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드라마 <내 뒤에 테리우스>를 촬영 중이죠. 검색 좀 해봤는데 정보가 많지 않더라고요.
아직 많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것 같아요. 여섯 살 쌍둥이 엄마 고애린 역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을 잃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요. 일도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김본(소지섭)이라는 국정원 블랙 요원을 만나 함께 여러 음모를 파헤쳐요.
국정원 요원 못지않은 모험을 그녀도 하게 되나요?
어쩌다 보니 휘말리는 거죠. 그러다 조금씩 그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면서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고애린은 극의 처음과 중간, 끝이 계속 다른 인물이에요. 정말 입체적인 캐릭터예요. 강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고요. 무너졌다고 멈추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점이 정말 매력 있어요.
굉장히 용감한 사람인걸요.
매우 용감해요. 두 아이의 엄마로서 가정을 홀로 이끌어가잖아요.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죠. 걱정이에요. 과연 내가 완벽히 해낼 수 있을까.
그래도 전작인 <으라차차 와이키키>(이하 <으라차차>)에서 솔이의 엄마 역할을 해봤잖아요.
솔이 엄마는 ‘미숙함이 허용되는 엄마’였어요. 이번엔 상황이 달라요. 고애린은 6년을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온, ‘프로 엄마’ 반열에 든 사람이니까요.
배우가 어떤 작품을 선택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해요. 타이밍도 중요하죠. 이번 드라마를 선택한 아주 개인적인 이유가 궁금해요.
작가님이에요. <쇼핑왕 루이>를 쓴 오지영 작가님인데, 꼭 한 번 뵙고 싶었어요. 캐스팅 과정에서 감독님과 작가님이 내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전작에서도 엄마 역할이었는데 괜찮은지, 부담은 없는지. 그런데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다짐했거든요. 시켜만 주신다면 꼭 해야겠다고요. 정말 그런 부분은 전혀 상관없거든요.
<으라차차> 종영 후에 이렇게 말했어요. ‘다음에 맡을 배역은 대의를 위해 힘쓰는 멋진 여성, 직업 여성이었으면 좋겠다’고요.
근데 사실은요. 이번 역이 그래요. 고애린이 점차 그런 인물이 되거든요. 내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차기작은 없을 거예요. 이전에 했던 역할을 부정하지 않고 이어가면서도 내가 연기하고 싶은 인물도 될 수 있는 작품이니까요.
고애린이 정인선을 만나며 조금 달라진 점이 있나요?
작가님이 고애린이라는 인물을 조금씩, 나에게 맞게 수정해주신 것 같아요. 더 발랄해졌어요. 아마 실제 성격 때문에 그렇게 해주신 것 같아요.(웃음)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손예진이 유산의 아픔을 겪고 이혼한 인물을 연기했거든요. 당시 그녀 나이가 스물다섯이었어요. 그 나이에 그런 역할을 해낸 여자 배우가 드물기에 조금 놀랐죠. <으라차차>에 이어 <내 뒤에 테리우스>에서 엄마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정인선을 보고도 그랬어요. 또래 여자 배우라면 보통 기피하는 캐릭터잖아요. 그 선택의 배경이 궁금했어요.
관점 때문일 거예요. 저는 캐릭터의 유형을 보는 편이에요. 그 캐릭터가 가진 특성이 최우선이죠. <으라차차>에서 솔이 엄마 역을 했고, <내 뒤에 테리우스>에서는 쌍둥이 엄마 역할이잖아요. 그런데 나에게는 두 인물이 전혀 다르거든요. 조금도 똑같지 않아요.
누군가는 두 배역을 모두 ‘엄마’ 역할로 묶을지언정.
나에게는 그 둘이 그런 식으로 묶이지 않는 거죠. 또 ‘어떤 나이의 여배우에게 치명적인’이라는 기준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요.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하거든요.
캐릭터를 접하고 표현할 때 무엇을 궁금해하는 편인가요?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이야기요. 솔이 엄마는 아기 엄마이지만 꿈을 대하는 모습은 ‘청춘’ 그 자체인 인물이에요. 이런 점이 그녀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죠. 인물의 그런 면에 마음이 움직여요. 그런 인물을 표현할 때 집중이 더 잘돼요. 사람들이 자주 물어요. 엄마 역을 두 번 맡는 게 부담스럽지 않느냐고요. 나는 오히려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으라차차>로 엄마 역할을 처음 선택할 때는 어땠어요? 엄마 역할에 관한 편견이 있지는 않았고요?
확실히 있었죠.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엄마’ 역할은 내 능력 밖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자기 의심과 싸워 이겨야 했겠네요.
어떤 역할을 맡든 그런 의심과 싸우는 과정을 거쳐요. 대체로 살아보지 않은 세계를 연기하니까요. 그럴 때 저는 일단 짊어지고 계속 가보는 편이에요. 촬영 시작 전까지는 그 짐에 눌려 잠식될 때가 많아요. 현장에서 점차 밸런스를 찾고요. 이를테면 지금 고애린을 연기할 수 있는 힘은 촬영 현장과 캐릭터에게서 얻고 있어요. 고애린은 용감하니까. 그리고 성장하니까.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굉장히 좋아해요. ‘이러이러한 일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것들에 사족을 못 써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뭐예요? 역시 성장 서사 영화인가요?
<트레인스포팅> 좋아해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와 <돌이킬 수 없는>도요. 모두 톡톡 튀는, 극단적인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영화가 저에겐 간접 경험이거나 대리 만족이에요. 그래서 작품을 감상할 땐 ‘살아볼 수 없는 삶’이라는 부분을 확실하게 건드리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 삶의 색깔이 명확한 거요. 선명한 인생 속에서 인물들이 변화해 나가는 이야기가 좋아요.
실은 그런 삶을 꿈꿨던 건 아니고요? 내 삶도 극단적일지언정 튀는 색깔이었으면 한다든지.
중고등학생 때요. 한참 혼자서 생각 많이 하는 시절이잖아요. 제일 좋아한 단어가 ‘독보적인’이었어요. 독보적인 나만의 색깔을 얻는 방법에 열중했어요. 여행에 빠지고 사진에 심취하고 영화에 몰입했죠. 나만의 관점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글 쓰는 일도 좋아했고요. 내 생각을 펼치는 일이니까. 지금은 그때만큼 ‘독보적인’ 것에 심취하지 않지만(웃음) 여전히 이런 꿈을 꿔요. 이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다 내려놓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지난 6년간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로 적어둔 글귀가 있는데요. ‘La vie est ailleurs.’ 진짜 인생은 다른 곳에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어쩌면 내 진짜 고향은 파리일지 몰라’라고 하는 사람들.
제 얘기예요! ‘진짜 삶은 다른 곳에 있다’라는 생각을 고등학교 때 친구와 함께 정립했거든요. 그때 마음속에 품은 ‘진짜 고향’이 바로 파리예요. 여기서 열심히 살아보고 안 되면 파리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며 살자.
왜 파리예요?
일단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의 영향이 컸고요. 어렸을 때 CF 촬영차 파리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느낀 감흥을 다른 어느 여행지에서도 느낄 수 없더라고요. 지금까지도 그때의 느낌이 생생해요. 그리고 파리에 내가 좋아하는 여성상이 있어요. 파리 여자들은 당당해요. 그 당당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엄청나요. 자신이 지닌 멋 그 자체를 풍기는 여자들이 파리에 많아요.
파리 여자들의 멋에선 단점을 가리려는 목적이 보이지 않죠.
단점조차 장점처럼 보이게 하는 당당함이 있어요. 그런 여자들을 아름답다 여기면서 자랐어요. 한창 자랄 때 우리는 ‘싸이월드 세대’였는데 그 시절에 올린 내 사진들을 보면 핏기 없는 얼굴이 많아요. 자연스럽고 퀭한 모습들요. 저는 그런 자신을 너무 좋아했어요. 하하.
지금도 그래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 모양도 촬영 때와 달리 부스스해졌어요. 잘 어울리고 예뻐요.
이런 걸 더 좋아해요. 평소 화장도 잘 안 해요.
미디어를 통해 보는 정인선에게서는 왜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나요?
배우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내 성향을 일방적으로 들이밀 수 없더라고요. 저는 극도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원하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고 기대하는 느낌은 달라요.
사람들이 정인선에게 어떤 모습을 원하는 것 같은데요?
체구가 워낙 작으니 대개 ‘러블리’한 매력을 보고 싶어 해요. 그래서 아직까지는 그 기대치에 맞는 모습으로 나를 드러내고 있고요.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분위기를 꼭 보여주고 싶어요. 많이 아쉽거든요.
일단 <으라차차>에서 정인선을 접한 사람들은 애교 많고 그저 러블리한 배우로 볼 테죠.
실제의 저도 차분하고 애교 많은 성격일 거라 상상하겠죠. 그런데 사실 <으라차차>의 윤아를 연기할 때 다른 연기자가 개그 연기 뽐낼 때마다 힘들었어요. 윤아는 차분한 사람이니까요. 사실 저도 좀 웃기고 싶었거든요. <내 뒤에 테리우스>에서는 그런 연기를 조금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체 어느 선까지 가야 괜찮을지 고민이에요. 그래도 여자 주인공인데 너무 비호감이 되면 안 되잖아요.
작품에 도움만 된다면, 끝까지 가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에, 또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요. 음. 아니.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요. 하하.
여자 배우가 남자 배우보다 그런 부분에 관해 더 고민하는 것 같아요. 왜 그래야 할까요?
저는 그게 늘 어렵고 혼란스러워요. 여자 주인공은 망가지더라도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 예뻐야 하잖아요. 저는 얼마든지 망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여자 주인공에게는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롤 역시 주어지잖아요. 그 간극이 너무 어려워요.
배우로서의 관점을 키우던 시기에는 어떤 연기에 큰 영향을 받으며 자랐나요?
<몬스터>의 샤를리즈 테론 같은 연기요. 그런 연기를 최고의 표본처럼 좋은 연기라고 생각하면서 컸어요. 그런데 이번 드라마의 고애린에게 그런 면모가 좀 있어요. 애린이가 지닌 매력을 통해 마음을 얻고 싶어요. 그런 매력은 어떤 사건을 당했을 때 대응하는 인물의 감정선, 표정 등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잘해내서 ‘여자 배우가 저렇게 우악스러워도 돼?’라는 부분은 아예 생각도 못하게 만들고 싶어요.
배우 정인선으로서는 어때요?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싶어요?
마찬가지예요. 성별로서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인식되고 매력적으로 보이길 바라요.
이제야 조금씩 여자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가 지닌 여성상과 여성성에 관해 다시 생각하고, 발언하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시작되어 다행이죠.
남자들이 생각하는 여성성이란 어떻게 보면 참 명확하잖아요. 단순하고요.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더 하죠. 저는 사실 그런 여성성에 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자란 것 같아요. 물론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건 알았지만, 저는 그냥 제 자신으로 성장하고 싶었죠.
주체성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건가요?
자아를 찾는 시기에 나는 주체성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주체성을 엄청나게 갈구했죠. 어렸을 때부터 아역 배우 생활을 했잖아요. 경험이라는 부분에도 열등감이 센 편이었어요. 아역 배우 생활을 하지 않고 자란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수학여행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가는 삶은 대체 어떤 걸까, 학교를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출석하는 삶은 또 뭘까. 부럽고 질투 나고 슬펐죠. 다행히 그 열등감을 긍정적인 쪽으로 잘 쓰며 지나온 것 같아요. 그것이 좋은 오기가 되어서 여행, 영화, 사진 등에 골몰하며 내 관점을 키우며 성장했어요. 자연스럽게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게 됐고요. 제 힘으로 잘 일궈나가는 인생. 제가 원하는 삶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갑자기 다시 드는 생각인데, <으라차차>의 윤아 역이 정인선에게는 역시 조금은 갑갑했을 것 같아요.
조금 힘들긴 했어요. 윤아에게는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상’이 묻어 있었거든요. 윤아의 면면에 꼭 그렇지만은 않은 부분을 심으려고 굉장히 노력했어요. 감독님과 작가님도 제 얘기를 많이 들어주셨고요.
곧 서른 살이 돼요. 스무 살 때 세운 목표는 뭐였어요?
여러 가지를 해보는 거요. 아주 단순했어요.
역시 경험에 대한 꿈이네요.
그래서 저의 30대가 엄청나게 기대돼요. 더 많은 경험을 쌓아갈 테니까요. 아! <몬스>의 샤를리즈 테론 같은 캐릭터는 정말 언젠가 꼭 맡아보고 싶어요. 간절해요. 그런 거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어서 빨리 헤어스타일도 쇼트커트로 바꾸고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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