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보아도 낯선
‘람보르기니’라고 소리 내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 서울 강남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람보르기니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데도 그렇다. 그런데 람보르기니의 모습은 이 차가 생산되는 이탈리아 볼로냐의 산트 아가타 볼로녜제 마을에서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평생 모아도 살 수 없을 만큼 비싸고 흔하지 않아서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람보르기니 그 자체가 ‘낯섦’을 위해 존재하는 차량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차의 오너들도 아침에 차고에 들어설 때마다 ‘헉’ 소리를 내며 넓적한 차의 모양새에 위화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20년 전의 람보르기니도, 30년 전의 람보르기니도 여전히 볼 때마다 낯설고 멋지다는 걸 감안하면, 이 아름다움은 인간이 보고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매일매일 낯설게 느껴지는 차를 직접 구입해 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이 차를 이번 생에 차고에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은 높지 않다.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정도라면 주변에 타는 사람이 제법 많고, 벤틀리도 가망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문이 네 개 달린 차라면 ‘나중에’ 일이 잘 풀리거나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문이 위로 열리는 데다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서 12기통의 굉음을 울리는 람보르기니는 아무리 몽상가라고 해도 자신이 직접 운전하는 모습을 그리기 쉽지 않다.
자동차 용품을 팔아 큰돈을 번 지인은 몇 년 전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를 구입했다. 그는 평소 스마트를 타고 다녔는데, 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지긋지긋해서 끝까지 가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의 람보르기니 생활은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과속방지턱이 있거나 턱이 있는 주차장에는 갈 수 없었다. 발레파킹 맡기기 쉽지 않았고, 청바지 입은 사람을 태울 수도 없었다. 리벳 장식이 있는 옷을 입은 사람은 근처에도 못 오게 해야 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감가상각이 상당하니, 상처가 날 가능성은 최대한 배제해야 했다. 그렇다고 인간관계가 나빠지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주의 사항을 경청했고, 납득했다. 속옷 차림으로 타야 한다고 했다면 아마도 그리 했을 것이다. 그가 람보르기니를 되판 지 꽤 됐지만,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지 않는다. 프리우스로 슁 하고 맥 빠진 소리를 내며 지나가도 사람들은 그가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에서 내리던 모습을 떠올린다.
실력으로 증명하기
나는 람보르기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멋지다는 데는 동감하지만, 꿈의 영역을 벗어나버린 느낌이라 더 현실적인 스포츠카를 꿈꾸기 바빴다. 자동차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후에도 람보르기니에는 유독 엄격했다. 당연히 빨라야지, 그 가격인데. 당연히 빨라야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면. 레이스에서 활약한 헤리티지가 없고, 미하엘 슈마허나 니키 라우다 같은 영웅도 없으니 어디에 어떻게 존경을 표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유명한 뉘르부르크링의 노르트슐라이페 코스에서 람보르기니의 우라칸 퍼포만테가 양산차 신기록을 냈다. 람보르기니는 서킷 기록 세우기를 즐기는 브랜드가 아닌 데다 최근 포르쉐의 하이브리드 슈퍼카가 세운 기록이 ‘넘사벽’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 세계가 놀랐다. 동영상을 빠르게 돌려 조작한 거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곧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으면서 모두 납득하게 되었다.
스즈카에서 우라칸 퍼포만테 시승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를 타볼 기회가 왔는데 놓칠 수 없었다기보다는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보자’는 심정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라는 타이틀이 붙은 차 중 상당수는 실제로 몰아보면 대체 이런 게 어떻게 기록을 세운 거지? 하는 것들이 많다. 그만큼 최고속도 영역은 일반적인 주행 상황과 달라서 대개 비전문가가 운전하면 전혀 공감할 수 없다. 스티어링이 무겁거나 너무 예민해서 덜컹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도저히 운전할 수 없는 정도인 차들도 많다. 아니면 성적에 올인하느라 감성적인 면을 완전히 배제해서 운전이 너무 지루해진 경우도 있었다. 람보르기니 우라칸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컸다. 전기 모터 시대에, 터보도 아니고 자연흡기 V형 10기통 엔진으로 세계 최고속도를? 아마도 레이서 수준에 맞춰서 만들어놓고는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빠른 거 알지? 이 차 타고서 남보다 느리면 네 책임이라고” 하며 거들먹거리는 차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돈 많은 아저씨들이 이 차를 타고 서킷에 나타나 주차장에 세워놓고는 “사고 나면 골치 아프니까 우리는 그냥 슬슬 달려” 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차.
시승회가 열린 스즈카 서킷은 F1이 열리는 국제 규격이어서 속도를 내기에 안성맞춤이지만, 그날은 폭우가 내렸다. 비 때문에 제대로 달려보지도 못하고 시승기를 써야 하는 건가. 게다가 스즈카 서킷은 일본인 특유의 꽉 막힌 분위기 때문에 헬멧도 반드시 착용해야 하고 반바지나 반소매 옷으로는 피트 안에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를 선도하는 이탈리아인 인스트럭터들은 출발하자마자 풀 스로틀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보라를 튀기면서 달리는데, 이건 뭐 상식적인 속도가 아니었다. 코너에서 빙그르르 돌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브레이크를 밟자 걱정이 사라졌다. 빗물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타이어가 노면을 움켜쥐었고, 그 움켜쥔 감각이 서스펜션을 타고 들어와 시트를 통해 척추로 전해졌다. 스티어링 휠을 쥔 손과 앞바퀴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핸들링이 명쾌하고 날렵했다. 비가 오면 속도를 줄여야 한다는 상식이 람보르기니 우라칸 퍼포만테에는 통하지 않았다. 밟으면 밟는 대로 속도가 올라갔고, 생각한 라인을 폭우 속에서도 그릴 수 있었다. 마른 노면이었다면 어떻게 달릴지 상상도 안 될 정도로 완전한 100% 페이스.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아서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영역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수막 현상이 뭐죠?’ 하는 것처럼 속도가 줄어든다. 람보르기니도 람보르기니지만, 피렐리 타이어 개발 담당자가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판 걸까 싶을 정도다.
V10 엔진의 배기음은 시종일관 아름다운데, 터보가 익숙해진 시대에 만난 자연흡기 고회전 사운드를 듣고 있노라면 눈물이 흐를 지경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차에 익숙해지면, 그리고 코스를 완벽하게 익히면, 그리고 빗물이 앞 유리창을 때려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만 아니라면 더 빨리 달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 시승기는 이 차를 사려는 사람보다는 서킷에서 이름깨나 날린다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이 차가 이름뿐인 부자들의 장난감이라고 여기지 마라. 이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눈 부릅뜨지 않고도, 블루투스로 여자친구와 통화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을 추월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 다시는 람보르기니를 무시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렇다 할 모터스포츠 헤리티지도 없이 슈퍼카의 양대 산맥이 된 건 역시 실력 때문이었다. 적어도 우라칸 퍼포만테가 등장한 시점부터는 절대 무시할 수가 없다. 게다가 전기 모터도 터보차저도 없이 공기만 빨아들여서 달성하는 세계 최고속도라니. 이 친구들 낭만을 알지 않는가. 다음 세대 람보르기니는 아마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 다른 방식의 엔진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차는 역사에 남을, 인류가 낭만과 속도를 같은 영역에 두고 있던 시대에 관한 증거다. 부동산보다 확실한 투자처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산다면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S
우라칸 퍼포만테가 너무 인상적이다 보니 동시에 등장한 아벤타도르 S가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아벤타도르 S야말로 12기통 엔진을 장착한 ‘정통 람보르기니’다. 타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서킷에서 우라칸 퍼포만테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지만 달리는 과정은 훨씬 즐겁다. 거대한 엔진에 불을 붙여 호쾌하게 달리는 그 감각. 매끈한 더블 클러치 트랜스미션 대신 싱글 클러치 트랜스미션을 고집하는 것도 남성미를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변속 충격조차 사랑스럽다. 테스토스테론을 연료로 달리는 자동차가 사라져가는 세상에 반드시 경험해봐야 할 슈퍼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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