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확언하는 이유를 지금부터 차분히 증명해 보이겠다. 우선 제작진과 동맹한 (부풀려 말하기 좋아하는) 홍보사가 <소공녀>를 판타지라 규정한 근거는 명백해 보인다. 주인공 ‘미소(이솜)’의 캐릭터가 현실성이 결여됐거나 부족하다는 점. 이 편리한 아이데이션에는 예를 들면 이런 요소가 작용했을 테다. 아끼는 담뱃값이 하루아침에 2천5백원씩이나 올랐다. 좋아하는 위스키 한 잔은 1만원이 훌쩍 넘는다. 술과 담배를 포기할 수 없는 미소는 일당 4만5천원을 받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가사도우미다. 3년째 그렇게 사는 데 별다른 걱정 하나 없어 보인다. 결정적으로 월세가 올랐다. 고작(?) 5만원! 여하튼 이 상황에서 미소는 ‘집’을 포기해버린다. 짐을 싸들고 친구 집을 전전한다. 비현실적인 건 맞다. 하지만 인물 설정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해서 장르가 판타지여야 할 이유는 없다. 너그럽게 보더라도, 극영화가 창조하는 캐릭터가 100% 현실(적)이라면, 그것이 도리어 진정한 의미의 판타지가 아니겠나 싶다. 게다가 특히 <소공녀>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관객을 상대로 헛된 망상을 유포하거나 가짜 도취에 빠져들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자발적 홈리스’ 미소는 그녀 외 모든 요소의 현실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영리하게 정의된 ‘안티-판타지’ 캐릭터다.
이러한 판단 근거가 썩 잘 드러나게 <소공녀>는 30대 여성의 시선과 감정, 언어와 행동을 무심하게 좇으며 대한민국의—판타지의 대척점으로서—리얼리티를 부담스럽지 않게 터치한다. 그 방식 또한 제법이어서, <써니>가 ‘나미(유호정)’를 통해 과거의 절친 ‘7공주’들을 재규합하도록 지시해 깊은 인상을 남긴 선례를 효율적으로 모방한다. 거처를 떠나 하루살이를 시작한 미소는 학창 시절 밴드 멤버들을 차례로 방문하는데, 거기서 우리네 보통 삶이 차례차례 그리고 적나라하게 클로즈업된다. 자주, 아주 웃기기까지 하면서. 베이시스트 ‘문영(강진아)’은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더 큰 욕망을 향해 링거까지 맞아가며 일하는 직장인 친구다. 키보디스트 ‘현정(김국희)’은 음식 타박에 남편 구박에 시부모 눈치까지 지긋지긋한 주부 친구다. 드러머 ‘대용(이성욱)’은 결혼 8개월 만에 이혼한 데다 간신히 마련한 아파트 대출금을 20년 동안 갚아야 해서 서러운 후배다. 보컬 ‘록이(최덕문)’는 부모의 뜻에 따라 어떻게든 결혼해 안정된 삶을 살겠다는 일념의 노총각 선배다. 웹툰 작가 지망생인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역시 미소처럼 빈털터리다. 학자금 대출금도 아직 못 갚은 그는 꿈과 희망을 버리고 오직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생명수당 합치면 월급이 세 배라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자원해 떠난다. 목표는 오직 하나. 2년간 5천만원 모아 대출 갚고 집을 구하겠다는 것. 우리 주변에서, 어디서 한번쯤은, 누군가에게 들었더라도 낯설지 않은 현실의 인물들. 그래서 <소공녀>는 판타지가 아니라 오히려 리얼리티, 즉 안티-판타지에 훨씬 근접했다는 얘기다.
연애, 결혼, 출산, 직장, 재산, 건강, 야망, 가족, 행복, 만족, 불편, 멸시, 포기, 그리고 여전히 이어지는 삶과 인생. <소공녀>가 담고 있는 (그리고 전하고 있는) 이러한 가치 판단의 메시지 조각들은 대체로 묵직하고 불투명하며 왠지 모를 양가 감정을 유발하는 데 적절히 동원된다. 청춘의 현실이든 현실의 청춘이든, 청춘과 현실을 주요하게 다룬 영화들이 빈번히 교차시킨 희비 쌍곡선에서 억지 치유나 희망 고문에 숱하게 노출돼온 관객의 심정을 <소공녀>는 잘 알고 있다. 쓰고 연출한 전고운 감독은 미소에게 (적지 않은 ‘청춘 영화들’이 손쉽게 그래 왔듯이) 거창한 꿈을 안기거나 뚜렷한 목표를 주지 않음으로써, 즉 확실한 ‘청춘의 고난’을 강제함으로써 ‘위로의 당위’를 획득하려 하지 않았다. ‘현실을 잘 버텨내는 것 자체가 우리네 청춘의 꿈이자 목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미소의 직업을 가사도우미로 설정한 이유도 무척 공감된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당직이어서”라는 것이고, “없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만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고 있기에” 드러내고 내세우고 싶었다는 것이다.
<소공녀>는 돈에 쪼들리고 현실에 상처받으면서도 칙칙하거나 어둡거나, 자책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의 청춘 현실 보고서다. 품위와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고, 사사로운 데서 만족감을 얻으며, 꿋꿋한 생존만으로도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버팀의 지침서다. 그저 4천원짜리 ‘디스’에서 4천5백원짜리 ‘에쎄’로 바꾸는 정도, 2천원이 올랐어도 ‘글렌피딕’ 한 잔을 주문하는 정도. 이 정도의 호사가 인생을 망치거나 현실을 파탄내지 않음을 일깨우는 부작용 없는 처방전이다. 흔한 훈계나 공허한 동정은 배제했다. 그래서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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