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하게, 최근 열흘간 스케줄을 봤어요. 주말 구분 없이 딱 하루만 일정이 없던데요.
매일 일정이 있지만 드라마 촬영이나 공연이 없는 시즌이라, 종일 일하진 않아요. 나에겐 이런 때가 휴가예요. 요즘 엄청 잘 쉬고 있어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사람도 거의 안 만나고요.
에너제틱하고 유쾌하다는 말로 유준상을 설명하는 인터뷰 기사를 많이 봤습니다만.
밝고 유쾌해 보이는 건 겉모습이죠. 내가 그렇게 하니까요. 이유가 있어요. 즐겁게 일해야 함께하는 사람들이 힘들지 않거든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싶어요. 쉴 때는 혼자 있는 게 좋아요. 누군가를 만난다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은 아닌 거죠.
혼자 있는 시간은 어떻게 보내나요?
아이들과 놀고, 음악도 만들고, 여행을 갈 때도 있어요. 아무 일 없어도 새벽까지 뭔가를 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겨요.
그럴 때 단편 소설이나 시를 쓰기도 한다죠?
글쓰기를 즐겼죠. 요즘은 거기에서 확장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음악 영화를 만드는 데 모든 시간을 쓰고 있어요.
이번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초청된 그 영화죠? 유준상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궁금했어요. 지금까지 “연출은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다”며 선을 긋곤 했잖아요.
음악 영화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어요. 제목은 <내가 너에게 배우는 것들>이에요. 실은 영화 하나 만들어보자며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우연히 찍게 됐어요. 제가 이준화라는 20대 청년과 함께 ‘제이 앤 조이 20’이라는 이름으로 음악을 하고 있어요. 앨범도 냈어요. 4년 됐어요.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요. 하하.
우리는 새로운 뮤직비디오를 찍으러 남해에 가기로 했어요. 장거리를 가야 하니까 출발 전날 차를 점검했는데, 시동이 안 걸리는 거예요. 다음 날 아침에 물어보니 반나절 동안 수리 센터에 맡겨야 한다고 하는 거죠. 일행은 정오에 만나기로 했는데 말이에요. 저희 동네에 번지점프대가 하나 있는데 그 순간 딱 보였어요. 이 친구들한테 너무 미안해서, 차 수리 끝날 때까지 번지점프를 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그 모습을 일단 찍자고요.
준화가 번지점프대에서 뛰어내리는데, 갑자기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너에게 배우는 것들>은 이렇게 시작해요.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번지점프를 뛰었다.” 주요 등장인물은 40대의 나와 20대의 이준화, 둘이고요.
이렇다 할 얼개 없이 시작됐네요.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은 이유가 있었을까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여행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 나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일이기도 했고요. 대체 나는 왜 음악을 하려고 하는 건가? 젊어지려고 하는 건가? 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땐 즐기는 마음뿐이었는데, 하다 보니 다른 마음이 든 것 같아요.
음악을 하면, 게다가 젊은 친구와 함께 음악을 하면 나도 젊어질 것을 기대했던 거죠. 영화 속의 유준상도 마찬가지예요. 이준화라는 친구는 나보다 20세가 어리니까 그를 따라 하면 나도 젊어지지 않을까 하는 거죠.
자신을 거의 그대로 투영한 영화군요.
네. 시작할 때 정해진 건 남해로 간다는 사실뿐이었어요. 마지막 장면을 찍기까지 4박 5일이 걸렸고요. 여정 중에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가 생각났고, 영상으로 담았죠. 밤이 되면 편집을 하고 음악을 만들어 넣었어요.
원고를 쓰기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면 길을 나서요. 그러고 나면 또 어떤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이후 후반 작업만 1년을 했어요. 음악과 사운드에 공들이느라고요.
배우라는 직업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개’이기 때문에 의미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반면 감독의 일, 감독이라는 역할에서는 어떤 의미를 찾나요?
모든 것을 해보는 경험이랄까? 나는 음악과 여행을 사랑하고 연기를 사랑해요. 그런 걸 총체적으로 다 해볼 수 있더라고요. 내 속내를 파헤쳐보는 기회도 되었고요. 내 생각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하다 보니, 영화 만드는 동안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안 났어요. 연기할 때만큼 집중하죠. 엄청나게 몰입하는 그 순간의 느낌이 좋아요.
연기하는 유준상을 제외하면, 유준상이 하는 나머지 작업은 모두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계속 시도해보는 것 같아요. 결국 자신에 관해 생각하고 탐구하는 게 유일한 목적인 것은 아닌가요?
너무 잘 보셨네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맞아요. 내가 전달할 수 있는 건 사실 너무 소박한 이야기예요. 그냥 내 이야기니까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알아봐주는 게 진짜 목적은 아니에요. 알아봐주면 좋은 일이지만요. 하하.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주 조그만 영향이라도 주어서, 한 알의 작은 영양제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죠. 지금 내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진 않잖아요. 하지만 우연히 음악을 들은 누군가가 ‘묘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네’ 하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교감이니까요.
그런 순간을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음악이든 영화든,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해요. 언젠가, 누군가, 어떻게든 듣겠지 하면서.
곧 개봉할 강우석 감독의 첫 사극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 흥선대원군 역으로 등장합니다. 김정호가 그릴 전국 팔도의 지도가 품은 권력을 꿰뚫어보고, 자신의 손에 넣으려는 인물이죠. 강우석 감독은 “유준상은 이 영화를 통해 더욱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감독님께서 나를 정말 아껴주십니다. 더 좋은 배우로 성장하길 바라시고요. 나이 50을 바라보는데도 그분에게는 후배이니까요. 강우석 감독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국한된 이미지를 넘어선 유준상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아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윤희성이었던, 그런 유준상 말인가요?
그렇죠. 뮤지컬 공연에서 자주 표현하던 캐릭터예요. <피리 부는 사나이>는 시청률이 높지 않았고, 공연 역시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콘텐츠는 아니잖아요. 아직 누군가는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방귀남으로만 유준상을 인식할 수도 있죠. 그런데 사실 나 스스로는 어떤 면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이야기의 어떤 축을 담당하는 자리인가에 관해서는요?
자리를 가리지도 않아요. 모든 역할은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럼 나는 주어진 몫만 생각하면 돼요.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잘 전달할까, 하는 거죠.
중요한 건 이야기뿐이겠네요.
맞아요. 영화든 뮤지컬이든 저예산이든 아니든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해요. 공연이나 촬영하는 동안에는 나보다 극이 잘 보여야 하고요.
전체를 본다는 말인데, 그렇게 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뮤지컬 무대에 서면서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관객과 직접 대면하다 보니 보이더라고요. 관객은 결국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보는구나. 배우는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무조건 잘해야 하는 것이지만, 재미의 진짜 알맹이는 배우가 아니라 이야기구나.
어떤 작품은 아무리 좋은 배우가 출연해도 흥하지 않잖아요. 화려하게 돈을 들였지만 객석의 관객은 졸고 있는 거예요. 나는 무대에서 조화를 배웠어요. 내 욕심을 버리고 상대방을 더 밀어주는 법을 배웠고요.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 출연할 때도 그랬죠. 아주 작은 배역을 맡은 단역 연기자와 함께할 때도 그 사람들이 조금 더 돋보일 수 있도록 신경 썼어요.
유준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도태되거나 정체되는 일인가요?
두렵다고 생각 안 해요. 두렵다고 생각하면 끝없이 두려워지니까요.
도태되지 않길 바라는 것은 맞나요?
도태되면 도태되는 거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인정해요. 나는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편이에요. 내 직업은 배우다. 나이 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할 수 있는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확장해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데 쓸 수 있을까? 음악과 영화를 만들어보고 글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하죠.
다 연결된 일이라고 여겨요. 내가 배우로 데뷔하던 20여 년 전에는 여러 가지를 하는 배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냥 하나만 잘하지,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요.
연기라는 한 우물만 파는 일이 배우의 미덕인 때가 있었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다 한 우물 파는 일이에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일들이죠. 좋은 배우가 되는 건 좋은 사람이 되는 거고요. 나는 배우라는 직업을 특별하게 보지 않아요. 배우는 직업일 뿐이고, 여느 사람과 같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를 위해 살 뿐이에요.
유준상이 노리는 건 전혀 없을까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길 하네요. 사실 아주 나중에 이야기할 내 모토가 그것이거든요. 정말 아주 먼 훗날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만든 다음에 또렷하게 말하고 싶어요. “나는 정말 노리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요. 지금 이 단계에 말할 것은 아니고요. 아직은 말없이 계속 해나가야 하는 시기죠.
그렇다면 지금 보여주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
좋은 연기, 멋진 연기는 분명 아니에요.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 그 자체죠. 선배 티 내지 않고, 장난치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진지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후배에게도, 관객에게도. 나와의 싸움이죠. 쉽지 않은 싸움이요. 나이 먹을수록 더 어려워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홀로 계속 하는 것, 그걸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한다는 게 참 쉽지 않아요.
영혼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는 노력이네요.
그런데 또 중요한 건 자유로운 영혼 역시 품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어느 구석은 자유롭고, 어느 구석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해요.
밸런스를 맞추는 일.
참 어렵지만, 재미있죠. 음악과 영화 작업, 글쓰기는 나의 감성이 계속 꿈틀거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일이기도 해요. 감성이 쇠퇴하거나 안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 했으니까 됐지 뭐’ 하는 순간 끝이라고요. 더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건 누군가 한순간 정의 내리는 게 아니라 각자 살아온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거잖아요.
유준상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건 뭔가요?
여행이요. 그래서 여행을 즐겨요. 여행길에서 나는 한층 더 자연스럽고 유연해져요. 좋은 데 묵지 않고, 많이 걷는 여행을 좋아해요. 최근에 또 두 번째 영화를 만들었어요. 나 스스로 엄청나게 ‘디스’하며 시작하죠.
나를 그렇게 해부하지 않고서는 내가 가진 생각을 펼쳐낼 수 없으니까요. 첫 번째 영화 <내가 너에게 배우는 것들>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아무도 안 듣는 음악, 우리끼리 이렇게 해서 뭐하니?” 하면서 시작하거든요.
자학에 가까워 보이는데요?
자학이죠. 하하. 솔직히 인간이 아무것도 노리지 않을 수 없잖아요. 내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으면 좋겠고 내 영화에 더 많은 관객이 들었으면 하죠.
하지만 내 영화를 만들어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줄 때 내가 느낄 행복이, 알아주지 않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을 때 느끼는 행복과 어떻게 다를까. 진짜 다를까? 누군가 굉장히 알아줄 때 행복할까? 20대 배우 시절, 나는 무척 치열하게 순간순간을 대면했어요. 닥치는 대로 했어요.
잘될지 안 될지 전혀 모르던 시기이니까요. 그때를 지금도 잊지 않으려 해요. 나는 지금도 여전히 시간을 반드시 지키고 약속은 어기지 않아요. 늘 열심히 하고 시키면 다 하죠. 20대 때보다 더 열심히 해요. ‘그래, 지금도 시키면 다 하니까 뭐. 안 변했네. 좋네.’ 이런 생각이 들 때, 나는 안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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