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할이 작아도 좋은 걸 하고 싶었다. ‘돈 좀 못 벌고 인지도 떨어지면 어떻노. 내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싶었다. 나는 늘 행복하려고 한다.
스트레스나 우울함 같은 건 없다. 늘 단순하게 산다.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친구들하고 술 먹고 놀면 된다.”
다들 알겠지만 배정남은 2000년대 초·중반 ‘패션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화보와 패션쇼를 통해 멋이란 것을 폭발시키던 그는 옷 잘 입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우상이었고, 카리스마로 신장의 한계를 가뿐히 극복한 톱 모델이었다. 한동안 그는 간간이 영화에 출연했지만 예전처럼 자주 만나긴 힘들었다. 대신 이태원 등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신을 꼭 닮은 멋진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 봄, 영화 〈보안관〉이 개봉하면서 배정남의 인생이 달라졌다. 그는 부산 기장에 사는 에어컨 설치 기사이자 ‘행님’들과 무리 지어 다니길 좋아하는 순박한 촌놈 ‘춘모’를 연기했다. 그리고 함께 출연한 배우들과 영화 홍보를 위해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 스타〉에 출연했다가 뜻밖의 홈런을 날렸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입담은 진하고 구수한 부산 사투리를 만나 날개를 달았다. 예능인의 꿈인 〈무한도전〉에도 벌써 몇 차례 출연했다. 사실 배정남은 한 번도 배정남답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의 말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흥 많은 라이프스타일도 다름이 없다. 배정남은 ‘뭘 입어도 옷태가 나는 멋있는 형’에서 ‘무슨 말을 해도 재미있고 호감 가는 형’으로 탈바꿈한 지금이 너무 좋다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도, 급할 것 없으니까 천천히, 안 되는 일에 욕심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며 즐겁게 살 거다. 여태까지 그래 온 것처럼.
분홍색 줄무늬 수트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제품.
“일 없어도 스트레스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사니까 일이 오는 거다. 맨날 갇혀서 질질 짜고 걱정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영화 〈보안관〉은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내 인생은 〈보안관〉 전과 후로 나뉠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선배님들과 감독님, 스태프를 만났다. 그리고 여태까지 맡은 역할 중 가장 자신감을 가지고 연기할 수 있었다. 또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어 흥행도 잘됐다. 나에겐 1석 3조를 안겨준 작품이다.
첫 대사 기억하나? “행님, 텐션 장난 아닙니데이” 뭐 이런 거였는데. 정말 그 동네 싸움 좀 하는 사람 같더라.
최대한 촌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차림이 쫄티, 배바지, 구두와 금목걸이였다. 그리고 왜 팔 근육만 무식하게 키운 몸 있잖아. 몸도 밸런스 안 맞게 키우고, 볼살도 통통하게 찌우고 그랬다. 옷을 그렇게 입으면 확실히 걸음걸이도 날티가 난다. ‘가오’ 잡게 되거든. 그렇지만 속으론 여리고, 눈물과 겁이 많은, ‘잘 쪼는’ 남자로 캐릭터를 잡았다.
그게 다 본인의 아이디언가?
우리 감독님이 진짜 좋은 분인 게, 내 의견을 많이 존중해주셨다. 내 생각을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더 특별한 현장이었다. 같이 연기한 선배님들도 마찬가지고. ‘정남이는 편하게 잘 풀어줘야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다’고 하면서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보안관>이 개봉하는 줄도 몰랐던 사람들이 〈라디오 스타〉를 통해 영화를 알고, 배정남을 다시 알게 됐다.
같이 하는 행님들이 너무 좋아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홍보를 많이 하고 싶었다. 우리 영화 스태프가 이런 말을 해주더라. “이 형 조기 축구 벤치 멤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프리미어리그 해트트릭 선수였다”고. 〈라디오 스타〉 이후로 영화 홍보가 꽤 됐다. 나를 검색하면 영화 제목도 함께 뜨고 하니까. 나랑 영화 둘 다 홍보가 돼서 행복했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 기뻤다.
인스타그램에서도 홍보 정말 열심히 했던데?
출연 배우들이 죄다 40대, 50대니까 SNS가 뭔지도 모르지. 아저씨들이 인스타그램 할 줄 알겠나? 근데 요즘 세상에 SNS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로 다 홍보하잖아? 그래서 내가 무대 인사하러 갈 때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 “지금 극장 가는 중입니데이” 하면 사람들이 또 주목해주고. 나중에 성민 선배님도 “정남아 빨리 뭐 찍어서 올리라”고 하시더라. ‘내 아니면 누가 하겠노’ 하는 마음이었다. 진웅이 형이 하겠나, 성균이 형이 하겠나.
내친 김에 요즘 〈무한도전〉에서도 자주 보인다. 혹시 고정되는 거 아닌가?
무도 행님들이 정말 잘 챙겨주신다. 나는 또 편하지 않으면 잘 못하거든. 내 첫 예능 데뷔도 ‘무도’였고, 현장이 늘 편하다. 고정되면 열심히 하는 거고, 아니면 몇 번 나가고 마는 거지 뭐.
예전엔 길거리 지나가다 마주쳐도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요즘엔 다들 배정남을 재미있어 하고 친근하게 느낀다.
그 변화가 훨씬 좋다. 예전엔 남자 팬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아줌마와 어린 꼬마들도 나를 알아본다. 얼마 전까지 나를 봐도 사진 찍자는 말을 못 꺼냈는데 지금은 무조건 웃으면서 뛰어온다. 나도 그런 게 좋다. 그래서 진짜 얼굴 상태가 폐인이 아니고서는 99% 함께 사진 찍는다.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옷 입고 큰 역할 맡아 작품과 나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될 바엔 하지 않을 거다. 천천히 쌓아나가고 싶을 뿐이다.”
연기는 왜 시작한 건가? 패션왕으로 패션 업계에서 성공하는 게 더 쉬웠을 텐데.
예전에 모델 하면서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에 주인공으로 많이 캐스팅됐다. 그때 2박 3일씩 촬영하면서 눈물 흘리는 감정 신도 찍고 그랬다. 그러면서 재미를 느꼈다. 런웨이에 서던 모델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
첫 시작은 어떤 작품이었나?
〈시체가 돌아왔다〉라는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꽤 컸다. 그런데 사실 연기라기보다 그냥 서 있고, 대사도 많이 없었다. 그런데 미장센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단편 영화 〈가면무도회〉는 꼭 이야기하고 싶다. 2013년도에 찍은 영화인데, 우연히 감독님을 소개받고 그분이 찍은 15분짜리 단편 영화를 봤다. 그것에 반해서 하겠다고 말했다. 캐릭터가 엄청 세고, 파격적이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생을 그린 영화다.
그런데 사실, 억양 때문에 배역이 제한적일 수도 있다.
맞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잘하고 싶다.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하고 싶지 않다. 이런 억양 써도 이 안에서 얼마든지 잘해낼 수 있다. 그런 역할이 분명 있을 거다. 어색하게 뭘 바꾸기보다는 오달수 선배님처럼 내 캐릭터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꾸준히 연기를 해왔지만 욕심 부리지 않은 것 같다. 본인 캐릭터만으로도 더 다양한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급하게 생각하니까 더 안 되더라고. 대충 뭐 아무거나 하려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그렇게 할라치면 벌써 여러 작품 하고 그랬겠지. 근데 그렇게 시작하면 바로 내리막길이란 걸 안다. 나는 역할이 작아도 좋은 걸 하고 싶었다. ‘돈 좀 못 벌고 인지도 떨어지면 어떻노. 내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싶었다. 나는 늘 행복하려고 한다. 스트레스나 우울함 같은 건 없다. 늘 단순하게 산다.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친구들하고 술 먹고 놀면 된다. 이러고 십몇 년을 살아왔으니까.
긍정의 화신 같다.
일 없어도 스트레스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사니까 일이 오는 거다. 맨날 갇혀서 질질 짜고 걱정하면 될 일도 안 된다. 내가 웃고 즐거워야 내 곁으로 사람들도 오는 거지, 맨날 하소연만 하면 보기 싫을 거 같지 않나? 그렇게 사니까 일을 떠나 주변에 배우와 감독님들이 많이 생겼다. 서로서로 나를 소개해줬다. 감독님이 있는 술자리에 ‘정남이라고 재밌고 착한 친구 있다’고 해서 데려가고, 그렇게 놀다가 일을 많이 딴 것 같다.
영화 관계자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요즘 배정남은 극호감이다.
‘우짜다 이래 됐노’ 싶다. 근데 나답게 하니까 참 재밌다. 이번에 제주도 가서 효리 누나랑 <무한도전> 촬영한 것도 진심으로 웃으면서 했다. 나 춤추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 카메라 앞에서 완전 발광을 했다. 그냥 너무 좋고 재밌으니까 자연스레 그리 되더라고. 그리고 명수 형이 까칠할 줄 알았는데 진짜 잘 챙겨주셨다.
형님들에게 사랑받는 성격인가 보다.
특히 이번 영화로 만난 성민이 형, 성균이 형은 어떤 위치건, 누구건 간에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똑같아서 존경스럽다. 그리고 나 혼자 산다고 집에 불러서 밥도 챙겨주신다. 얼마 전에 영화 오디션을 봤는데, 성민이 형이 미리 대본도 맞춰주셨다. 이런 선배가 세상에 어딨나.
형님들 말고 동생들과도 잘 지내나?
그럼. 조언도 많이 해준다. 모델 출신 애들한테는 어깨에 뽕 넣지 말라고 말해준다. “니도 한번 바닥 치봐야지 안다”고 한다. 배우를 준비하는 후배가 있는데, 모델 쪽에선 이미 톱이지만 연기 쪽에선 완전 막내거든. 둘은 별개의 세계다. 이번에 진웅이 형이랑 영화 들어가던데 막내로서 하다못해 고기라도 한 번 더 자르라고 말해줬다. 영화는 함께하는 예술이다. 모델 쪽에선 어떨지 몰라도 연기 쪽에선 완전 신인이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런 얘기해주면서 잘 지낸다, 동생들과도.
이쯤에서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것 같다.
얼마 전에 드라마 제의가 들어온 적 있다. 그런데 드라마를 아주 예전에 한 번 해봤는데 촬영 전날 대본 나오고 하는 긴박한 상황을 내가 못 따라간다. 철저히 준비하고 팀원들끼리 함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경험을 더 해보고 싶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지금은 내공이 쌓이질 않아 자신이 없다고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런 선택은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할 듯한데? ‘이번 기회 아니어도 다음에 하면 되지’ 하는 여유가 느껴진다.
마음의 여유는 늘 있다. 나는 뭐 작은 역할, 카메오 두세 신에 나와도 내가 잘 살릴 수 있다면 선택한다.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옷 입고 큰 역할 맡아 작품과 나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될 바엔 하지 않을 거다. 천천히 내공을 쌓으면서. 안 어울리는 옷 입고 큰 역할을 맡는 건 싫다. 천천히 쌓아나가고 싶을 뿐이다.
이런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10년 전에 성격도 급하고 뭐 몰랐을 땐 안 그랬지. 산전수전 다 겪고 뒤통수도 맞아보고 그러다 보니 깨달은 거다. 급할수록 여유가 있어야지, 아등바등하면 더 힘들어진다는 걸.
힘들 때도 ‘난 뭘 해도 될 놈이다’라는 믿음이 있었나?
주변에서 좋은 사람들이 응원을 많이 해줬다. 나에겐 든든한 친구들이 많다. 내가 나대로 사니까 그 모습을 좋아해주더라고.
배정남답게 산다는 게 참 좋아 보인다. 그런데 배정남답게 사는 건 뭘까?
거짓 없고 가식 없이 사는 거. 나는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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