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와 나는 진심을 담아 아주 세련되게 토닥여주는 관계다. 박수 칠 땐 남들도 다 쳐주니까 크게 의미 없고.”
언제부터인가 장항준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 시작이 아마 드라마 〈싸인〉 때부터였을 거다. 웃기는 걸 제일 잘할 것 같은 그가 아내이자 동료인 작가 김은희와 함께 국과수 부검의들의 이야기를 썼다고 했을 때 조금 놀랐다. 여태껏 우리가 본 장항준은 토크쇼나 시트콤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유쾌하고 재밌는 사람이었고, 〈불어라 봄바람〉이나 〈라이타를 켜라〉 같은 코미디 영화로 오래오래 기억되는 작가이자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껏 쭉 스릴러에 꽂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오히려 나에게는 코미디가 너무 어려운 숙제였다. 쉽게쉽게 막 만들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정말 좋은 코미디를 아주 잘 만든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오프닝 신을 보고 ‘나도 저런 긴박감 넘치는 장면을 만들어보고 싶다’ 생각한 장항준은 주저 없이 ‘스릴러 외길 인생’을 택했다. 무려 9년 만에 만든 영화 〈기억의 밤〉 역시 스릴러다. 납치된 후 기억을 잃고 변해버린 형 김무열 과 그런 형의 흔적을 쫓다 자신의 기억조차 의심하게 되는 동생 강하늘의 이야기다. 반전이 적어도 3번 이상 나오는 이 영화는 각본 구상부터 연출까지 전부 장항준 감독의 고집으로 완성됐다. 수다 떠는 걸 좋아하고, 아이의 학교 숙제를 도와주느라 김은희 작가와 전화 통화에 여념이 없던 그는 각 잡고 영화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장치콕’ 그 자체였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영화를 찍었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중간에 한 번, 영화 한 편을 준비했는데 무산됐다. 되지 않을 일에 집착하면 안 되겠구나, 느꼈지. 그러고 나서 새로 시나리오를 한 편 쓰기로 마음먹었더니, 편해지더라고. 다행히 경제적으로 궁핍하진 않아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일이 안 풀리는데 돈까지 없으면 사람 진짜 미치는데, 그렇게까지 되진 않아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인터넷에 〈기억의 밤〉을 검색하면 연관어로 ‘원작’이 많이 보이더라. 왠지 원작이 있을 것만 같은 제목이다.
요즘 한국 영화들이, 특히 스릴러 장르는 원작이 있는 경우가 많다. 또 〈기억의 밤〉이란 제목 자체가 영화라기보다는 소설 느낌이 강하다. 김영하 작가 원작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란 영화도 있고,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이란 영화도 나올 예정이다. 그러니까 뭔가 ‘기억’ ‘밤’이 들어가면 원작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그걸 다 알면서도 굳이 지금의 제목으로 정한 이유는?
사실 내부에서도 ‘제목이 약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에도 ‘기억’과 ‘밤’이 들어가니까 좀 더 차별화를 꾀할 제목을 찾아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그래서 제목을 30여 개 더 뽑아봤다. 근데 딱히 맘에 드는 것이 없었고 나중엔 다들 〈기억의 밤〉이 가장 낫다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아마 영화를 보고 나면 딱 와 닿는 제목일 거다.
지인과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가 시나리오를 쓰는 계기가 됐다고?
2014년인가, 송년회에서 술을 마시는데 지인이 문득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다. “어렸을 때 사촌형이 가출을 했다 한 달 만에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그 형이 낯설게 느껴지더라”는 거였다. 그때 생각했지. ‘혹시 돌아온 사촌형이 진짜 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거기서부터 〈기억의 밤〉을 시작하게 된 거다.
장르가 굳이 스릴러여야 할 필요가 있었나? 좀 더 낭만적이거나, 유쾌한 이야기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스릴러에 꽂혀 있던 시기여서, 차기작은 반드시 스릴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들이 다 한 방향으로 보이는 거다. 뭐, 농담처럼 이런 얘기하잖아. 경치 좋은 곳에 가면 김은숙 작가는 어떤 낭만적인 대사를 칠 수 있나 고민하고 김은희는 어떻게 하면 여기서 완벽하게 사람을 잘 죽일 수 있을까 고민한다고. 하하. 나도 생각 자체가 스릴러로 가더라고. 지인이 “근데 사촌형이 좀 변했어!” 하길래 “근데 말야, 만약에, 이렇게 된 거라면 어떨까?”로 시작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과 술 먹을 때도 “이 얘기 한 번 들어볼래?”라고 들려주는 거지. 그렇게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보니 주변에서 영화로 한 번 만들어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뒤는 생각도 안 하고 바로 작업에 착수한 거다.
스릴러를 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 같다. 처음엔 이야기를 쭉 흐름대로 따라가다 결말이 나오면 수학처럼 검산을 해봐도 답이 같아야 하니까.
그래서 초고가 오래 걸렸다. 설계를 하고 뼈대를 세우는데, 제대로 맞춰놓고 시작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칠 때 엄청 힘들 거 같더라고. 그래서 국과수에 가서 검증도 받았다. 내가 또 국과수 가면 대접 좀 받거든.(웃음) 드라마 〈싸인〉 때문에 입구에서부터 경비 아저씨가 “아이고, 〈싸인〉 감독님 아니십니까” 그러면서 환대해줄 정도다. 국과수에서도 이 줄거리가 현실 가능하다는 ‘컨펌’을 받았다. 근데 사실 그 시점에선 현실 불가능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는데, 정말 다행이었지. 하하.
“영화에서는 코미디만 써놓고 갑자기 드라마는 스릴러를 쓰냐고. 하하.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영화 하는 사람들은 좋건 싫건 채플린의 후예이자 히치콕의 후예 아니냐”고. 우리 핏속엔 그 유전자가 흐른다.”
정말 묻고 싶었다. 왜 스릴러인가? 이렇게 말도 재미있게 하고 웃긴데.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라는 영화 본 적 있나? 첫 장면이 프랑스의 외딴 시골 마을에 들이닥친 독일군 장교와 지하에 숨은 유대인 가족을 숨겨준 집주인의 긴박감 넘치는 대화다.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저런 걸 만들고 싶다.’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했다. ‘코미디는 너무 어려운 장르’라고. 나한테는 늘 큰 숙제였다. 좋은 코미디를 만드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냥 쉽게 막 많이 만들 수 있지만 정말 잘 만드는 건 어렵다. 늘 그 질문을 받는다. 아까 출연한 라디오 방송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드라마 〈싸인〉을 썼을 때도 받은 질문이다. 영화에서는 코미디만 써놓고 갑자기 드라마는 스릴러를 쓰냐고. 하하.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영화 하는 사람들은 좋건 싫건 채플린의 후예이자 히치콕의 후예 아니냐”고. 우리 핏속엔 그 유전자가 흐른다. 단지 채플린과 히치콕 중 누굴 더 좋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촬영 현장도, 장르답게 어둡고 축축했을 거 같다. 배우들이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렇게까지 고생하진 않았다. 그 돈 받았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하하. 돈을 뭐 일 이백 받는 것도 아닌데, 프로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 무열이보다는 하늘이가 체력적으로 고생을 했다. 추운데 맨발로 막 뛰어다니고 비도 맞고 그랬는데 이 친구가 내색을 잘 안 하더라고. 사실 나는 내가 안 춥고, 안 뛰니까 잘 모르겠길래 가끔 한마디만 건넸다. “하늘아, 괜찮지? 한 번 더 가도 될까?” 그럼 하늘이가 몇 초 멈칫하다가 대답한다. “물론이죠, 잘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막 열심히 뛰었다. 그렇게 몇 테이크 가다 보면 지친 모습이 보이니까 또 말을 건넨다. “하늘아, 너 돈 많이 받았잖아. 힘들어도 좀 참아”라고 했더니 정말 힘들었는지 하늘이가 “감독님은 돈 안 받았어요?”라고 받아쳤다. 하하. “아, 나도 받았지. 생각해보니까 나도 돈 받고 일하네.” 그러면서 넘어가긴 했다. 힘들긴 했나 보다.(웃음)
김무열에게 감동받은 일화가 있다고?
배우들과 시나리오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서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맞춰보곤 했다. 하늘이는 워낙 이번 시나리오를 좋아해서 별 이견 없이 흘러갔는데, 무열이는 좀 달랐다. 다른 게 아니라, 극 중에서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신이 몇 장면 있었는데,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다. 그게 극의 흐름에 더 맞는 거 같다고 했다. 나중에 장원석 대표한테 들었는데 김무열이 매니저를 불러서 이런 말을 했단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영화 포스터에 절대 ‘김무열, 강하늘’ 순으로 해달라고 요청하지 마라. 이 영화는 ‘강하늘, 김무열’로 가는 게 맞다”고. 본인 욕심을 버리고 어떻게 하면 영화가 더 잘될지를 생각했던 거다.
그래서 이 영화가 잘되고 난 후에도 차기작은 또 스릴러인가?
일단 기본적으로 스릴러를 생각하고 있다. 아이템도 두 개 정도 있고 전에 써놓은 시나리오 중에 고려하는 것도 있다. 약간 코믹 잔혹극인데 스릴러적인 요소가 있는 시나리오다. 쓸 당시에 마동석 씨가 되게 하고 싶어 한 작품이다. 요즘 〈범죄도시〉가 잘돼서 마동석 주가가 올랐으니까 투자 좀 들어오려나, 기대하고 있다. 하하.
아마 영화 홍보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을 질문이 “김은희 작가는 이 영화 시나리오를 뭐라고 하던가요?”일 거다. 김은희의 평가가 실제로 큰 영향을 미치나?
우리는 늘 서로의 작품을 평가한다. 감이 거의 비슷해서 헷갈릴 때 한 번씩 물어본다. 예전에 김은희가 〈시그널〉을 쓸 때 조진웅 역할을 없애고, 완전 단순한 버전으로 고쳐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약간 고민하는 거 같길래 그러지 말라고 말해줬다.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고. 배우자를 떠나서 좋은 동업자 관계는 내가 흔들릴 때 잡아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힘이 없을 때 격려해줄 수 있어야 하고. 김은희와 나는 진심을 담아 아주 세련되게 토닥여주는 관계다. 박수 칠 땐 남들도 다 쳐주니까 크게 의미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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