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산구 갈월동의 청룡빌딩
스튜디오 씨오엠
준공연도 1989년 외에 정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빌딩은 현재 사무실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처음에 이 건물이 눈에 들어왔던 건 남다른 겉모습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네모난 창문들이 나열된 것이 아닌, 연속적인 물결로 이뤄진 대범한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스튜디오 씨오엠을 시작할 무렵 우리는 건물 외관을 책장 형태로 만들어보고자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우연히 청룡빌딩을 보고 이렇게 특징적인 외관을 적극 활용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행에 옮겼다. 반응이 좋아 요즘도 가끔씩 그 아이디어를 응용하고 있다. 갈월동의 청룡빌딩 앞을 지날 때면 주변의 신식 건물과 대비되는 우아함이 무척이나 반갑다.
2 성북구 성북동의 간송미술관
에이치 콤마 김한규 디렉터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 1938년 보화각이라는 이름으로 낙성(落成)된 간송미술관은 당시 서구의 혁신적 기법과 간송의 심미안이 녹아들어 있다. 최초의 근대 건축가 박길룡 선생이 설계한 이곳은 건축이 갖추어야 하는 도구로서의 기능과 질서가 있고, 사람과 환경을 연결하는 관계가 있으며, 완결되지 않은 불완전성을 내포하고 있다. 1년에 단 두 번, 일반인에게는 이곳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숲길을 지나 하얀 덩어리로 들어서 차경과 함께 어우러진 간송의 소장품들을 둘러보면 이곳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충만하게 느껴진다. 이토록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간송미술관은 현재 보수 중이어서 다시 방문하려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왠지 아쉽지 않다. 1939년 거행된 상량식에서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라는 오세창 선생의 헌사처럼, 언젠가 사라지지만 변치 않는 ‘미래의 숲’으로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3 서대문구 충정로의 충정아파트
dalkonaLAB 고나현 실장
서대문구 충정로 3가 250-5번지. 이 주소를 따라가보면 한국 최초의 아파트인 충정아파트가 나온다. 1930년대에 지어졌다고 알려진 이 건물은 한눈에 현대식 건물과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최초의 아파트가 아직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파트가 팔순이라니! 쩍쩍 금이 가 있고 페인트가 다 벗겨진 외벽, 틀어진 창문들. 건물은 허름하기 짝이 없지만 지난 80년의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아 뭉클하다. 보통 이 정도 시간을 견뎌온 건물이라면 허물고 다시 지어 올릴 텐데,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외관은 그대로, 심지어 리뉴얼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느끼게 해주는 건물이 참 좋다. 언젠가 이곳을 지나다 이 오래된 초록색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면 마음이 허전할 것 같다. 오래오래 잘 버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4 종로구 부암동의 환기미술관
한밭대학교 건축과 교수, 스노우 에이드 대표 건축가 박호현
환기미술관은 서양화가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전시하기 위한 사립 미술관이다. 건축가 우규승이 1988년부터 설계를 시작해 총 3개의 건물로 이뤄졌다. 본관은 1992년 11월에, 별관은 1993년, 수향산방은 1997년에 완공됐다. 뉴욕에서 서양 중심의 건축 역사와 외국의 현대 건축가들만 배우고 있던 나에게 방학 중 잠시 국내에 들어와 별 기대 없이 가본 환기미술관은 그동안 궁금했던 ‘한국적인 현대 건축’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당시엔 건축가 우규승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더더욱 아무런 정보 없이 찾아간 그 공간엔 김환기 화백의 그림과 건축 공간이 완벽히 어우러져 있었다. 서양 모더니즘의 건축 언어를 쓰고 있지만 분명 한국적인 그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경사가 심한 대지를 활용한 방법, 크지 않은 공간을 다양한 높낮이와 내·외부 공간을 연결하는 방법 등이 현대 건축물인데도 한옥을 닮은 공간이다. 이후에 이 건축물에 대해 알아보던 중 김환기 화백의 그림이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서구적인 수단으로 동양의 정신을 표현한다는 말로 설명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그림을 담아낸 환기미술관 역시 현대 건축의 형식 속에 한국의 공간을 어떻게 담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한국 건축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정표 같은 건축물이다.
5 중구 정동의 서울 성공회성당
<아레나> 피처 에디터 서동현
20대 때는 왜 그렇게 정동 일대를 헤매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고궁에 가는 것도, 예술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았고 돌담길을 따라 걷는 것도 좋았다. 아마 서울 사람이 아니어서, 괜히 서울을 대표하는 오래된 양반 동네를 가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던 정동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서울 성공회성당이다. 첫눈에 ‘여기는 참 격이 있는 공간 같다’고 생각했다. 1922년 착공한 이 성당은 건립할 당시엔 자금난에 허덕여 1926년, 결국 미완성인 채로 준공됐다. 원래의 설계도가 없어서 증축도 못하고 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1996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 준공도 굉장히 드라마틱한데 1993년, 한국을 다녀간 영국 관광객이 렉싱턴 도서관에서 설계도를 찾아내면서 이뤄진 것이다. 서양의 건축 양식에 접목된 한옥이 참 조화롭고 아름답다.
6 광진구 능동의 어린이대공원 안 꿈마루
빌트바이 임성빈 소장
본래 어린이대공원은 조선 순명황후 민씨의 능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경성골프장이 됐다. 1970년 이곳에 건축한 서울 컨트리클럽 하우스가 다시 꿈마루로 바뀌었다. 이곳은 서울에서 몇 안 되는 ‘잘 재생된’ 건축물이다. 푸른 공원 속에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띠고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 외관의 건물은 언뜻 공사 중인 것으로 보일 만큼 이질적이다. ‘방치’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본래 건물의 상처와 부식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 구석구석 4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는 꿈마루에 가면 꼭 한 곳에 앉아 멍하니 건물을 바라보곤 한다. 그렇게 한참을 보다 보면 건물이 간직한 역사와 세월 속으로 빠져든다. 이런 경험을 줄 수 있는 건물은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도 켜켜이 쌓여가는 이야기들이 더 오래 보존되었으면 한다.
7 용산구 후암동의 주한 독일문화원
아카이브파트너스 박상준 대표
1978년 세워진 독일문화원은 2013년 리모델링 후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해 남산 자락 경관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소월길을 따라 바라보이는 건물은 1층 같지만, 알고 보면 총 4개 층으로 배치되어 있다. 실제 남산 지형을 고려해 계단식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건물 로비에 들어서면 4개의 면을 모두 유리로 감싼 덕에 용산과 그 일대의 풍광이 한눈에 들온다. 마치 산 중턱에 걸터앉아 고요히 휴식을 취하는 느낌을 받는다. 외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내적인 구성도 주목할 만하다. 독일 특유의 합리적이며 간결한 디자인이 반영된 가구와 조명, 그리고 공간을 가득 채우는 독일 음악과 미술품은 독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서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남산의 수려한 산세와 독일의 모더니즘이 만나 동서양의 조화를 보여주는 독일문화원을 서울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으로 손꼽고 싶다.
8 서교동·홍제동의 공동주택
쿼츠랩 디자이너스튜디오 박성재 실장
고개를 들어보면 천편일률적인 건물만 시야에 가득 찬다. 이제 아파트나 대형 빌라 같은 공동주택은 더 이상 브랜드 로고 외에 특별히 다른 점을 찾기가 힘들다. 오히려 예전의 공동주택, 시기를 짚자면 1970~1980년대 건축된 공동주택의 모습에서 매력을 느낀다. 특히 서교동 영진아파트, 홍제동 원일아파트, 지금은 없어진 공익빌라는 2017년의 서울에서 보기 힘든 근사한 장면을 품고 있다. 공익빌라는 계단식 건축 구조 사이에 쭉 뻗은 계단과 그를 가로지르는 복도가 인상적이다. 입구에서부터 그 스케일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영진아파트와 원일아파트는 단지 내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보이드(void) 공간, 즉 오픈된 공간과 은은한 채광이 녹색식물과 어우러져 건물에 자연스러운 생기를 더한다. 겹겹이 놓인 보이드의 경계는 어디서 바라보건 시야 내에서 멋진 레이아웃을 완성해낸다. 그 시절의 공공주택은 거창하진 않지만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묻은 장소로 근사하면서도 담담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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