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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맛

지금 김지석은 그 어느 때보다 유연하고 자유롭다.

UpdatedOn October 2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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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트와 셔츠는 모두 김서룡 옴므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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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더 많은 사람에게 나를 알리고 싶다. 이번 드라마로 ‘국민 첫사랑’ 같은 것도 되어보고 싶다.”

 

 

체크 셔츠·짙은 초록색의 와이드 팬츠·낙타색 스웨이드 트렌치코트는 모두 발리, 검은색 로퍼는 주세페 자노티 제품.

 

콜라 캔 하나 쥐고 느슨하게 앉아 시작한 인터뷰에서 김지석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풀어냈다. 버젓한 진심, 적당한 농담, 가벼운 욕심, 군더더기 없는 갈망. 당연하다는 듯 속내를 보이고는 그뿐이라며 웃어넘겼다. 자신을 포장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와 잘 어울리는 태도였다. 영화 〈국가대표〉로 얻은 관심과 탄력을 드라마 〈추노〉의 조연 ‘왕손이’를 연기하는 데 고스란히 써버린 김지석을 기억한다.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이하 〈역적〉)에서 연산군 역할을 해내며 ‘인생 캐릭터’를 획득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김지석은 다시 완전히 다른 템포의 극에, 전혀 다른 캐릭터에 불쑥 들어선다. 로맨틱 코미디다. 〈20세기 소년소녀〉에서 여주인공의 첫사랑이 된다. “일단 사랑이 너무 고팠거든요. 사랑을 좀 하고 싶어서요.” 언제는 재면서 했냐는 듯, 이번에도 역시 끌리는 대로다.

터틀넥 니트·벨벳 블루종·체크 코트·슬랙스는 모두 발리, 검은색 첼시 부츠는 벨루티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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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예능 프로그램 〈문제적 남자〉에 출연했다. 그 3년 동안 한결같이 똑똑한 척하는 법을 모르던데.
안 똑똑하니까. 출연자 중 내가 제일 똑똑하지 않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똑똑한 척하는 거 별로잖아.

〈문제적 남자〉의 PD는 당신을 가장 유연한 출연자로 꼽더라.
수의 문제를 인문학적으로 풀려고 드는 것이 유연해 보인 것 아닐까? 그게 나의 유일한 살 길이었다. 나는 문과형 인간이니까.

〈역적〉에서 연산군을 맡은 이후 드라마 〈20세기 소년소녀〉를 선택했다. 캐릭터의 이름은 공지원. 직업은 애널리스트. 감성은 따뜻하고 이성은 차갑고 능력 좋고 비전 있고 사랑에도 진지하고, 안팎으로 다 갖췄다. 솔직히 남자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할 캐릭터다.
공지원은 물론 다 가졌지. 그런데 또 다 가진 건 아니다. 결핍 없는 인물이 어디 있나. 공지원에게도 결핍이 있다. 가족사가 그에게는 아픈 손가락이다. 아마 남자들은 공지원이 풀어내는 첫사랑 코드에 마음이 동할 거다. 하하. 각자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지 않을까. 〈20세기 소년소녀〉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집필한 이선혜 작가님의 작품이다. 이동윤 감독님이 연출한다. 일단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비혼 여자들의 이야기다. 미혼이 아니라 비혼. 느리고 가볍지 않은 사랑, 나이는 먹었어도 여전히 서툰 삶, 우정. 이런 것들에 관해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드라마의 매력이다. 느린 것. 요즘은 다들 너무 빠르잖아. 사람도, 사랑도. 무엇보다 나는 〈역적〉이 끝난 후 사랑이 너무 하고 싶었다. 사랑에 목마른 상태다. 로맨스물을 꼭 하고 싶었다.

연기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채울 수 있나? 대리 만족이 되나?
나는 된다. 같은 종류의 감정을 쓰는 일이니까. 지금 정말 사랑을 하고 싶다. 사랑이 너무 하고 싶어서 드라마에서 얼른 러브라인 탔으면 좋겠다. 하하. 여주인공의 첫사랑 역할이지 않나. 그런데 35년 동안 친구인 여자, 동시에 첫사랑이었던 여자와의 현재진행형의 사랑을 연기한다는 거, 참 어렵더라. 마음을 그대로 다 내보일 수도 없다. 그 마음의 깊이나 온도, 종류 같은 것도 보통 생각하는 사랑과는 또 다르다. 미세한 감정, 작은 차이, 뉘앙스의 변화, 감정이 증폭되었다가 사그라지는 단계 등을 세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이동윤 감독님이 대단하신 게, 그런 감정적인 디테일을 굉장히 잘 본다.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다.

연기로 감정적인 대리 만족을 한다면, 작품 하나를 거칠 때마다 배역의 영향을 많이 받겠다.
많이 받는다. 그래서 영화 〈국가대표〉에서 강칠구 역을 연기할 땐 많이 우울했다. 그래서 좀 풀어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추노>의 왕손이를 했다. 그땐 그야말로 ‘정신줄’ 놓고 상놈 연기를 했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역적〉의 연산군은 개인적으로 ‘인생 캐릭터’라 여긴다. 연산군을 연기한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정신적으로 힘겨웠다. 그 무거운 감정을 빨리 벗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매번 맡은 캐릭터로부터 뭔가를 배웠다. 내가 맡은 배역들이 지금껏 나를 만들어온 것 같다.

캐릭터를 연기하며 당신의 어떤 부분이 아주 많이 바뀐 적이 있나?
신지훈. 〈로맨스가 필요해 2〉(이하 〈로필 2〉)의 신지훈은 내게 사랑, 연애, 여자에 관해서 굉장히 많은 걸 알려줬다. 그 방면으로만 본다면 내 인생은 〈로필 2〉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신지훈 역할을 맡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됐다.

예를 들면 어떤 것?
마음을 열고 잘 들어야 한다는 것. 잘 듣는 것이 참 중요하더라. 신지훈은 나에게 사랑과 연애의 많은 부분을 가르쳐준 캐릭터다. 나도 지금 신지훈처럼 애인 아닌 여자친구들이 많은데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 게 이유인 것 같다. 그리고 솔직하게 반응해야 한다. 표현해야 하고. 나는 표현을 정말 잘하거든. 특히 좋은 건 좋다고, 잘 말한다.

솔직히 신지훈은 유니콘 같은 남자이지 않나? 현실에 절대 없을 것 같은. 〈로필 2〉에서 신지훈은 판타지를 담당했다고 본다.

맞다. 그래서 사실 신지훈은 내 예상 밖의 리액션을 얻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처음 신지훈이 되어 연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계속 생각했거든. ‘아니, 이런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솔직히 공감을 못할 줄 알았다. 신지훈은 너무 판타지라서. 이 캐릭터는 사람들에게 썩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 않은 거다. 그런 신지훈을 감정적으로 정말 가깝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더라.


“드라마 〈미생〉 같은 작품은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모든 캐릭터가 빛나지 않았나. 배우가 주연을 원하는 건, 더욱 큰 비중을 지닌 역할을 하고 싶어서일 텐데 작품과 캐릭터를 생각하지 않고 비중에만 치중해서는 결국 괜찮은 기억을 남길 수 없는 것 같다.”

 

실키한 핀턱 셔츠·가죽 팬츠·카무플라주 스웨이드 트렌치코트는 모두 김서룡 옴므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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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뿐 아니라 작품에 함께한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꽤 받을 것 같은데. 맞나?
맞다. 영향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중 한 사람이 영화 〈국가대표〉에서 함께한 하정우 형이다. 배우는 지금 내 삶이고 일이다. 이 두 부분에 대해 잘 정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참 중요한데 그런 점을 정우 형에게서 배웠다. 하정우는 엄청난 배우잖아. 그런데 배우로서의 삶 바깥에서도 하정우는 참 잘 산다. 배우 하정우와 인간 하정우가 서로 어느 쪽도 해치지 않고 공존한다. 하정우 형은 그 둘 사이를 아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오가며 산다. 공인이라고 해서 어디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유롭다. 형과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내 바람은 그거다. 하정우 형처럼 자유로워지는 것. 마음 조급하게 먹지 않고 조금씩,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경지에 오르고 싶다.

〈역적〉의 연산군을 거친 김지석이라면, 다음 행보로 배역의 비중을 더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단독 주연작을 선택한다든가.
잘 모를 땐 그랬다. 초창기에. 그런데 가만 보면, 결국 배우는 누군가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느낌을 전하고, 인상을 풍기는 사람. 그것으로 기억되는 직업이더라고. 그렇다면 작품 속에서 어떤 캐릭터를 어떻게 해내느냐가 결국 그 배우를 만드는 셈이다. 드라마 〈미생〉 같은 작품은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모든 캐릭터가 빛나지 않았나. 배우가 주연을 원하는 건, 더욱 큰 비중을 지닌 역할을 하고 싶어서일 텐데 작품과 캐릭터를 생각하지 않고 비중에만 치중해서는 결국 괜찮은 기억을 남길 수 없는 것 같다.

대중적인 작품은 많이 하지 않았나. 조금 더 마이너한 취향이나 시선을 지닌 관객에게 다가가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나?
솔직히 아직은 아니다. 아직 더 많은 사람에게 나를 알리고 싶다. ‘국민 첫사랑’이 되고 싶다. 하하. 그렇다고 인기에 연연하거나 초조해하는 타입은 아니다. 너는 왜 그렇게 욕심이 없느냐고, 친한 사람들이 늘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내 갈 길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많은 배우들이 욕심 내는 길과 내 길은 애초부터 달랐던 것 같다. 다들 나에게 욕심이 없어 보인다고들 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 반대다. 모르겠다. 나는 왜 이렇지? 자존감이 강한 건가…. 자유롭고 싶다는 마음만 있다. ‘자유로운’ 태도를 지니고 싶다는 욕심이, 동력이 되는 상태인 것 같다.

승부욕은 꽤 있는 편 아닌가? 처음 연예계에 발을 들인 것도 소문난 수재였던 형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고. 형을 이기거나, 혹은 형처럼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배우를 시작한 이유였다고 들었다.
맞다. 형에 대한 열등감. 그 무렵 형이 공부로 부모님께 인정받은 것처럼, 형과는 아주 다른 분야에서 ‘아카데미컬리’ 인정받고 싶었다. 하하. 그래서 연기를 무작정 시작했다. 일단 제일 먼저 MTM에도 찾아가고. 그 시절 가장 잘 알려진 ‘탤런트’ 학원이었잖아. 그러다 드라마 〈상두야 학교 가자〉에서 친구 1, 2 같은 보조 출연자로 시작했다.

인정받기 위해 칼을 간 분야가 왜 하필 연기였나?
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살면서 어느 자리에서건 조금이나마 빛난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이런 거다. 영국 유학 시절, 영어로는 내 생각을 완벽히 표현 못해 어려웠는데, 어느 날 말하지 않고 몸으로 뭔가를 표현해야 하는 수업에 참여한 거다. 그때 엄마 백조를 따라 아기 백조들이 졸졸 따라가는 장면을 표현해야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양손으로 백조의 부리와 꼬리를 만들면서 걸어갔다면 나는 좀 다르게 했다. 그때 참 잘했다는 칭찬을 들었거든.

무작정 시작했기 때문인지, 김지석은 스스로 ‘천생 배우’는 아니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렇게 전제한 채 ‘배우’로 살고, 일하는 것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나?
나는 확실히 천생 배우가 아니다. 대학에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무작정 뛰어들었기 때문에 사실 상처도 콤플렉스도 결핍도 있다. 역시 이런 열등감이 또 동력이 됐던 것 같다. 잘하고 싶었다. 대학에서 연극영화학을 공부하지 않은 것이 내게는 결핍된 구석인데, 무엇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도 그런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크다. ‘연영과’를 나온 배우들은 그 시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연기에 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때의 열정, 그때의 마음 등을 지금까지 동력으로 삼더라. 부럽지.

김지석의 천성 중 배우로 살고 일하면서 가장 잘 쓰는 장점이 있나?
공감 능력.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상황, 그가 하는 이야기, 그가 느낀 감정, 맞닥뜨린 사건에 완벽히 몰입한다. 그냥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이거 하나는 자부한다. 썩 잘 쓰는 장점인 것 같다.

요즘도 러닝 즐기나?
그만뒀다. 운동을 다 놨다. 예전에는 건강한 생활에 집중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젠 아니다. 그런 것들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왜 이렇게 됐지? ‘연산군’을 연기하면서부터였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지금은 모든 면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시점이다.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조금씩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다.

러닝을 그만두고 뭘 즐기고 있나? 배우의 영역 밖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살기 위해 하는 일은 없나?
요즘 ‘혼술’ 좀 즐긴다. 사케 말고는 다 좋아한다. 맥캘란 같은 싱글 몰트위스키도 좋아하고. 가끔씩 혼자 바에 가기도 하고 집에서도 혼자 마신다. 안주도 안 먹고, 딱 술만 마신다. 그렇게 혼자 마시는 시간이 정말 좋다. 우리는 보여주는 직업이잖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맞다. 연예인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며칠씩 집에 머무는 이유는 사람들이 알아볼까 그런 것보다, 그냥 그 시간이 좋아서다. 나도 집에서 그렇게 있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취하는 기분과 술맛 중 무엇을 더 즐기나?
둘 다. 취해가는 나와 술이 지닌 맛을 음미하는 것. 둘 다 엄청 좋아한다. 그리고 또 하나 낙이 있는데, 나는 영화며 드라마며 이런저런 작품들을 꼭 몇 번씩 본다. 재미있어서. 볼 게 너무 많거든. 이 인물이 뭔가 할 때 그 주변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선, 움직임, 관계의 뉘앙스. 그런 것은 한 번 봐선 절대 알 수 없다.

어떤 인터뷰에서 집에 관해 말한 걸 읽었다. 방이 몇 개 있고 공간도 넉넉한데 가구는 별로 없어서 전화받을 때면 목소리가 막 울린다고. 그 안에서 당신은 텔레비전 놓은 방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맞다. 그런데 이제 곧 이사갈 거다. 조금 더 작고 아늑한 집으로 가고 싶어서. 그렇다고 지금의 집이 엄청나게 큰 건 아닌데, 뭐랄까. 어느 순간 집과 내가 겉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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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CREDIT INFO

EDITOR 이경진
PHOTOGRAPHY 김혁
STYLIST 홍나연
HAIR 이에녹
MAKE-UP 구현미
ASSISTANT 김윤희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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