 그런 모습보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의 모습이 더 좋더라고. 2019년엔 잘생긴 게 신경 안 쓰이는 캐릭터를 꼭 연기해달라.
최대한 노력해보겠다. 내가 지질한 연기를 해도 관객이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내가 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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