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어 잠시 그 시간 속에 머무는 일, 고고학. 여기 그 기억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라고, ‘흩어진 조각을 모아 잊혀진 추억을 깨워…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빛을 내’자고 살며시 손을 내미는 앨범이 있다. 9의 첫 솔로 앨범 〈고고학자〉다. 9는 ‘관악청년포크협의회’를 시작으로 ‘그림자 궁전’을 거쳐 밴드 ‘9와 숫자들’의 멤버로 활동하며 포크 음악과 사이키델릭한 록 음악, 모던 록 등 다양한 음악 세계를 보여줬다. 약 13년간, 2012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 록 앨범과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 록 노래상을 비롯해 숱한 올해의 앨범에도 선정됐다. 그리고 9는 현재 대기업에서 과장 직책까지 맡고 있다. 대체 9의 재능은 어디까지일까? 그런 9가 매우 정교하고 순수하게 기억 속으로 안내한다. 〈고고학자〉다.
2005년 관악청년포크협의회의 1집 〈꽃무늬 일회용 휴지/유통기한〉 발매 이후 음악 활동 13년 만에 첫 정규 앨범을 냈다. 그간 밴드 생활만 하다가 첫 홀로 서기를 한 건데 어떤가?
마음이 가볍다. 밴드에서도 내가 송라이팅을 하지만 결국 밴드는 멤버 모두를 대변해야 하거든. 각각의 개성을 고려해 포괄적으로 담는 게 중요하다. 반면 솔로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 제작 과정부터 마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미뤄둔 숙제를 끝낸 느낌이랄까. 3~4년 전부터 만들어둔 곡들을 드디어 내 품에서 떠나보낸 거니까.
솔로 앨범을 만든 계기가 있나?
2014년쯤? 9와 숫자들의 음악적 방향을 고민하다 내 개인의 정서나 철학을 밴드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또 밴드 안에서 나만의 정서와 철학을 고집하는 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밴드는 구성원의 공통된 목소리와 조화를 보여줘야 한다. 개인적 추억이나 인생관은 혼자 하는 작업에서 보여주는 게 맞다. 9와 숫자들의 〈수렴과 발산〉을 만들 때부터 우리가 한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찾는 데 초점을 두고 내 개인적인 것들은 최대한 배제했다. 곡 쓸 때부터 멤버 정체성을 반영하고자 했다. 〈고고학자〉는 하고 싶은 대로 만들었다. 첫 곡 ‘방공호’는 피아노만 사용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고, 스트리밍하고 싶으면 스트리밍을, 브라스를 하고 싶으면 브라스를 했다. 자유롭게 솔로 앨범을 작업한 덕분에 나름 밴드와 솔로의 창작 갈래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사실 좀 의외다. 그림자 궁전에서 보여준 록 음악이 9의 음악적 성향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솔로 앨범은 록 성향이 강하고 사이키델릭한 음악이 아닐까 예상했거든.
그렇다. 시간이 지나니 내가 오히려 더 편안한 분위기를 선호한 거다. 아시다시피 본래 록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9와 숫자들 활동하면서 팝적인 요소가 가미된 음악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또 다른 세계가 보이더라. 작가주의 음악과 청자를 배려하고 소통하려는 음악은 아주 다르니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발을 깊숙이 밀어 넣은 거지. 이쪽 세계에선 피드백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정체성과 욕망에는 아직 록이 살아 있다. 앞으로 보여줄 예정이다. 그림자 궁전이나 혹은 다른 프로젝트를 통해서 말이다.
9의 솔로 앨범과 9와 숫자들의 앨범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나?
대체로 9와 숫자들 4집이 아니냐는 평이 있는 것 같다. 하하. 하지만 동의할 수 없다. 〈수렴과 발산〉과 〈고고학자〉를 비교해보면 아주 명백히 다른 걸 알 수 있다.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풀어내는 방식 등이 완전히 다르다. 어쨌든 나는 만족스럽고, 덕분에 독자적인 세계와 밴드 세계를 명확히 구분하게 돼서 밴드로서 더욱 멋진 음악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9와 숫자들이 활동한 지 10년 돼간다. 얼마 전에 멤버와 이야기를 나누다 여태 쌓아놓은 걸 다 버리지 않으면 미래가 없을 거란 얘기를 했다. 새로운 방향을 찾아서 새롭게 가야 한다는 거다. 10년 가까이 하면서 시대가 많이 변했다. 그간 한 계단씩 올라왔다면 이제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가야 할 때다.
〈고고학자〉는 어느 방향으로 갔다고 생각하나?
〈고고학자〉는 방향 없이 간 거다. 한 가지 기준은 있었다. 평소 나는 잠자기 전 음악을 아주 작게 틀어놓는 걸 좋아하는데, 〈고고학자〉가 그 시간에 들을 수 있는 음반이 되길 바랐다. 듣기 편하고 거슬리는 부분이 없는 음악. 들어보면 전반적으로 특별하거나 공격적인 부분이 일절 없다.
그래서일까? 수록곡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곡 순서에서도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고.
물론 굉장히 많이 고민해서 곡 순서를 결정했지만 유독 짜임새 있게 느껴지는 건 마지막 곡 ‘고고학자’ 때문일 것이다. 곡 작업을 다 하고 쭉 듣는데 앨범 이름으로 〈고고학자〉가 떠올랐다. 마지막 곡을 ‘고고학자’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막바지에 만든 곡이다. 전체를 감싸며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모아주는 노래랄까. 앨범 전체를 대변하는 주제 곡이니까.
9와 숫자들과 9의 음악적 차이 중 하나가 화자의 말하기 방식이다. 9와 숫자들에서 ‘우리’를 얘기했다면 9의 솔로에서는 ‘그대’라는 청자를 두고 이야기한다.
20대와 30대 초반을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순간이 많다. 당시에는 굉장히 호기롭게 살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창피한 시간. ‘내가 이랬지’ ‘난 이런 사람이지’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모습이 가득 숨어 있을 것 같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아끼고 좋아해서 아끼고 싶은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 거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겠지. 〈고고학자〉를 듣고 내용이 착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 그런데 착함보다는 조심스러움과 배려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실제 배려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어린 시절엔 주변에 대한 배려보다 내 생각과 경험이 중요해서 모든 초점을 온통 나에 맞췄는데, 이제는 바깥쪽을 더 고려하는 사람이 된 거다.
오히려 9의 순수한 감정을 가감 없이 다 드러냈구나 싶었다.
순수라… 잘 모르겠다. 철이 없어서 그래 보이는 걸까. 9와 숫자들 음악을 할 때는 멋있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솔로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 없으니까, 시시콜콜해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첫 곡 ‘방공호’ 가사를 살펴보면 ‘들어와 어서 들어와요 내가 만든 작은 세상으로… 창이 없어도 빛을 볼 수 있어… 마지막 온기가 그대 것’이 되는 곳에 대해 말한다. 그대를 위한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세계랄까. 요즘 이런 감수성을 담은 음악을 찾아보기 힘들다.
‘욜로’? 하하. 앨범명이 〈고고학자〉인 또 다른 이유가 내가 고리타분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쿨하고 가벼운 것, 농담이나 장난, 킬링타임 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건 말 그대로 내게 킬링타임이거든. 삶의 시간은 굉장히 소중하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장난으로라도 험담하거나 가볍게 대하는 일이 없다. 그냥 잘해준다. 가족이든 애인이든 친한 친구든. 이런 점이 음악에서 두드러졌을 테고 그래서 요새 찾아보기 힘든 정서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바로 그게 9 음악의 희소성이라 생각한다. 앨범 전체적인 그림부터 가사의 작은 부분까지 일일이 공을 들인 정교함과 순수함을 담은 것. 그래서 만약 내가 여자라면 이렇게 말하는 남자와 만났을 거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하. 과찬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닐지언정 최소한 그런 게 좋은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숱한 질곡과 후회 넘치는 시간을 보낸 후에야 깨달은 것들이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정제해서 노래에 담은 거다. 가사를 쓰면 여러 사람한테 일부러 보여준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릇된 사고나 흔히 말하는 ‘피씨’하지 못한 부분이 드러날 소지가 있으니까. 만약 그런 지점이 발견되면 수정한다. 예를 들어 ‘손금’의 가사 ‘손 한 번 더 잡아보고 싶어서 수작 부리는 게 아니에요’는 사실 ‘손 한 번’이 아니라 ‘손 잡아보고 싶어서’였다. ‘한 번 더’를 넣음으로써 덥석 손을 잡는 폭력적인 행위로 보일 수 있는 맥락을 이미 상대와 손잡는 정도의 감정을 나눈 사이로 바꾼 거다. 가사 작업할 때 종종 내 의도와는 다르게 표현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페이스북에 가사를 올리고 이런 의도로 보이냐고 묻기도 한다. 사람들이 결벽증 환자냐며 놀리더라. 하하.
그런데 신기하게도 매드체스터라고 불리는 맨체스터 사운드 밴드들을 좋아하던데?
사실 스튜디오 문을 열었을 때 스미스 노래가 들려서 놀랐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다니. 하하. 스미스와 스톤 로지스 조이 디비전, 뉴 오더, 해피 먼데이즈를 좋아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또 매드체스터, 그런 삶도 경험해봤다. 20대 때는 정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았거든. 그림자 궁전 음악을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거다. 제정신으로 만든 노래가 아니다.
예전 인터뷰를 찾아보니 음악 웹진 〈웨이브〉 편집장 최민우에게 그림자 궁전의 음악에 대해 ‘좋은데, 머리로 한 거 아니냐’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 9는 사람의 살결이 느껴지는 음악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의 살결이란 말은 아마도 〈고고학자〉에 대한 평이겠지? 하긴 그림자 궁전 때는 현대 문학처럼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목표 의식이 있었고 지금은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건 사실이니까. 일리 있는 얘기다. 예전엔 광기나 발산 등을 추구해서 기타를 칠 때도 일부러 이상하게 들리도록 정형성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최민우 편집장은 당시 그런 걸 머리로 생각했다고 말한 거고. 일면 맞는 말이다. 무얼 하겠다고 계산해서 한 거니까.
정교하면서 섬세한 9는 올해를 어떻게 짜임새 있게 보낼 예정인가?
올해가 9와 숫자들 탄생 9주년이다. 그래서 매월 9일 공연하며 팬들과 시간을 보낼 예정이고 9주년 행사와 동시에 지금까지의 9와 숫자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작점을 찾겠지. 동시에 9와 숫자들의 새 앨범 작업을 시작할 거고. 요즘에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메이저 쪽에서 협업이나 작사 제안도 들어오더라. 새로운 창작의 활력이 될 것 같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당장은 4월에 있을 ‘봄꽃 음악제전’ 무대 준비를 하고 있다.
이달의 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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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블레이크 〈If The Car Beside You Moves Ahead〉
더브스텝이라고 다 같은 더브스텝이 아니다. 제임스 블레이크의 박자와 그사이 들어오는 전자음은 공감각을 형성하는데, 재미난 건 이 공감각이 자꾸 뒤틀린다는 점이다. 시공간이 뒤틀리는 느낌이랄까? 몽롱해서 취하게 된다. 천재다. 한국 나이 서른둘에 발매한 이번 싱글에는 섹시함까지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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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팬서〉 OST 〈Black Panther The Album〉
믿고 듣는 앨범이 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일단 플레이 버튼을 누르게 되는 앨범. 영화 <블랙팬서> OST가 그렇다. 켄드릭 라마, 스쿨 보이 큐, 트레비스 스콧, 위켄드, 투 체인즈, 퓨처, 제임스 블레이크, 시저, 제이 록, 칼리드, 앤더슨 팩, 스웨리 등 세계 최고 뮤지션들이 뭉쳤다. 무려 14곡에서 최고 플레이어들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드레이크 〈Scary Hours〉
그는 진정 빌보드 ‘치트키’인가? 2017년에는 빌보드 트로피를 13개나 가져가더니 이번 싱글 발매 직후 빌보드 1위를 달성했다. 현재 세상에서 가장 파급력 있는 뮤지션, 아니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만큼 이슈도 많이 따르고 구설에 오르기도 하는데, 수록곡 ‘God’s Plan’에서 그의 심정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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