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할 땐 냉철하게 분석하고, 현장에서 ‘플레이’를 하는 순간에는 감성에 기대야 한대요.
저는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연기자가 작업하는 과정이요.”
드라마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에서 연우영을 연기할 때 참 가뿐하고 생동감 있었어요. 좋아하는 인물을 연기할 때 나오는 ‘바운스’가 느껴졌어요. 연우영의 어떤 부분을 가장 좋아했나요?
축제 때 여학우들 의상 문제가 불거지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저는 연습생 생활을 오래 했고 운동도 했어요. 늘 집단 생활을 해온 거예요. 그리고 소속 집단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어 했어요.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를 할 수 있는 연우영이 좋았어요.
연우영과의 접점이 분명했네요.
확실히 있었어요. 연우영의 가치관과 제 생각이 많이 겹치기도 했고요.
연우영이라는 남자가 진짜 괜찮다고 느낀 장면이 있었나요?
8회쯤에 도경석이 연우영의 집에 들어오고 싶다며 우영을 찾아오거든요. 연우영은 경석이 가출한 것이라 확신하지만 굳이 그 사정을 묻지 않아요. 경석은 우영을 굉장히 예의 없이 대했던 후배인데도요. 참 성숙한 사람이다. 멋지다. 생각했어요.
일상에선 감정을 숨겨두는 배우들도 많더라고요. 감정을 드러내는 것과 마음속에 두는 것. 평소에는 뭐가 더 편해요?
드러내는 거요. 워낙 외향적이에요. 자취를 오래 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 시간을 겪고 나니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게 정말 좋더라고요.
열네 살 때 가수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죠? 그때부터 자취를 한 거예요?
그땐 밴드가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고향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숙소 생활 좀 하다가 자취를 했죠.
밴드에선 무슨 악기를 맡고 싶었어요?
저는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 다 했어요. 밴드가 꿈이었을 때 좋아한 가수가 본 조비나 존 메이어… 등등이에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음악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회사와의 이해관계를 따져봐도 성사될 수 없는 일이더라고요. 회사도 저에게 원하는 게 있으니, 타협해야 할 것 같았어요.
꿈에 대해 굉장히 객관적이고 냉철했네요.
그때가 바야흐로 열여섯 열일곱 살경이었습니다. 하하. 밴드의 꿈을 포기하면서 슬럼프를 크게 겪었어요.
꿈을 접어야 한다는 걸 단숨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나이잖아요. 어떻게 넘어섰어요?
마침 그때 회사에서 연기 쪽으로 조금씩 도전해보라고 권했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오디션을 봤는데 붙어버린 거예요.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하 <넝쿨당>)이요. 저는 가수 연습생 생활을 하는 내내 반복된 일상, 통제된 시스템 속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넝쿨당> 현장에서 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초짜’에 어린아이인데도 다들 저와 소통하려고 노력하시고 제 생각을 물어봐주셨어요. 그런 현장을 경험하면서 환기가 됐어요. 처음에는 연기 그 자체보다 다른 관점에서 이 일이 좋아진 거죠.
지금은 어때요?
데뷔작 <넝쿨당>을 마치고 다른 오디션들을 봤는데 정말 많이 떨어졌어요. 그러다 한 감독님을 만났죠. 엄청난 질책을 받았어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다음 기회에 저 분에게 꼭 인정받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 연기의 기초부터 다시 쌓았어요. 발성부터요.
승부욕이 있군요.
그런데 공부하다 보니 헷갈린 것이, 연기를 감성으로 하라는 건지 이성으로 하라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준비 과정에서는 냉철하게 분석하고, 현장에서 ‘플레이’를 하는 순간에는 감성에 기대야 한대요. 저는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연기자가 작업하는 과정이요.
그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흥미로운 지점으로 남아 있어요?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이성과 감성을 이렇게 쓰면 된다고 구술하기는 어렵지만, 제 속에서는 나름 그 둘이 전환되는 시점이 느껴져요.
그럼 요즘은 어떤 것에 새롭게 욕심이 나요?
점점 시청자의 안목도 콘텐츠도 수준 높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그래서 요즘은 훨씬 더 ‘풀린’ 연기, 극도로 자연스러운 연기가 인정받아요. 오랫동안 연극 하시던 무림의 고수들이 방송계로 넘어오면서 연기의 패러다임이 아예 바뀌는 시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경향에 나를 어떻게 접목시킬지, 그런 것에 관해 생각해요. 더 밀도 있고 진한 것, 깊이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요.
지난해에 연극 한 편을 했죠. <엘리펀트 송>이요. 드라마처럼 많은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본인에게는 나름 의미 있는 시작이었을 것 같은데요.
저는 너무 궁금했어요. 많은 선배님들이 연극계에서 활동하다 TV나 영화로 넘어오셨을 때 보여주는 에너지와 힘이 엄청나거든요. 대체 연극이 주는 힘이 뭘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어요.
그 무대에선 대체 뭘 어떻게 하길래!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해내시는 걸까? 했던 거죠.
현장에서 그런 게 보였어요?
접근 방식이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연극계 출신 배우들이 워낙 많은 작품에서 활약하시잖아요. 궁금했어요. 그런데 가보니 알겠더라고요. 고작 저는 한 작품밖에 안 했지만, 그 작업을 오랜 세월 하신 분들에게 엄청난 내공이 쌓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대본 하나를 서너 달 연습해요.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 촬영에서 모니터링할 때 절대 100% 만족할 수 없거든요. 그래도 넘어가야 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연극 공연할 때는 만족 못한 부분을 다음 날 공연에서 또다시 해볼 수 있어요. 그렇게 반복하면서 보는 시야가 넓어져요.
장기간, 아주 집중해서 훈련할 수 있는 장이군요.
연기에는 사실 ‘이 정도 했으면 됐다’라는 게 없잖아요.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드라마였으면 1, 2, 3, 4, 5개의 테이크가 있고 그중에 뭔가 나오면 됐다고 하며 넘어가거든요. 연극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쭉, 끝까지 더 끌고 나가볼 수 있으니까요.
연극을 하고 나니 스스로 어떤 힘이 생긴 것 같아요?
가장 크게 솟은 건 책임감이에요. 연극은 5만원 정도의 돈을 지불하고 시간을 내서 그 장소까지 찾아오는 수고를 들이며 감상하는 콘텐츠예요. 그렇게 온 관객들을 바로 마주 보면서 연기하는 자리인 거죠. 더 제대로 된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어요.
연극을 마치고 다시 드라마 작업을 하게 됐을 때 연기에 남다른 무게가 실리던가요?
확실히 집요해진 것 같아요. 예전 같으면 이만큼에서 멈췄을 것 같은데 조금 더 해보자, 싶어지더라고요. 매 순간.
뭐든 처음부터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나 봐요.
‘쪽팔리지 말자’는 고집이 있어요. 동료들이나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창피하지 말자. 연기가 진짜 무서운 게요, 쉽게 하려고 하면 한없이 쉽게 할 수도 있는 작업인 것 같아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연기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긴장해요.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재미있어서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향이에요.
언젠가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희망을 품고 쭉 가요.”
시작하면 무조건 끝을 보나요?
저는 사실 재미있는 것만 좋아하거든요. 아직 어리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연기는 해도 해도 모르겠고, 알 것 같은 순간이 잠깐 있다가도 다시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재미있는 거예요. 재미있고 좋아서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향이에요.
언젠가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희망을 품고 쭉 가요.
가수 연습생이 되기 전엔 운동을 했다고 했잖아요. 선수 생활을 한 건가요?
초등학교 때부터 합기도를 했어요. 선수 생활도 했고요. 합기도를 하다가 유도, 검도, 복싱도 했고요.
아직 스물둘인데, 그동안 꽤 많은 일에 제대로 뛰어들어봤네요. 연기는 비교적 ‘덜컥’ 접어든 길인 셈이잖아요. 처음 시작할 때 어떤 목표가 있었나요?
음. 그냥 일단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오디션에서 저를 혼낸 감독님의 영향이 정말 컸어요. 오기를 심어주셨으니까. 오기를 부리다 보니 이 신기한 일을 좋아하게 됐고 계속 하게 된 거예요.
그때 들은 질책의 내용을 기억해요?
“너는 발성도 안 되면서 오디션을 보고 앉아 있냐. 집에 가라. 너 같은 애들은 나오면 안 된다.” 엄청 깨졌죠? 열여섯 살 후반이었을 거예요. 나중에 그 감독님을 우연히 다시 뵀는데, 그때 일부러 그러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분께 정말 감사해요. 그 후에 같이 작업도 했어요.
연기자로서 본인이 가진 밑천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일찍 시작한 게 행운인 것 같아요. 짧은 경력임에도 꽤 다양한 역할을 해볼 수 있었던 것도요. 이건 정말 100% 운이거든요. 한두 살 더 어릴 땐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었어요. 그럼에도 딱히 겹치는 인물 없이 다양한 역할을 경험해볼 수 있었어요. 장르도 다양했고요. 이렇게 얻은 행운이 앞으로의 저를 잘 지탱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타고난 것들 중에는요?
무모한 편이에요. 외향적이고요. 몸과 마음을 별로 사리지 않아요. 그래서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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