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말하는 LP, 바이닐의 부활?
바이닐의 수요가 늘고 있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 따르면 2008년 세계적으로 5백만 장에 불과하던 바이닐 판매량이 2015년에는 3천2백만 장으로 600% 성장했다. 바이닐에서 테이프, CD, MP3, 디지털 스트리밍으로 진화하던 음악 플랫폼 시장에 다시금 아날로그, 바이닐이 도래한 것. 터치 한 번으로 손쉽게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는 시대에 바이닐을 찾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다니, 희귀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서는 원더걸스 〈아름다운 그대에게〉와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정규 1, 2집 앨범 그리고 박재범×기린의 〈City Breeze〉가 바이닐로 발매된 바 있으며 성공적인 판매를 이뤄냈다. 국내 유일의 레코드 중심 음악 축제 ‘서울레코드페어’가 2011년부터 7년간 성황리에 치러진 것만 봐도 바이닐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아날로그, 복고 열풍의 한 맥락으로 간주하거나 스타의 ‘굿즈’로서 도구적 역할 또는 과시적 문화의 소비 대상이라 주장한다. 결국 유행의 일부분이라 믿는 것. 하지만 턴테이블 위에 직접 바이닐을 올려 톤 암을 내리고 소리에 집중해본 경험이 있거나 바이닐 판에 소리골이 새겨지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복고나 굿즈 역할 너머에 바이닐만이 간직한 가치를 이해할 거라 믿는다. 원초적이고 직관적인 감성과 낭만 말이다. 바이닐의 탄생 과정 즉, 일종의 공디스크라 할 수 있는 래커 판 위에 소리골이 새겨지는 과정은 과학적이면서 동시에 낭만적이기도 하다. 또 청음할 자세를 유지한 채 그 소리의 골을 따라가는 일은 단순히 이어폰을 꽂고 거리를 걸으며 듣는 음악과는 다르다. 총구로 표적을 겨냥하는 사냥꾼처럼 자세를 낮추고 상대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소리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대상, 어떤 감각과 감정을 만난다. 나는 이걸 디지털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따라올 수 없는 오직 바이닐만의 가치라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가치. 현대 자본 시대의 영웅 스티븐 잡스도 집에서 바이닐을 즐겨 들었다. 일본 대표 작가로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와 국내 독보적인 길을 걸어온 작가 장정일도 바이닐 컬렉터이니 말이다.
마장뮤직앤픽처스
이 흐름에 맞춰 국내에 종적을 감췄던 바이닐 제작 공장이 새롭게 탄생했다. 마장뮤직앤픽처스다. 보다 정교한 바이닐 제작을 위해 ‘바이닐 팩토리’와 ‘마장 스튜디오’ 둘로 나누었다. 덕분에 통상 체코, 독일 등 해외 제작 공장에서 이뤄줬던 주문 제작이 보다 손쉬워졌다. 해외 제조 단가와 기본 5~6개월 대기해야 하는 주문 및 배송 문제가 국내에 자리 잡은 공장을 통해 해결된 것. 또 국내 유일의 현역 커팅 엔지니어 백희성이 바이닐의 음질을 좌우하는 래커 커팅 마스터 제작도 우리 기술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과연 한국 음반 시장에 바이닐이 과거의 명맥을 이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직접 찾아가 바이닐 제작 과정을 지켜봤다. 놀라웠다.
마장 스튜디오
마장역에 위치한 ‘마장 스튜디오’는 과거 1968년에 설립된 유니버샬 레코딩 스튜디오가 전신이다. 유니버샬 레코딩 스튜디오는 말 그대로 레코딩 스튜디오로 신중현, 김민기, 조용필, 나훈아, 양희은, 산울림, 전람회, 서태지와 아이들 등이 거쳐간 대한민국 1세대 대표 녹음실이라 할 수 있다. 2010년 마장뮤직이 인수한 이래로 ‘마장 스튜디오’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는 아날로그 전문 레코딩 스튜디오로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는 바이닐 제작 과정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래커 커팅이 이뤄진다. 래커 커팅이란 공디스크라 할 수 있는 래커 판에 음원(마스터 소스)을 소리골로 새기는 과정이다. 래커 판이 외부 요소에 민감해 단절된 공간, 스튜디오에서 래커 커팅을 진행한다. 이 작업을 하는 노이만 커팅 머신 VMS-70은 국내에 몇 대 남지 않은 귀하고 예민한 기계다. 그리고 페인트 재질의 래커 판이 연질이라 래커 커팅은 전문가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작업이다. 때문에 커팅 과정은 아날로그 전문 녹음 엔지니어로 알려진 국내 유일의 현역 래커 커팅 엔지니어 백희성이 도맡았다. 백희성의 손길을 거쳐 완성된 래커 마스터는 성수동에 있는 바이닐 팩토리로 이동한다.
바이닐 팩토리
래커 커팅을 제외한 바이닐 제작의 모든 과정을 진행하는 공간이다. 주목해야 할 건 마장뮤직앤픽처스가 수차례 시행착오 끝에 개발한 프레싱 플랜트 시스템(머신). 바이닐 프레싱 머신계의 명품으로 평가받는 TTT(Taunus Ton Technik)을 토대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실용신안 등록 계획이 있을 정도로 안정적인 시스템이다. 안전한 화학 처리 가공을 위한 도금실과 샌딩 작업을 실시하는 타공실, 바이닐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검수실까지 공간을 세분화했다. 덕분에 제작 도중 다른 곳을 거칠 일이 없다. 그간 바이닐을 제작하려면 독일, 체코 등 해외 제작 공장과 접촉하며 높은 제조 단가와 배송비 그리고 오랜 제작 기간을 감수해야 했는데, 높은 퀄리티를 겸비한 마장뮤직앤픽처스 덕분에 이와 같은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이다. 첫 발매작은 조동진의 6집 앨범 <나무가 되어>였다.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의 앨범 〈Bach: Sonatas & Partitas〉와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 등 해외 음반도 마장뮤직앤픽처스를 통해 발매될 예정이다.
바이닐 탄생 과정
01 래커 커팅
공디스크라 할 수 있는 래커 판에 음원(마스터 소스)을 소리골로 새기는 과정이다. 쉽게 말해 매끈한 판에 바늘로 소리의 골을 새기는 것.
02 세척·실버링
소리골을 새긴 래커 마스터를 세척 후 화학 처리하여 실버링한다. 래커 마스터 판을 본뜨는 과정. 실버링돼 나온 판형을 파더. 이를 다시 본뜨면 머더 판이 나온다.
03 스탬퍼
머더 판을 도금 처리하면 바이닐을 찍어내는 스탬퍼가 된다.
04 프레싱
프레스 머신에 스탬퍼 한 쌍을 부착한다. 여기서 한 쌍이란 바이닐 판의 앞면 뒷면이 될 스탬퍼들이다.
05 비스켓 성형
바이닐의 원재료 PVC를 녹여 프레싱 직전의 비스켓을 성형한다.
06 프레싱·쿨링
위아래 동일한 압력으로 비스켓을 압축한 뒤 안정적으로 굳도록 냉각시킨다. 프레싱 후 바이닐을 다듬으면 완성.
07 청음·검수
완성된 바이닐을 검수하는 과정이다. 표면 상태를 현미경으로 살피며 청음을 통해 소리골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다.
08 패킹
바이닐을 원형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제작한 맞춤 박스에 포장하여 출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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