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랑이 형님>
글·그림 이상규 | 네이버 만화
재미있는 작품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묘한 일이다. 정말로 재밌는 작품 앞에서 우리는 그것이 왜 재밌는지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저 빠져드는 것이다. 한참 푹 빠져 있던 <호랑이 형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첫 화부터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우선 주인공이 정말로 아름답다. 잘생긴 얼굴에 깊고 푸른 눈빛. 떡 벌어진 상체에 미끈한 하체. 이렇게나 아름다운 만화 주인공은 드물다. 굳이 비교하자면 <슬램덩크>의 서태웅과 강백호를 합친 정도? 그것도 작화가 절정에 달한 마지막 권 수준으로. 그만큼 <호랑이 형님>의 현재 주인공 ‘산군’의 외모는 절대적이다.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인데도 그렇다.
그냥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다. <호랑이 형님>에는 이형의 존재가 펼치는 호쾌하고 이색적인 액션이 가득하다. 짐승끼리의 싸움에서 어떤 움직임을 볼 수 있을까? 동물과 인간 형태의 존재가 싸운다면? <호랑이 형님>은 이러한 호기심을 정면으로 충족시킨다.
이빨과 앞발이 주무기인 네발 짐승 산군과 몸집이 거대한 추이의 대결은 사람끼리의 싸움과는 전혀 다른 긴장을 자아낸다. 여기에 다양한 설화에서 차용한 독특한 설정이 빛을 발한다. 사람과 짐승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등장인물은 저마다 독특한 전투 방법을 지녔고, 그들이 선보이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전투는 승패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
<호랑이 형님>의 재미는 예측불가의 전개에 있다. 사실 액션 만화는 전형적인 공식에 좌우되는 측면이 있다. 이런 만화들을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각각의 전투가 어떤 식으로 끝날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호랑이 형님>의 전투는 이러한 전형성을 배반하는 형태로 성립된다. 쉽게 마무리될 것 같은 싸움은 의외의 변수로 뒤집히고, 뒤집힌 싸움은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극복된다.
반전은 강렬한 향신료와 같다. 적당히 사용하면 예상치 못한 맛을 내지만, 과하면 아예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반전이 제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선 공감할 수 있는 사연이 필요하다. 산군에게는 산군의 입장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 맞서는 추이에게도 신념은 존재한다. 무커의 복수심에도, 푸른 늑대 베르텐게의 사명감에도 이유는 있다.
작품의 핵심 악역인 흰눈썹에게조차 나름의 정당성은 있다. 각기 서로 다른 입장이 납득될 때, 그들의 투쟁은 단순한 싸움이 아닌, 보다 장엄한 비극이 된다. 놀라운 것은 <호랑이 형님>의 줄거리가 겨우 시작 단계라는 점이다.
육중한 울림으로 처절한 싸움을 계속 해가는 수많은 형님들. 모습을 드러낸 형님들과 사라진 형님들과 아직 등장하지 않은 형님들은 어떤 사연을 겪어왔고, 어떤 운명과 마주할까. 지금까지 본 것으로도 흡족하지만, 이후는 더욱 기다려진다. WORDS 이영훈(<연애의 이면> 저자)
<호랑이 형님>
파란 눈을 가진 호랑이 산군이 주인공이다. 산군은 머리가 하얀 특별한 아이를 지키는데, 아이를 빼앗으려는 무리들이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방대한 서사와 촘촘한 복선, 처절한 액션에 눈과 마음이 호강한다.
2 <고수>
글 류기운 | 그림 문정후 | 네이버 만화
나는 웹툰 작가들을 기본적으로 존경한다. 매주 찾아오는 마감의 압박을 이겨내야 하고 회마다 부여되는 별점과 수많은 댓글. 정해진 분량을 이미지로 채워 넣어야 하는 작업엔 그 어떤 요령도 들어올 틈이 없다. 그저 일정한 높이의 물리적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그들의 작업 방식을 온전히 알진 못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자 입장에서 상상해보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일인지 알 것 같다. 이러한 연민과 존경을 바닥에 깔고 개인적인 취향으로 애정하는 웹툰을 생각나는 대로 조금만 열거해보고 싶다.
<가우스 전자>(작가님 좋아합니다!), <생활의 참견>(깨알 같아요. 늘 재미있습니다), <덴마>(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계속 연재해주세요) 그리고 지금 내가 찬사를 늘어놓을 절정의 웹툰이 있다. 바로 <고수>다.
어느 날 웹툰에서 ‘문정후’라는 이름을 발견하자마자 헉, 소리를 냈다. 그 옛날 만화방에서 <용비불패>를 읽던 황금 같은 시절이 고스란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용비불패>가 어떤 작품이었나. 무협 만화의 기본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곳곳에 배치되어 세련된 감각과 흥미 넘치는 매력으로 가득 찬 명작 중의 명작이 아닌가.
특히 말 한 마리에게도 마성의 매력을 부여할 정도로 캐릭터를 그려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문정후 작가가 웹툰을 연재한다는 소식은 그저 반가웠다. 그냥 옛 추억에 젖게만 해줘도 좋다는 마음으로 <고수> 첫 화를 봤다. 솔직히 기대는 안 했다. 제목도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흠, 고수가 나오는 무협 만화겠군’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용비불패>의 감각과 재미가 생생히 살아 있으면서 작화는 훨씬 세련되고 강력해졌다. 스토리는 웹툰에 최적화되어 다음 화를 기대하도록 감질나게 딱, 딱 끊어주는 센스까지 갖추었다. 화려한 귀환 정도가 아니라 뛰어난 감각을 갖춘 웹툰계의 샛별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고수>는 회를 거듭할수록 훌륭했다. 탄성이 떨어지지 않는 엄청난 분량과 섬세한 디테일이 극도의 만족감을 선사했다. 재미있다는 말은 입 아프게 길게 할 필요도 없다. 지금 ‘철사자 도겸’ 편이 연재되고 있는데 나는 유료 결제를 해버려서 3주 동안 아무런 소망이 없다. 작가와 친해지고 싶다. 그러면 콘티라도 미리 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고수>를 좋아하는 수많은 독자 중 한 명일 뿐이다. 그저 일개 독자 입장에서 나는 소심하게 감상만 한다. 매일매일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지는 베플의 세계에서 뛰어난 언어의 마술사들보다 더 멋지게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면이 주어졌으니 내 마음을 표현해보고 싶다. “고수불패. 퀄리티란 이런 것이죠! <고수>가 웹툰계의 초고수가 되길 바라고 늘 응원합니다.” WORDS 정용준(<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저자)
<고수>
전설의 무협 만화 <용비불패>의 두 작가가 다시 손잡았다. <고수>의 주인공인 강룡은 만두 배달원이다. 전직은 사파 무림의 절대자 파천신군 독고룡의 제자이며 천하 제일의 고수다. 의도치 않게 싸움에 빈번히 휘말린다.
3 <사이드킥2>
글·그림 신의철 | 네이버 만화
<사이드킥2>의 세계에서는 보이는 것이 전부다. 보이는 것은 미래의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슈퍼 파워를 획득한 등장인물이 편을 갈라 벌이는 전쟁이다. 슈퍼블릭(super+public)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세계를 흔든다. 선과 악이라는 명분은 흔적만 있다.
선은 히어로고, 악은 빌런이다. 선의 가치는 악의 공격으로부터 슈퍼 파워 없는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고, 악의 가치는 세계의 지배다. 그 이상은 없다. 보이는 게 다다. 히어로와 빌런은 힘에 의해 움직이고, 곧 힘이 <사이드킥2>의 세계를 지배한다.
웹툰은 내게 친숙한 만화책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장르다. 만화책처럼 좌우로 페이지를 넘기며 읽는 오랜 독서 습관까지 웹툰은 수정하게 한다. 대부분 웹툰은 좌우로 넘길 수 없고, 휴대폰의 터치 기능을 이용해 위아래로 스크롤해가며 읽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상하 스크롤이라는 새로운 읽기 방법 때문에 웹툰의 성격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이전 페이지를 보기 위해서는 이미 내려 본 분량을 전부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하므로, 좀처럼 지나간 페이지를 다시 찾아 읽게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러한 웹툰의 매체 특성 때문에 만화책보다 더 대중적으로, 더 캐주얼하게, 더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간 회가 있다는 점에서 작품에 과거가 있지만, 그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웹툰은 더 빨리 더 가볍게 소비되는 특성을 갖게 된다. 과거의 무게에서 해방된 웹툰은 서사 장르에 필수적이라 여긴 개연성과 필연성이라는 미학적 중력에 대해서도, 마치 중력 스킬을 쓰는 슈퍼블릭처럼 훨씬 자유롭게 대처한다.
과거 없는 <사이드킥2>의 세계에서는 개연성과 필연성을 따지는 ‘왜?’라는 질문이 등장하지 않는다. 히어로와 빌런은 만나자마자 덮어놓고 서로 살육하고, 복선도 없이 새로운 스토리라인이 거의 매회 등장하며, 5분이면 읽는 한 회에 반전이 두세 번씩 거듭된다. 과거를 되짚어보지도, 왜라고 따지지도 않으니 <사이드킥2>을 읽는 속도는 가히 슈퍼급이다.
<사이드킥2>는 독자에게 새로운 독서 경험을 안겨주지만, 그 경험만큼 작품 자체가 새롭지는 않다. <사이드킥2>의 세계는 신분이 세습되는 봉건 사회다. 슈퍼블릭들은 실제 역사에서는 사라진 신분제도 안에서 갈등과 다툼을 벌인다. 주인공인 라미아 릴리스의 말처럼 “히어로 지위를 돈으로 사든가, 아니면 스스로 정의를 집행”해야 하는, 심지어는 신분 간의 이동도 쉽지 않은 강력한 신분제가 유지되는 사회다.
히어로들의 대표자인 라이트닝은 “클래스는 영원하다”라고 선언한다. 히어로 행정부인 인류안보위원회의 임시본부는 중세 유럽풍의 고성이다. 그 밖에도 장르의 상투적 설정과 표현을 가져다 쓴 클리셰들은 차고 넘친다. 읽다 보면 작가가 그런 클리셰들을 모르고 썼다는 느낌도 들지 않고, 그렇다고 애써 지양하려 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어쩌면 클리셰를 쓴다는 것에 아무런 터부도 없는 것이 웹툰의 또 다른 특성인지도 모른다. 기존 소설이나 만화 장르에서 창작자의 나태를 지적하는 클리셰의 남용이 웹툰에서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걸까. WORDS 백민석(<장원의 심부름꾼 소녀> 저자)
<사이드킥2>
도시에 나타난 악당 빌런들과 맞서 싸우는 슈퍼히어로와 사이드킥들의 이야기다. 전편에 이은 두 번째 시즌으로 금발의 육감적인 슈퍼히어로 나이트메어는 여전히 막강하고, 와인을 즐긴다.
4 <마스크걸>
글 매미 | 그림 희세 | 네이버 만화
장편 소설을 쓸 때 어느 지면에 정기적으로 연재하는 방식을 취하는 소설가는 난처하면서도 즐거운 상황에 놓인다. 나는 전체적인 플롯은 정했으나 이야기의 세부는 스스로도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 상태로 석 달 간격의 연재를 시작한 적이 있다.
문예지 연재였으니 독자는 많지 않았지만, 내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인물을 ‘죽였을’ 때, 안타까움을 표한 사람들이 조금 있었다. 후에 나는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죽었던 인물을 ‘살려냈다’. <마스크걸> 첫 회를 보았을 때, 절제된 색 사용과 그림체에 주목했다.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처음에는 현대에 만연한 외모지상주의를 꼬집는 정도의 웹툰일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마스크걸>에는 우월한 외모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몸매는 엄청나게 예쁘지만 얼굴은 그다지 예쁘지 않은 설정으로 나오는 모미는 마스크를 쓰는 동안에는 인터넷 방송의 스타지만, 회사에서는 온갖 구박을 감내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이야기로 보였다.
플롯과 입체감 있는 인물을 어느 정도 갖춘 이야기라면 독자는 해당 이야기에, 그리고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게 마련이다. 독자가 얼마나 이입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성패가 갈리기도 한다. 그런데 <마스크걸>에는 우리가 주인공 모미에게 더는 감정을 이입할 수 없는 순간이 자꾸만 나타난다.
만취한 모미가 인터넷 방송 도중에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자위 행위를 할 때, 그리고 스토커이자 회사 동료인 주오남을 살해할 때 등이 그런 순간이다. 첫 회부터 놓치지 않고 매주 이 웹툰을 보던 나는 꼬박꼬박 댓글창을 확인했다. 그리고 모미가 예측불허의, 시쳇말로 ‘막 나가는’ 행동을 할 때마다 댓글들은 탄식을 토해냈다.
나는 탄식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모미가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지, 그러니까 어디까지 막 나갈지 궁금했다. 이 작품의 1부 후기에서 매미 작가와 희세 작가는 “가끔, 주인공이 작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다”고 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서였다.
1754년에 사망한 영국 소설가 헨리 필딩 역시 <업둥이 톰 존슨 이야기>를 쓰면서 인물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골치가 아프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와 인물이 스스로 구성하기 시작하면 나타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모미는 마스크를 벗고 성형수술이라는 마스크를 쓰면서 또 다른 인물로 거듭난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거듭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모미는 우리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반하겠다는 듯, 어떤 구속도 받지 않겠다는 듯, 경찰의 수사망과 주오남 모친의 추적과 독자의 예상을 가뿐히 앞지른다. 그러나 독자가 감정을 이입할 수 없는 인물은 모미만이 아니다. 가장 최근에 업데이트된 ‘라라의 삶’ 에피소드에 달린 베스트 댓글은 ‘모든 등장인물이 싫은 만화는 이것밖에 없을 듯’이다.
보통의 인간 존재가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을 온갖 부정적 측면들을 감추지 않고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독보적이다. 모미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일단 소설가인 나는 당분간 계속 질주하는 모미를 보고 싶다. 모미를 애처롭게 바라보면서도 마냥 응원할 수만은 없는 애매한 마음으로. WORDS 한유주(<불가능한 동화> 저자)
<마스크걸>
‘얼굴은 끝내주게 못생기고 몸매는 끝내주게 좋은 여자, 김모미’의 이야기다. 극단적인 상황을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 어른들의 외모지상주의라고나 할까? 마음은 불편하지만 자꾸만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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