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음악계에 떠올랐던 물음표 하나. 과연 앨리샤 키스는 그래미에서 몇 개의 트로피를 가져갈 것인가? 2001년은 앨리샤 키스가 꼬박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한 해이자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로 이름 대신 ‘차세대 솔 디바’ ‘R&B 신성’으로 불리던 해였다. 모두가 예상한 결과지만, 앨리샤 키스는 다음 해 열린 제44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노래’를 포함해 총 5개의 트로피를 보란 듯이 손에 쥔다. 이후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천3백만 장 가까이 팔려나갔다.
이후로 얼마나 많은 ‘포스트 앨리샤 키스’가 탄생했을까? <Songs in a Minor>는 1980년대 혹은 1990년대 태어난 이들에겐 어떤 교과서로 통용됐을 것이다. 누구든 ‘가스펠 필’이 진하게 묻은 앨리샤 키스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Fallin’ ‘A woman’s worth’를 불러젖혔을 테고. 지금 소개하는 뮤지션 H.E.R.도 그중 한 명이다. 1997년생으로 미국 출신. RCA 레코즈와 계약해서 2016년 데뷔 EP <H.E.R. Volume 1>을 발매했다. 과거 위켄드, 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어떠한 정보의 노출도 없이 음반을 발매했다. 그런데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의 ‘Having Everything Revealed’에서 가져왔다. H.E.R.는 자신의 스테이지 네임에 대해 이같이 말한다. “청소년기를 거쳐 젊은 여성인 지금의 나로 서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자존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완전히 나락에 빠지기도 했고 사랑, 대인 관계에서도 많은 경험을 했다. H.E.R.라는 이름을 통해 젊은 여성을 대표해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고, 더 크게는 여성 전체를 상징하고 싶었다.”
거칠게 ‘여성’ ‘R&B’라는 카테고리만으로 동시대 뮤지션을 분류하면 가장 먼저 시저, 나오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H.E.R.와 이들을 동일선상에 놓고 감상하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다. H.E.R.는 메인스트림의 소란, 법석 이런 것에서 저만치 떨어져 홀로 정공법을 펼치고 있달까? H.E.R.의 음악에서는 하나의 트랙에 온갖 세부 장르가 들어오고, 그렇게 모인 트랙이 또다시 화려한 크레디트로 포장되는 요즘 식의 ‘세일즈’를 발견할 수 없다. 기타, 피아노, 드럼을 중심으로 미니멀한 구성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만듦새가 헐렁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피아노 한 대, 목소리 하나로 요약할 수 있는 싱글 ‘My Song’에 대해서 H.E.R.는 이렇게 말한다. ‘My Song’은 16세에 만든 곡이다. 날것의 나를 가장 잘 나타내는 곡이다. 오로지 피아노와 보컬로 이루어져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했다. 아티스트로서 가장 솔직한 모습을 투영한 곡이다.”
불을 쬐는 기분으로 푹신한 소파나 침대에 누워 H.E.R.의 음악을 듣다 보면 그녀가 현시대보다는 1990년대에서 레퍼런스를 찾았다는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바이브가 느껴지는 음악을 굉장히 좋아한다. 당시의 음악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에 많은 영향을 준다.” 1997년생 어린 뮤지션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R&B가 그린 어떤 포물선을 더듬지만 동시에 지금 ‘여성’이기에 이같이 말할 줄 아는, 지극히 현시대적 정신을 지녔다. “시시각각 이야기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달라진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여성을 대표해서 사회에 그들의 이야기를 외치고 싶다. 아직은 가사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명확히 모르지만 아티스트로서, 여성으로서 성장하는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것이다.”
EP <H.E.R. Volume 2>
“첫 번째 EP에선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해 슬프거나 우울한 감성을 표현하려 했다. 그에 반해 두 번째 EP <H.E.R. Volume 2>에서는 행복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앨범 커버에 금색 톤을 넣은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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