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곳에 왔다. 2월의 가장 추운 날,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해안가 놀이공원에. 내가 제안하긴 했으나, 정말 그러자고 할 줄은 몰랐다.
미리 보여준 장소 사진이 예쁘더라. 그림이 좋을 것 같아서. 문제는 나다. 하하. 좋은 배경에 이런 인물이 들어가면, 그림 와장창 무너지지 않을까.
김주혁은 좋은 사람 같다.
내가?
그런데 좋은 사람이기보다 멋있게 사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하더라.
멋있게 살지 못해서 한 얘기였을 거다.
어떻게 살아야 멋있게 사는 건가?
즐길 줄 아는 삶.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가장 멋있다. 나는 그걸 못하는 것 같거든. 재미있는 줄 모르고 살아가는 건 답답한 일이다. 어차피 한 번 살다 죽을 인생인데.
즐거운 기분을 쉽게 느끼지 못하는 편인가?
일에 있어서는 아니다. 일할 때는 즐겁다. 정말 즐기면서 한다. 그런데 그 외의 내 삶은 참 뭐가 없다. 예전에는 쇼핑도 좋아했는데 이제는 의미 없다고 느낀다. 겉치레가 뭐 중요한가. 그나마 재미 붙여서 꾸준히 하는 거라면 헬스인데 그것밖에 할 게 없다는 사실이 참 한심스럽다.
자신을 굉장히 낮추어 말하는 것 같다.
그런 편이다. 나 자신이 맘에 안 든다.
배우들은 보통 자기애가 흘러넘치던데.
나는 아니다. 자기애가 별로 없다. 그래도 그 덕에 자만 같은 건 일체 안 한다.
하려고 든다면, 굉장히 많은 걸 즐길 수 있는 나이 아닌가? 지금 김주혁이 못할 게 뭐가 있나?
맞다. 그런데 나는 뭔가에 빠지는 게 쉽지 않은 인간이다. 금방 빠지는 일이 좀체 없다. 한번 해보고는 ‘와, 좋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뭔가에 매력을 쉽게 못 느끼는 편이다. 한참 걸린다. 사람을 만나도 금방 안 친해진다. 헬스도 처음에는 얼마나 하기 싫었다고. 하하. 계속 하다 보니까 이제는 중독이 되어버린 거지. 내가 많은 것에 빠졌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에. 사람도 많이 만나면서 살면 좋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연기에는 어쩌다 그렇게 푹 빠질 수 있었던 걸까?
그냥 즐겁더라. 일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게 여전히 많다. 뭐, 그다지 좋은 점은 아닌 것 같지만. 하여튼 일밖에는 재미를 못 느낀다니 스스로 좀 불쌍할 때도 있다.
조금 더 어렸을 땐 어땠나? 이를테면 20대 때.
그때도 몰랐다. 술 먹고 놀러 가고 그런 재미밖엔 없었다. 놀러 가도 잘 못 노는 애였다. 하하. 그런 애들 있잖나. 쫄래쫄래 따라가긴 하는데 신나게 못 노는 애들. 내가 딱 그랬다. 분위기에 취해서 막 놀지도 못하고. 술을 안 먹으니 더 그랬다. 술에 취해 미친 짓도 하고 그래야 재미있는 건데. 맞네. 술을 안 먹어서, 항상 맨 정신이니까.
멋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갈망이 늘 있었나 보다.
맞다. 그러니까 결국 용기가 없는 거지. 멋대로 살 수 있는 끼가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이 나이에 뭘 좀 하기로서니 누가 얼마나 욕을 하겠나. 그냥 막 살아보는 것도 괜찮은데, 겁이 많은 것 같다. 이 부분도 역시 일에 있어서는 다르다. 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편이다.
잘해왔으니까, 잘되었으니까. 자신감이 있는 것 아닌가? 일에 있어서만큼은.
그건 아니다. 해봤더니 별것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해보니 얻는 게 분명히 있고 망해도 다 경험이고 그 속에서 배우는 게 있으니까. 큰 고난이 오지는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아는 것 같다. 이제 무엇이 나에게 온다 해도 잘해볼 준비가 되어 있다. 여러 가지를 해보고 싶다. 하고 싶은 게 무척 많다.
혹시 그 여러 가지 중에 예능 프로그램은 포함되지 않나? <1박 2일> 속 ‘구탱이 형’ 김주혁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아마 안 할걸? 하하. 원래 나의 관심사 안에 예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다 <1박 2일>을 하게 되었던 거지. 그래도 <1박 2일>이 연기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확한 표현을 찾기가 조금 어려운데, 경직되었던 어떤 부분이 풀어진 느낌이다. 배우이지만, 평상시 내 모습을 나 자신도 못 보지 않나. 심지어는 거울을 통해 보는 내 얼굴도 꾸민 얼굴이다. 잘생겼나, 못생겼나 보면서 얼굴을 꾸미잖아. 그런데 <1박 2일> 속 나는 꾸미지 않은 모습이 보였다. 그때마다 느끼는 게 꽤 있었다.
지난여름 개봉한 영화 <비밀은 없다>부터 <공조>, 올해 개봉 예정인 스릴러 <이와 손톱>까지. 근래 행보를 보면 그간 김주혁이 무엇에 목말랐는지 분명히 보인다.
심한 갈증이 있었다. 한동안은 계속 로맨틱 코미디물만 들어왔거든. 다른 종류의 작품은 구경도 못했다.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 로맨틱 코미디는 절대 하기 싫었다.
결국 배우도 작품 하면서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제대로 굴러보고 싶은 판에 들어서지 못할 때 괴로울 것 같다.
게다가 이미 내가 해놓은 것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했으니까. 환장할 노릇이지. 만족한 적이 없다. 아마 죽을 때까지 없을 거다. 그래서 내가 연기한 작품을 다시 보는 것도 잘 못한다. 시사회에서도 겨우 본다. 우연치 않게 TV에서 보게 되면 채널 돌려버린다. 하하.
개인적으로, 배우가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일은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설정된 배역의 감정에 자신을 투영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 말이다. 그때 배우는 뭔가를 하는 척해야 함과 동시에 하지 않는 척해야 하니까.
그래서 내 생각에 결국 배우는 척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어떻게든 척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배우의 일인 거다.
<공조>에서 차기성을 연기한 김주혁을 두고는 칭찬이 자자했다. 새삼스럽게 ‘섹시하다’는 말도 다시 들렸다. 차기성은 분명 섹시했지만, 그보다 더 눈에 든 것은 얼굴에 스며 있던 묘한 긴장이었다. 등장하는 장면은 많지 않았지만, 잠깐 동안 비친 차기성의 얼굴은 감정을 넘어서, 영화가 설명하지 않은 인물의 전과 후를 상상하게 했다.
아무래도 내가 악역 맡은 걸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신선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어떤 기분이나 감정을 품을 때, 그 감정이 얼굴에 자연스레 배어나는 것 같다. 40대에 접어들면서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건이나 감정이 있었다면, 이제는 내가 이 장면에서 뭘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해 확신이 생긴 거다. 작품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현장에서 상대가 어떻게 하든 잡아줄 여유도 생겼다.
작품 속에서 김주혁은 튀려고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상대 배우의 연기를 잘 받쳐준다. <공조>에서도 철저히 영화에 필요한 만큼을 꽉 채우며 해내더라. 더 지를 수 있는 순간에도 말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앙상블이거든. 나는 원래 받아주는 스타일이다. 상대역에게 줘버려야 하는 장면이라는 판단이 서면, 아예 그에게 다 밀어준다. 이런 태도에는 사실 장단점이 있는데, 단점은 상대가 연기를 못했을 때다. 상대가 나에게 조금 주면 나도 조금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내가 하고자 한 걸 표현하지 못할 때도 있다.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상대가 나에게 조금 줘도, 나는 많이 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잘해야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다.
‘신스틸러’라 불리는 배우들의 연기와는 다른 종류의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겠다.
그랬다. 나는 잘 모르겠더라. 그렇게 자기 건 다 챙겨 먹어야 하는 건가, 그게 맞는 건가, 그게 뭔가. 여전히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내가 중요시하는 앙상블을 깨고 주도해야 하는 건가. 한국에서는 배우가 뭘 많이 보여줘야 잘하는 배우처럼 인식하지 않나. 이상하게 하고 독특하게 하는 게, 잘하는 것처럼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걸 보고 따라 하는 후배들도 생기고. 뭐가 맞다 틀리다 할 수는 없겠지만. 연기도 유행이 있다는 확신은 있다. 배우는 그 유행을 잘 타고 넘어가야 한다. 할리우드 영화 풍의 연기가 유행할 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연기를 지향한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나의 롤모델이다.
미묘한 연기 디테일이 예술이잖아. 나 역시 굉장히 좋아하는 배우다.
그렇게 연기하고 싶다. 그런데 그런 연기를 필요로 하는, 할 수 있는 판이 없다. 콘티가 없다.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해보고 싶은데 말이다.
혹시 지금 이 시점에 다시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나?
전부. 다 다시 하고 싶다. 그럼 완전히 다르게 하겠지. 완전히 다르게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아내가 결혼했다>를 다시 하더라도? 완전히 다르게 하고 싶나?
더 사실적으로 할 것 같다. 영화적이지 않게. 그 연기에는 어느 정도 영화적 허구가 있었다고 생각하거든. <아내가 결혼했다>는 당시로선 사실적인 부분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많이 느끼며 연기했다. 하지만 다시 한다면 더 사실적으로 하겠지.
홍상수 감독과 작업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처럼?
그 작업할 때 좋았다. 툭툭 내뱉는 걸 좋아하는 데다, 무척 사실적이니까. 배우 입장에서는 ‘힐링’되는 기분이었다.
‘더 사실적으로’ 하는 연기란 절대적인 기준인 것 같다. 가까이 갈 수는 있어도 정말 사실은 아니니까. 영영 채우지 못할 갈망일 수 있다.
그렇지. 그래서 결국 노하우를 쌓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실제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순간을 보면, 감정의 리액션이 그렇게 격하지 않거든. 진짜 감동은 그런 데서 오는 것 같다. 등장인물이 마구 운다고 관객이 따라서 울지는 않잖아. 배우는 감정을 그런 투박한 방식으로 전달하면 안 된다. 나는 우리나라 영화가 그런 감정을 너무 강요하는 것 같다. 연출이나 앵글, 배우의 연기가 온통 강요하는 식이다.
어떤 상황에 대한 감정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스테레오 타입이 존재하기도 하고.
그런데 잘 모르겠다. 관객이 그러한 것을 또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할리우드에 그렇지 않은 영화가 정말 많지 않나. 물론 강요하는 영화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도 만든다.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하면서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거나.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보는 식의 표현이 감정을 더욱 잘 전달하는 방법인 것 같다. 최근에 <로스트 인 더스트>를 봤는데 정말 좋았다. 거기서 제프 브리지스는 그야말로, 아.
그런 영화, 김주혁도 언젠간 하겠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언제쯤 할 수 있을까? 그런 거 해볼 수 있는 때가 언젠가는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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