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우림은 9집에서 10집 사이에 공백이 5년 있었어요. 지난 5년 동안 우리 모두에게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그간 자우림이 하고 싶은 이야기도 우르르 발생하고 전복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 같습니다.
엄청난 일들이 많이 있었죠. 그 시기의 감정은 김윤아 솔로 4집 앨범에 많이 썼어요. 자우림 10집 녹음 작업이 한창이었을 때는요. 사회가 좋은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어요. 극단적인 대치 무드가 일순간 평화 무드로 전환되고, 젊은 여성들이 모든 면에 대해 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발언하기 시작했죠. 이런 것들이 시기적으로 맞물리면서 문득 좋은 예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곡을 또 썼어요. 사실 이번 앨범에 이 곡들도 수록하고 싶었는데 완성도 문제 때문에 안 되겠더군요. 지금에 관한 얘기는 다음 앨범으로 미뤄뒀어요. 살고 있으니까. 세상의 영향을 당연히 받아요. 좋으면 좋은 방향으로 나쁘면 나쁜 방향으로.
10집은 자우림 그 자체예요. 자우림이 지난 20년간 펼친 음악 성향과 메시지를 원숙하게 구현했죠. 자우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가장 먼저 꺼내기 좋은 앨범이라고 생각해요.
이선규 씨가 딱 그렇게 말해요. 누가 앨범에 대해서 설명해달라고 하면 같은 말을 합니다. 앨범 제목이 <자우림>이에요. 셀프 타이틀을 달았어요. 10집 녹음을 마치고 곡들을 취합하며 훑어보니 정말 자우림이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곡들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셀프 타이틀을 붙여도 되겠다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전에는 셀프 타이틀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부끄러웠다고요?
맞아요. 우리가 거창한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자우림의 <자우림>이라고 하면 너무 잘난 척하는 것 같고. ‘와! 이거 봐라!’ 이런 느낌이잖아요.
반면 이번엔 그 이름이 아니고는 안 됐던 것이고요.
그래서 앨범을 통째로 들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나름대로 긴밀한 계략을 따라 흐름을 짜거든요. 이번에는 곡들을 자리에 맞춰 넣고 나니 더욱 어른을 위한 동화집 같더군요. 단편이고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각 단편들이 나름 연결성 있는 세계관을 구현하는 동화집이요. 캐릭터들의 세계관이 모두 연결되죠.
20년 동안 자우림이 해온 음악에 대해서도 통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자우림의 음악은 모두 하나의 세계관 안에 있다고 봐요. 그건 자우림이 자기다운 음악을 잃지 않고 해왔다는 말이기도 하죠. 그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요?
오히려 그 반대로 접근해야 답할 수 있어요. 자우림에게 큰 힘이 있어서 이런 음악을 지속해온 게 아니에요. 다른 걸 할 능력이 없었던 거죠.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걸 해온 거예요. 그리고 계속 좋아해준 팬들이 있었던 거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세요?
엄청나게 운이 좋았죠. 음악을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린 복 받았구나, 감사하다. 20년 동안 팀이 굴러올 수 있었던 건 일단 지금의 멤버들 덕분이에요. 그리고 팬들 덕분이고요. 우리의 이야기와 언어를 좋아하고 이해해준 팬들이 있다는 것. 모두 굉장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사운드 이야길 해보고 싶어요. 20년 동안 함께해온 멤버들이 10집을 준비할 때는 서로 눈빛만 보고도 원하는 사운드를 척 뽑아낼 수 있나요?
1, 2, 3집 때는 저희끼리 계속 이게 맞나? 저게 맞나? 걱정하며 의논을 많이 했어요. 잘 모르겠으니까.(웃음) 장치를 이용해 약점을 가리려고 하기도 했죠. 4집부터는 즉흥적인 에너지를 살리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약 제가 쓴 곡을 함께 녹음할 때도 다른 멤버들이 제 계획과 다른 방향으로 연주해도 큰 틀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쭉 갔거든요. 9집부터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세밀한 부분도 서로 관여하기 시작했죠. 오히려 서로 더 괴롭히며 만들었어요. 미안하지만 조금 더 이렇게 해볼까? 조금 더 이쪽으로 와볼까? 하고.
그 과정을 어느 인터뷰에서는 ‘서로 들들 볶았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네.(웃음) 이 방식으로 작업하면 녹음 과정이 되게 피곤하거든요. 근데 아무도 짜증내지 않고 잘 마무리됐어요. 재미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음. 사실 앨범이 딱 나왔을 땐 원래 만족 지수가 굉장히 높습니다. 하하. 지금은 굉장히 만족스러워하는 단계죠. 아직은요.
“9집부터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세밀한 부분도 서로 관여하기 시작했죠. 오히려 서로 더 괴롭히며 만드는 거예요.”
자우림의 음악은 트렌드에 발맞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벗어나려 노력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자유로웠던 것일까요?
사실 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늘 그대로였던 것 같아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요 시장의 흐름은 똑같다고 생각돼요. 20년 전 가장 인기 있었던 밴드 음악은 록 발라드였어요. 엄청난 인기였죠. 한국인의 취향은 뭔가 시대를 관통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우린 그런 걸 잘 못해요. 못하는 걸 해내려고 하면서 우릴 증명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에요. 못하니까요. 우리는 사람이 다양한 만큼 음악도 다양하다고 생각했어요. 다양한 음악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요.
<나는 가수다>를 통해서는 음악을 거창하게 펼쳐보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했어요. 최근 <비긴 어게인2>로는 무엇을 얻었나요?
자신감? 아니에요. 자신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아주 적은 악기로 우리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프로그램이잖아요. 우리를 자주 접한 한국 시청자는 무슨 노래를 어떤 식으로 하겠지, 무슨 말을 하겠지 등 기대치가 있지만 현장에는 그런 관객이 전무하거든요.
첫 번째 버스킹에 나섰을 때, 긴장됐나요?
진짜 떨렸어요. 너무 춥기도 했고. 우리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들려주는 일이 과연 어떤 식으로 가 닿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음악은 그냥 하면 되는구나. 그냥 하고, 누가 어떻게 볼까 어떻게 들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런 걸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던 기회였어요.
보는 입장에선 조금 아쉬웠어요. 노랫말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요.
맞아요. 자우림 음악을 많이 들어주시는 분들은 그 점을 굉장히 속상해하셨어요. 근데 저는 사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노랫말이 전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요. 솔직히 말하면요. 같은 언어를 써도, 서로의 말을 잘 이해하는 건 아니거든요.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듣는 청자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현장에서 또 집중력 있게 음악을 들으시던 분들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어요. 신기하죠.
만날 준비를 하면서 자우림과 김윤아의 앨범을 계속 들었어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죠. 자우림과 김윤아의 음악이 그런 것 같아요. 감정에 불씨를 던져요. 그냥 고여 있도록 두지 않고, 바닥까지 다 훑게 만들어요. 아티스트로서 김윤아가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방식도 그러한가요?
반대예요. 제 감정을 낱낱이 드러내지 않아요.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죠. 그 사람을 대면하여 할 수 없는 이야기. ‘너 이 자식 죽어버려’ 같은 말들을 노래로 하는 거예요. 실제로는 못하니까.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그런 식이에요. 사람을 다 뒤집어놓는 음악이요. 까먹었다고 생각했던 옛날 일을 들쑤시고요. 음악은 결국 하는 사람의 취향대로 갈 수밖에 없어요.
자우림의 모든 음악을 관통하는 정서는 무엇일까요?
음, 무기력함인 것 같아요. 결과를 알지만 다 포기하고 놓을 수 없는 무기력함. 안 될 걸 안 순간 다 던져버리고 ‘아, 몰라. 난 끝. 끝이야’ 하면서 놓아버리면 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무기력함. 발버둥쳐도 어쩔 수 없음을 아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때 내가 무력한 존재라는 건 그냥 기정 사실이에요. 나는 무력한 존재인데 지금 당장 죽지 않고, 죽을 수는 없으니까 앞으로 가야 하는 것에서 오는 무기력함이죠, 자우림 1기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면 ‘일탈’이요. 굉장히 도발적인 곡이라고 다들 생각하시는데요. 사실 그런 행동은 절대 못할 거야라는 전제로 하는 얘기니까요. 궁극적으로는 ‘일탈’도 무기력한 노래예요.
그런저런 상상을 많이 하시는 편인가요?
상상만요.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하. 그래 보고 싶다는 상상만 하는 거죠.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질문과도 통하는 부분이에요. 평소 나의 방식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하지 못할 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노래로 다 하자.
자우림의 음악에는 또 수많은 물음이 있어요. 삶에 관한 의문, 세상에 관한 물음이 빼곡하죠.
우리는 모두 뭔가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공통적으로. 어떤 뉴스는 사실과 다를 수 있죠. 저희는 뉴스를 보면 뭐가 사실일까?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에요. 사실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요. 사람 사이에 생기는 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보이는 게 다일까? 생각하죠. 그래서 고정적인 소재로 삼아왔어요.
의심하지 않고 믿어버렸던 것은 없나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믿거나 낙관적인 눈으로 보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살면 살수록 점점, 더욱 더 ‘믿을 건 하나도 없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하.
확신으로 변했군요.
진짜 믿을 수 있는 주변 사람을 만드는 게, 자신의 인생을 굳건하게 만드는 일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자우림의 음악에 위로받아요. 어떻게 자우림은 그 많은 위로를 하게 되었을까요.
팬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네요. 우리가 특별히 멋진 말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답을 제시하거나 감동을 삽입한 느낌은 우리 노래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 때문이 아닐까요? 답을 찾아야만 구원받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예전에는 카페나 살롱 같은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SNS가 아닌가 싶어요.
맞아요. 저도 그래요.
트위터를 즐겨 하시죠?
트위터가 가장 좋아요. 인스타그램은 보통 사진으로 말하잖아요. 그런데 사진 한 장으로는 추측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거든요. 트위터는 글이 베이스예요. 다른 사람들이 쓴 문장을 보면, 정말 많은 것이 숨어 있거든요. 그런 게 재미있어요. 날것으로, 속내를 볼 수 있으니까. 업로드를 많이 하지는 않아요. 읽는 게 재미있어요. 팔로잉은 4백21명쯤? 셀럽들은 팔로하지 않아요. 일반인이 많아요.
최근 트위터에서 접한 것 중 가장 동요한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기뻤던 게 있어요. 젊은 여자분인데요. 굉장히 고생하면서 공부하신 분이고 저는 그분을 엄청나게 응원을, 속으로만 하면서 봐왔는데요. 제가 일방적으로 팔로하고 있는 분이라서요. 최근에는 어떤 시험에 합격해 해외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게 됐대요. 그 소식을 보고 엄청 들떴어요. 트위터로만 접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저에게는 크게 다가와요. 4백여 개 계정을 팔로하고 있으니까, 저는 거기에서 4백 개의 삶을 봐요.
창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학을 많이 하잖아요.
‘자뻑’과 자학을 오가는… 것의 연속이죠. 끊임없이.
20년쯤 하고 나면 자학의 강도는 좀 약해지나요?
제가요. 개인 앨범 4집을 만들어놓고, 앞으로는 곡을 더 이상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정말 한 곡도 못 쓸 것 같다고요. 그런데 자우림 10집을 낸 지금…도 역시 다시는 곡을 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하.
지난 20년이 어떻게 흘러온 것 같다고 느끼나요?
지금 계약한 앨범을 내야 하니까, 앨범을 만들고. 그러다 보니 20년이에요. 우리는 10집을 만들면서 이제야 좀 앨범다운 앨범이 뭔지 알 것 같다고 말했어요.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늘 좀 더 제대로 하고 싶다고 생각해왔어요. 20년은 해야 알 수 있는 거군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하면 더 멋있고 잘할 수 있느냐가 아니더라고요. 뭘 포기하고, 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가를 아는 것. 그게 방법이더라고요. 말해놓고 보니까 좀 이상하네요.
사실 한국에서 밴드가 성공하고 이렇게 긴 세월을 지속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밴드로서 생명력을 가지려면 필요한 조건이 꽤 많아요. 곡을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연주할 수 있어야 하고 팀워크가 단단해야 하죠.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한국의 음악 산업 구조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팀이 그대로 성장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에요. 지금은 기획사에서 사람들을 모아 너네 이렇게 팀 해라, 팀 이름은 이것, 콘셉트는 섹시. 이렇게 상품처럼 접근하잖아요. 밴드는 그런 식으로 만들 수 없으니까 한계가 있죠.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 그냥 하고 싶은 걸 했을 뿐인데 좋은 기회를 만났어요. ‘꽃을 든 남자’ ‘프링글스’ ‘펩시’ 같은 광고의 CM송으로 쓰인 기회들이요. 노출이 중요하거든요. 무슨 노래든 어떻게 노출되느냐에 따라 대중에게는 그 곡이 좋게 전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니까. 게다가 지금은 밴드 음악뿐 아니라 음악 시장의 판도가 완전 바뀌었잖아요. 음원 시장이 되면서, 음악이 데이터화되었고요.
자우림은 어떤 음악으로 이 흐름을 헤치며 또 전진할까요?
데뷔 때나 지금이나 답은 하나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할 거예요. 할 수 있는 걸, 그냥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거예요. 자우림 음악은 무기력한 음악이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며 발버둥 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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