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현대의 도시 풍경을 만든다. 서울은 일사분란하게 지역을 장악한 아파트 단지나,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이 결합해 독특한 마천루를 형성하는 초고층 주상 복합 타워의 존재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혹은 전설적인 거장이 만든 공공 시설이라는 맥은 살아생전 스타 건축가에게 허용된 온갖 욕을 독식하다가 갑작스러운 타계로 추종자와 안티 모두에게 안타까움의 대상이 된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도시 건축의 최전선에는 상업 시설이 있다. 콕 집어 얘기하자면 기업의 사옥. 이건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자본주의 체제의 테제다. 산업화 이후 시민이 사는 도시의 전형이 된 서구형 도시에서 사옥 디자인은 무소불위의 존재감을 뿜어왔다. 예컨대 뉴욕의 명물로 여기는 크라이슬러 빌딩(1930년 완공)을 비롯해 1958년 위스키 업체 시그램(Seagram)의 창사 1백 주년을 맞아 미스 반데어로에와 필립 존슨이라는 두 걸물이 설계한 시그램 빌딩은 외피 전체를 유리창으로 덮는 커튼 월 양식을 완벽하게 구현하며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시그램 스타일’이 도시 풍광을 마비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OMA의 렘 콜하스가 구축한 역작이자 베이징, 나아가 G2 중국의 아이콘이 된 CCTV 빌딩의 존재감은 또 어떤가. 이제 국가 단위의 경제 체제를 갖춘 글로벌 기업은 사옥을 통해 독자적인 세계에 다가서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구글을 비롯해 애플 신사옥에 이르는 일련의 ‘캠퍼스’는 일종의 ‘소국가’를 꿈꾸는 그들의 욕망을 투사한 ‘신도시’와 다름없다.
지난 6월 14일, 국내 최대 화장품 기업인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이 공식적으로 존재를 알렸다. 신용산역과 바로 연결된 아모레퍼시픽의 새로운 ‘미의 전당’은 근 10년간 잊힐 만하면 건축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진행형 랜드마크’였다. 2009년 3월 사업 건립 계획을 수립하고 2010년 7월 최종 공모 당선안이 나왔다. 5천여억원이 들어가는 이 엄청난 사옥 건립의 책무는 데이비드 치퍼필드에게 돌아갔다.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자타가 인정하는 유럽의 건축 거장. 국적은 영국이지만 2백 명이 넘는 스태프가 일하는 그의 주요 사무소는 베를린에 있어 중요한 포트폴리오가 영국과 독일을 넘나든다. 그의 아이디어는 불과 몇 년 전, ‘비정형의 여제’인 자하 하디드의 DDP가 풍기던 압도적인 ‘요망함’과는 온전히 결이 다른 충격을 한국 사회에 선사했다. 신용산이란 알토란 땅에 지어지는 기업의 사옥이 단 22층 규모라는 사실(주변 주상 복합 빌딩은 40층이 넘는다)도 놀랍지만, 정육면체 형태를 취해 강한 덩어리감에, 정가운데 부분(전체 사무 공간의 1/9)을 ‘세로형 중정’이라는 이름 아래 완전히 비우고, 자연을 끌어오는 3개의 거대한 공중 정원을 담았다. 안 그래도 빡빡한 가용 면적을 이토록 뭉텅뭉텅 삭제한 것이다. 언제나 용적률을 최대한 뽑아내는 고층 타워 만들기에 사활을 건 한국 재계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비경제적인 안이다. 건축계조차 ‘앞으로 한국에서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빌딩’이라 화답했을 정도다. 이를 선택한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의 안목, 당선안이 현실적으로 획득할 유토피아(혹은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호기심이 집중됐다. 선정된 공모안이 시공을 거치며 끝없는 변경과 비틀림을 당하는 일은 빈번한 사실이니까. 그러다 잠시 잊힌 채로 끊임없이 공사 중이던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2017년 겨울, 도시 전설을 완성했다. 놀랍게도 초기 설계안이 그대로 구현된 일명 ‘도플갱어 빌딩’이 서울 한복판에 등장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의 건축 철학은 ‘연결성의 극대화’다. 용산 미군 기지가 이전한 후 거대한 용산가족공원이 탄생하면 이 신사옥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도보 허브’가 된다. 사옥이란 모름지기 회사를 위해 탄생한 건물이기에 연결성이 웬말인가 싶겠지만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위 단어를 건축적으로 현실화했다. 지하 1층의 맛집 거리를 통해 혹은 주 입구가 어딘지 모르는 똑같은 형태의 동서남북 입구를 통해 시민은 사옥에 접근할 수 있다. 어디 접근뿐이랴. 필요에 따라 머물 수 있고, 단순히 건물을 관통할 수도 있다. 사원증 없는 사람이 사옥 1층을 활보하는 장면이 익숙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힙하다는 건물을 구경하고, 미술관을 탐사하며, 맛집을 습격하고, 심지어 시원한 에이컨 바람을 무료로 쐬며 4층 높이의 유리 천장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을 즐긴다. 이는 다양한 군상이 어울리는 유럽의 광장을 닮았다. 내부의 임직원 전용 공간에는 거대한 건물 내에서 자연과 곧바로 접촉할 수 있도록 수목과 땅 내음, 공기로 가득 찬 공중 정원이 있다. 이 큐브형 건물은 조선 백자, 특히 달항아리의 순수한 미학이 집약된 듯 밤낮으로 고요하게 빛나면서 관찰자와 시각적으로 연결된다. 한강과 산, 공원과 고층 건물이 품은 신사옥의 사방 풍경은 2018년 다소 익숙지 않지만 분명 시도 가능한 ‘서울 프롬나드’의 일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기묘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미의 전당’으로 아모레퍼시픽의 둥지가 된 신사옥의 주인은 대체 누구인가? 주주인가, 오너인가, 건축가인가, 가장 오랫동안 이를 물리적으로 점거하는 임직원인가, 현대 도시에서 건축물을 제대로 기능하게 만드는 지역 커뮤니티인가, 그도 아니라면 서울이라는 도시에 세워졌다는 태생적인 사실이 촉발시키는 마법의 단어, ‘서울 시민’이 출현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 보인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건축 철학이 오롯이 발현된 건축적 요소들로 독점적인 소유권을 뜻하는 건물주의 정의보다 여러 의미로 연결된 주체의 지분율을 생각하게 만드는 건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실로 불가능해 보였던 도시 전설이 구현된, 기념비적인 서사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서울에서 이런 의문을 던질 수 있는 건축물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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