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영화제들이 우아를 떤다. 영화 미학을 운운하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는 영화에 상을 주기도 하고. 우리는 솔직하고 발칙하게 놀아보자는 취지로 영화제를 만들었다. 장르 영화를 폄하하는 시선도 많은데,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재미있고 개성 있는 영화를 지지하자는 거다.”
언뜻 보면 별 공통점이 없는 조합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이야기꾼, 호탕하고 호방한 최동훈 감독과 ‘스릴러 장인’으로 불리는 허정 감독, 남다른 정서와 서정을 지닌 엄태화 감독. 친해질 일 없을 것 같은 세 감독을 묶어주는 건 ‘미쟝센 단편영화제’다. 올해로 17회를 맞이한 장수 영화제는 엄태화, 허정 감독은 물론이고 윤종빈, 나홍진, 조성희 등 한국 영화계에 독특한 색깔을 더한 개성 있는 감독을 배출해냈다. 허정 감독은 <저주의 기간> <주희>로 두 번이나 수상을 했고, 엄태화 감독은 <숲>으로 심사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만 가능한 대상을 수상하며 미쟝센 영화제의 ‘아이돌’이 됐다. 미쟝센 영화제에서 꾸준히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던 최동훈 감독은 지난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면서 허정, 엄태화 감독을 부집행위원장으로 지명했다. 그래서 쉽게 상상하기 힘든 감독 그룹이 결성된 거다. 순전히 회의 시간에 자리를 잘못 잡아서 그렇게 됐다고는 하지만, 개성 있고 재능 많은 젊은 감독의 탄생을 지켜본다는 것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만든 단편영화를 극장에서 관객과 다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미쟝센 단편영화제의 집행위원장, 부집행위원장은 어떤 역할을 하는 건가?
최동훈 올해로 17회째를 맞이했을 만큼 유서가 깊은 영화제다. 이런 전통 있는 영화제는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굴러간다.(웃음) 17년 전에는 이현승 감독을 비롯해 당시 젊은 감독들이 이 영화제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감독 조합이 결성되고 디렉터스 컷 시상식이 개최됐다. 세월이 흘러 더 젊은 감독들에게 감투가 내려온 것뿐이다. 우리 셋은 영화제의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그리고 미쟝센 영화제를 존속시킬 의무가 있다.
엄태화, 허정 감독은 ‘부집행위원장’이라는 타이틀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던가?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으로 수락했나?
엄태화 자리를 잘못 앉았다. 하하. 감독님들과 다 함께 회의를 하는데, 나와 허정은 막내에 속한다. 모두 최동훈 감독님이 집행위원장을 해야 한다고 추천하는 분위기 속에서 최 감독님이 마주 보고 있던 우리 둘을 지목했다.
최동훈 두 감독이 함께해주면 집행위원장을 맡겠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대체 왜? 엄태화, 허정 감독은 말수도 적고 수줍어 보이는데.
최동훈 성실해 보이잖아.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영화감독에게는 일종의 ‘재능 나눔’ 같은 거다. 만약 그해 촬영 들어가는 영화가 있으면 참여가 불가능하다. 만약 내가 작품을 새로 시작하면 영화제 일정에 차질이 있으니까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두 명의 감독을 더 참여시킨 거다.
모두 이 영화제와 인연이 깊은 편이지? 특히 엄태화, 허정 감독은 자신이 졸업한 학교에 교생으로 부임한 느낌일 것 같은데?
엄태화 아, 뭐 그 정도까진 아니다.
최동훈 두 감독들은 여기가 아니어도 이미 많은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터라, 그 정도까진 아닐 거다.
허정 그래도 미쟝센 단편영화제 입상을 계기로 많은 기회가 열렸고,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내가 힘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참여하고 싶었다. 열심히 하고 있다.
“영화인들에게는 소중한 영화제다. 꿈같은 등용문이니까.”
엄태화 감독은 그 어렵다는 ‘대상’을 받았다. 심사위원 전원이 ‘이 작품에 대상을 줘야 한다’고 동의해야만 한다던데.
엄태화 어딜 가든 그 얘기가 계속 따라다녀서 부담이 됐다. 그런데 다행히 작년에 대상이 또 배출돼서 그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또래 감독들에게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늘 가보고 싶은 영화제다. 나 역시 그랬다. 2003년부터 4번 정도 출품했는데 계속 떨어져서 오기가 생기더라. 왜 저 영화제는 나를 안 받아줄까? 그런 영화제에서 대상을 타면서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나에겐 애증의 영화제다.
최동훈 계속 떨어뜨려서 미웠나 보지?
엄태화 심지어 미쟝센 영화제를 노리고 만든 단편도 있는데 그마저도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영화제에서 대상도 타고, 또 시간이 흘러 이렇게 일하고 있다니 신기하다.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꽤 많지만, 특히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관객이 느끼는 재미를 최우선시하는 것 같다. 맞나?
최동훈 많은 영화제들이 우아를 떤다. 영화 미학을 운운하고, 다 보고 나서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는 영화에 상을 주기도 하고. 우리는 솔직하고 발칙하게 놀아보자는 취지로 영화제를 만들었다. 장르 영화를 폄하하는 시선도 많은데,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재미있고 개성 있는 영화를 지지하자는 거다. 심사를 맡은 감독들도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지지하는 차원에서 상을 주는 거다. 잘 만들어진 것도 좋지만, 더 모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강하지.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나면 뭐가 달라지나?
엄태화 영화제에는 제작자, 투자자들이 많이 온다. 그해에 어떤 작품이 상을 받았는지가 많이 회자된다. 나 역시 대상을 타고 연락을 꽤 많이 받았다. 그게 다음 영화 제작의 기회로 이어지기도 하고.
최동훈 그런데 상을 꼭 받지 못하더라도 영화 관계자들이 꽤 관심 있게 본다. 안타깝게 수상을 놓친 보석을 찾는 거지. 자기 취향에 맞는 단편영화 감독에게 연락해서 작품을 만드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
무척 젊은 영화제 같다. 실제로 출품하는 감독들이 다 젊은 편인가?
최동훈 나이 제한은 전혀 없다. 70세 감독도 얼마든지 작품을 낼 수 있다. 작년에는 배우 조은지가 연출한 단편영화 <2박 3일>이 호평을 받았다. 심사위원 특별상도 수상했고. 일각에서는 배우가 출품한 작품이니까 특혜가 있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 ‘얄짤’ 없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너무 잘 만들었다. 혹시 지연, 인맥이 영향을 미치는가,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심사하는 감독의 연출부를 하던 친구가 출품해서 심사에 오르는 경우도 꽤 많다. 본인이 아무리 그 작품을 밀고 싶어도 심사위원 전원의 동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검은 속내는 절대 먹히지 않는다. 하하.
“우리는 완벽한 영화를 좋아하진 않는다.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작품을 찾고 있다.”
최동훈 감독은 예전에 찍었던 첫 단편영화가 기억나나?
최동훈 정말 흑역사다. 지워버리고 싶다. 내가 제일 후회하는 건 단편영화 필름 불태우고 오지 못했다는 거다. 하하.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된다는 건 안다. ‘저렇게 찍어도 감독 할 수 있구나’라는 희망. 심지어 내 아내도 그 단편영화를 보고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영화감독이 됐어?”라고 했다.
반면, 비교적 최근까지 단편영화를 만들었던 두 감독은 신선한 시각을 가진 젊은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
엄태화 영화를 만드는 스킬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요즘엔 스마트폰으로도 영화 한 편을 뚝딱 만들 수 있는 시대니까. 위기감도 들고, 자극도 되고 그렇다.
허정 나는 워낙 단편영화 감상을 좋아해서, 그냥 재미있다. 장편영화와는 확실히 다른 매력이 있다. 같은 창작자로서 자극을 받기도 하지만 나도 모르게 관객 입장에서 몰입해 보게 된다.
스마트폰으로도 영화 한 편을 뚝딱 만드는 시대, 미디어 플랫폼도 많고 개인 채널도 많은 이 시대에 영화제의 역할은 뭘까? 영화제가 부여하는 권위보다 불특정 다수의 ‘좋아요’가 더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데?
허정 물론 시대가 변하고는 있지만 내가 만든 단편영화를 극장에서 관객과 다 함께 볼 수 있다는 경험은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경험은 영화 창작자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최동훈 그 좌불안석의 경험이란.(웃음) 아무도 안 웃어주는 싸한 분위기도 겪어봐야지.
엄태화 플랫폼이 늘어나고 영화 상영 방식 역시 바뀌고 있다. 그렇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한 공간에 여럿이 모여서 함께 보는 행위는 영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상영이 끝나고 관객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자체가 엄청나게 소중하다.
최동훈 그걸 해본 것과 해보지 않은 것의 경험은 다르다. 나처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단편영화를 만든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이다. 하하.
굳이 세대를 나눌 건 아니지만, 요즘 20대 감독들의 생각을 이해 못할 때가 있지는 않나?
최동훈 20대 감독의 작품이 많긴 하다. 신문이나 뉴스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젊은 생각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다. 발상부터 너무 이상한 작품도 많다. 하하. 반면 영화 문법에 관한 공부가 굉장히 잘된 작품도 있고 다양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리는 완벽한 영화를 좋아하진 않는다. 컷이나 미장센이 단조로울지언정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작품을 찾고 있다.
영화제가 끝나고 나면 ‘나도 빨리 재미있는 작품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엄태화 풀어져 있다가도 톡톡 튀는, 새로운 영화를 보면 정신이 좀 든다. 나도 이번에 상업 영화를 한 편 만들었는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자꾸만 관객 수를 의식하게 되더라고. 그런데 예전에는 그런 것보다 하고 싶은 것, 새로운 것을 더 많이 생각했다. 그런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
허정 내가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영화적으로 새로운 시선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도 된다.
미쟝센 단편영화제가 그리는 큰 그림은?
최동훈 더 오래 지속되는 것. 아모레퍼시픽이 이렇게 오랫동안 후원해주는 것도 굉장히 대단한 일이다. 또 단편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계속 등장해야만 이 영화제가 지속될 수 있겠지. 한국 영화의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제가 없어지면 너무 허망할 것 같지 않나?
엄태화 우리 세대, 그리고 아래 세대 영화인들에게는 소중한 영화제다. 꿈같은 등용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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