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2년 전이었다.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5 사진이 공개됐다. 곱상하게 생긴 덩치 큰 녀석이 디스커버리 이름 달고 나왔다. 뭔가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디스커버리 하면 몇 안 남은 각진 SUV 중 하나였으니까. 디스커버리마저 각을 버렸다는 사실에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듯했다. 마치 유명 록 스타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디스커버리 5의 사진을 보며 ‘RIP(Rest in Peace)’이라고 중얼거렸다. 이제 로망을 대변하는 자동차 목록에서 디스커버리라는 이름을 지워야 하나 고민했다.
다음은 1년 전이었다. 서울모터쇼에서 실물 디스커버리 5를 봤다. 디스커버리 5는 ‘올 뉴 디스커버리’라는 신형의 클리셰 같은 이름을 달고 공개됐다. 전 세대를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선언 같았다. 오래된 건 이렇게 사라져야 하나, 하며 또 구시렁거렸다. 단, 실물을 보기 전까지. 실물을 본 순간, 압도적인 덩치가 눈동자에 가득 박혔다. 구조물 위에서 올 뉴 디스커버리가 한쪽 바퀴를 들고 위용을 뽐냈다. 이 거대함에 디스커버리만의 매력이 다시 차올랐다. 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은, 우선 중요하지 않았다. 육중한 덩치로 험로를 짓이기며 가는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신형 역시 디스커버리다운 매력을 여전히 발산했다.
매끈한 면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진으로 보면 세련된 면만 강조됐다. 실물은 면 자체가 큼직해 다른 감흥을 자아냈다. 여전히 믿음직스러운 데다 매끈하기까지 하니 탐스러웠다. 타보고 싶어졌다. 함께 뒹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자동차로서 올 뉴 디스커버리는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 벨라가 있었는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두 벨라에 몰려 한마디씩 던질 때 난 올 뉴 디스커버리 주변을 맴돌았다.
드디어 올 뉴 디스커버리 앞에 섰다. 2년 동안 내 마음을 간질인 자동차와 함께 떠날 기회가 생겼다. 로봇 눈처럼 친근한 주간주행등과 눈 맞추고 올라탔다. 랜드로버 디자인의 새로운 시대를 인정하며 올 뉴 디스커버리 품에 안겼다. 실내에 앉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새것이, 미래적인 감각이 소유욕을 자극했다. 계기반부터 인포테인먼트, 센터 터널까지 단정하게 처리했다. 최신 랜드로버 인테리어의 특징을 잘 구현했달까. 누군가는 단순해 보인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교를 부리지 않아서 오히려 더 상상할 여지가 많다. 게다가 디스커버리는 우직한 모델 아닌가. 실내도 외관처럼 단정하면서 큼직해 비슷한 감흥을 전한다. 소재 질감이야 신형이 월등하다. 간결하면서 질감이 좋으면 언제나 호감도가 상승한다.
내장산국립공원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10여 년 전 내장산의 산세가 인상에 남았다. 아무리 올 뉴 디스커버리가 도회적 감각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태생이 산과 잘 어울린다. 겨울과 봄이 혼재하는 풍광은 아무래도 척박할 수밖에 없다. 다소 을씨년스러운 풍경에서 올 뉴 디스커버리가 안식처가 될 거라 기대했다. 차 안에서 풍경을 감상하기에 디스커버리의 껑충한 높이는 전망대처럼 쾌적할 테니까. 추억을 좇는 여정에 시동을 걸었다.
경부고속도로의 만성 정체를 견디고 나서 논산천안고속도로로 옮겨 탔다. 차들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본격적으로 시야가 넓어졌다. 올 뉴 디스커버리의 육중한 몸을 밀어붙일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육중하다고 했지만 전 세대에 비하면 날렵해졌다. 480kg이나 줄였으니 다이어트 책을 내도 될 정도다. 보통 수치상 변화를 체감하긴 힘들다. 하지만 올 뉴 디스커버리는 실제로 날렵하다고 느낄 정도로 감량했다. 디스커버리 4가 이 정도로 활기차게 달렸나? 하고 떠올리면 기억에 없다. 그러면서 연비도 좋아졌다. 2.0 디젤 모델은 리터당 12.8km나 달린다. 3.0 모델은 리터당 9.4km로 줄지만, 크기를 생각하면 소식하는 편이다. 3.0 모델을 타보니 2.0 모델이 궁금해졌다. 트윈터보 과급기로 뽑아낸 출력이 3.0 모델과 수치상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연비는 두 자릿수로 늘었다. 궁금증은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우선 터보 과급기 하나 단 3.0 V6 엔진부터 즐겨야 하니까.
가속페달을 지르밟자 올 뉴 디스커버리가 공기를 뭉개며 튀어나갔다. 도로를 호령하듯 달려 나가는 기분이 통쾌했다. 더 민첩해진 만큼 굼뜬 느낌을 한결 덜어냈다. 그러면서도 디스커버리 시리즈 특유의 박력이 뿜어져 나왔다. 보통 공기를 찢으며 달려간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공기역학은 최신 자동차의 기본 덕목이니까. 올 뉴 디스커버리는 이젠 동글동글하게 모서리를 다듬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기를 찢기보다 뭉개는 느낌은 여전했다. 공기 벽을 뚫고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말이 아니라 코끼리 타고 달려 나가는 듯했다. 껑충한 키처럼 높은 좌석도 감흥에 한몫했다. 높은 곳에 앉아 박력 있는 질주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이 나쁠 리 있나. 괜히 가슴 활짝 펴고 스티어링 휠을 잡았다. 왜 사람들이 큰 차를 선호하는지 명확하게 다가왔다. 올 뉴 디스커버리는 큰 차 중에서도 크다. 감흥이 배가했다.
내장산국립공원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쪽으로 조금 달리면 내장산 영역권에 들어선다. 내장산 풍경 속으로 들어가도 좋지만 조금 떨어져 봉우리들을 바라봐도 운치 있다. 봉우리마다 기암이 독특한 형태로 관람자를 반긴다. 가을 풍경을 최고로 치지만 다른 계절이라고 밋밋할 리 없다.
마침 켄드릭 라마의 ‘DNA’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메르디안 오디오 시스템에는 보다 섬세한 음악이 어울릴지 모른다. 하지만 호령하듯 고속도로를 달리는 상황이라 힙합이 어울렸다. 규칙적인 비트가 올 뉴 디스커버리의 거동과 어울렸다. 스포츠 주행과는 거리가 한참 먼 독특한 주행 감각이 펼쳐졌다. 거대한 배를 타고 항해하는 기분이랄까. 상하좌우 여유 있는 움직임과 높은 시야가 조합돼 디스커버리만의 공간 감각을 운전자에게 펼쳐 보였다. 그러자 느리게 흘러가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속도보다 목적지를 향하는 여정이 흥겨워졌다. 성큼성큼, 길 따라 걸어가듯이.
정읍 시내 식당에 들렀다. 내장산도 식후경이니까. 이 지역 특별식인 팥칼국수 대신 올갱이 쌈밥을 택했다. 산세를 감상하기 전에 보다 자연에 어울리는 맛을 느끼고 싶었다. 기대하진 않았다. 정읍과 올갱이의 지연 관계는 없었으니까. 여행지에서 우연히 맛보는 음식이 맛있을 땐 여정의 결이 달라진다. 정읍에서 맛본 올갱이 쌈밥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국화회관이라는 식당 이름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내장산으로 향하는 길이 한결 흥겨워졌다.
가는 길에 벌판이 나타났다. 성수기에 야외 주차장으로 쓰던 공터로 보였다. 마침 비가 내려 조금 질척한 진흙길로 바뀌었다. 이런 공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올 뉴 디스커버리의 전자동 지형반응 시스템을 사용해볼 기회니까. 하지만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기본 주행 모드로도 충분했다. 아무런 막힘 없이 공터를 누볐다. 더 난이도 높은 곳을 찾는 게 일이었다. 그냥 길 따라 내장산 입구로 향했다. 험로 찾기보단 산세 유랑을 택했다.
와인딩이 나타났다. 보통 와인딩이 나타나면 두근거린다. 자동차가 어떤 거동을 보일지 궁금하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느긋하게 속도를 줄였다. 올 뉴 디스커버리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박력 있게 만든 요소들이 와인딩에선 단점으로 다가왔다. 역시 모두 다 가질 순 없는 법이다. 알기에 속도를 줄이고 2층 버스 타듯 경치를 감상했다. 탁 트인 시야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흔들거리는 차체가 요람처럼 안락했다.
예전에 가본 가을 내장산은 황홀했다. 십수 년이나 지났는데도 색의 향연이 기억에 남았다. 다시 찾은 내장산은 그때처럼 들뜨게 하진 않았다. 대신 차분하게 마음을 다독였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진중했다. 불꽃같은 단풍도, 새하얀 설경도, 눈이 시린 초록도 없지만 웅크린 자연이 숨죽였다.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휴지기가 오히려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 중심으로 올 뉴 디스커버리를 타고 들어가니 제법 탐험하는 기분도 스쳤다.
계곡 옆에 올 뉴 디스커버리를 세웠다. 계곡물 소리와 앙상한 나뭇가지, 바닥의 잡풀이 한데 어우러졌다. 도회적으로 바뀌었는데도 올 뉴 디스커버리는 자연 속에서 어떤 자동차보다 어울렸다. 처음이야 반짝거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세월이 덧씌워질 테다. 그러면 으레 그렇듯 전 세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질 거다. 도시에서 벗어나자 금세 이름에 걸맞은 분위기를 연출했으니까. 내장산 자락에 놓인 올 뉴 디스커버리를 보니 가슴에 바람이 불었다. 디스커버리라는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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