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박원태 assitant 김창규 Editor 김현태
취직을 했다고 해서 맘놓고 출근도장을 찍을 수 없는 세상이다. 말 그대로 무한경쟁 시대인 것이다. 가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게 만약 내 회사라면, 이런 열정과 노력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곧 현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내겐 창업 비용을 대줄 만한 돈 많은 부모님도 없고, 통장에 찍힌 잔액은 한숨만 나올 지경이니 말이다. 역시 내 팔자는 그냥 열심히 회사에 충성해야 할 샐러리맨인가 보다 하고 자위하면서 다시 업무에 매진한다. 지난 연말, 친구들과 가진 송년 모임에서 이런 내 심정을 내비쳤더니, 또래 친구들 거의 모두 공감을 표시했다. 모임의 주요 화제가 어렸을 때 자주하던 여자친구나 군대 얘기가 아닌 바로 재테크와 자신의 미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제 세상은 낭만을 허용하는 시대가 아니다. 주식의 오르내림이 내 사랑하는 여자의 기분 상태보다 더 크게 다가오니 시대를 욕해야 할지, 나를 탓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어찌되었든 지난 한 해 동안 짭짤한 재산상의 이익을 본 친구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여전히 카드값 메우느라 정신 못 차리는 나 같은 청춘은 친구들의 핀잔 아닌 핀잔을 들어야 했다. 모든 친구들이 재테크에 성공한 이를 최고의 찬사와 함께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나를 진정 놀라게 한 친구는 따로 있었다. 그를 안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니 꽤 막역한 친구다. 나이 서른이 넘은 친구의 평소 스타일은 이렇다. 아프로(흑인의 과장되게 부풀린 머리) 헤어와 커다른 배기 팬츠, 미국 NCAA리그 소속 대학팀의 저지와 MLB 오리지널 야구 점퍼, 처음 보는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타투까지. 아무튼 보통 또래와는 다른 성향의 친구다. 어릴 때부터 이 친구와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수다를 떨곤 했는데, 나름 삶에 대해 사뭇 진지하게 고민했던 20대 중반의 주요 화젯거리는 의외로 사업이었다. 대화의 요지는 대충 이랬다. 당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던‘JOKER’라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미국물’ 좀 먹었다는 유학파들이 사랑하는 이 브랜드는 힙합 쪽에선 명망이 높았다. 우연찮은 기회에 이 브랜드를 접한 우리는 “함께 조커를 꼭 들여오자”라는 말을 농담 삼아 하곤 했다. 우리의 관심이 힙합이다 보니 ‘DC’나 ‘TRIPLE FIVE SOUL’같은 힙합 브랜드가 주요 관심사였다. 당시 우리는 청계천에 유통되는 헌 잡지에 나와 있는 흑인 래퍼들이 입고 있는 멋진 로고 티셔츠에 반해, 이 브랜드들이 한국에만 들어오면 대박날 거라고 목에 핏대 세우며 열광했었다. 그런데 송년 모임에 나타난 이 친구는 어느 힙합 바에서 디제잉을 하고 있을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무역회사에 다니는 게 아닌가? 거나하게 술이 올랐을 때, 솔직히 네가 무역회사에 다닐 줄은 몰랐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친구의 대답은 놀라웠다. 그는 우리가 20대 중반에 장난 삼아 말하던 그 얘기들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었다. 즉 국내 미유통 브랜드를 수입해서, CEO가 되는 꿈을 말이다. 더구나 브랜드 본사와 얘기가 한창 오가는 중이라고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들여오려는 브랜드가 힙합이 아닌 아동복 브랜드였다는 것.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갑자기 내 몸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한 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이미 상당 부분 작업이 진척된 상황이었기에 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 친구가 아동복을 주요 테마로 잡은 것은 힙합 브랜드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할 거라고 판단해서라고 한다. 무역회사에서 맡은 업무도 향후의 비전을 감안해 아동복 부서를 지원했다고 한다. 해외 브랜드를 국내에 들여오는 것은 크게 4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는 어떤 브랜드를 들여올 것인가 하는 선정의 문제이고, 둘째는 콘택트 라인을 세우는 것이다. 그 후 복잡한 수입 통관 절차를 마치면 마지막으로 국내에서 본격적인 영업을 하는 것이다. 샐러리맨 신세에서 벗어나 CEO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막상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금전적 문제와 더불어 방법을 몰라서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선 브랜드를 정하는 것이 선결 문제다. 단 ZARA나 H&M같이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우는 유명 브랜드는 사실상 거대 기업만이 그 조건을 충족시켜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즉 일반 개인은 중소 브랜드나 디자이너 브랜드를 접촉하는 게 훨씬 낫다. 친구는 업무 과정 중 알게 된 아동복 브랜드에 꾸준히 이메일을 통해 연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작년 10월 뉴욕에서 개최된 바이어들을 위한 페어에 갔을 때, 자기가 그 페어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리고 본사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친구의 경우 워낙 소자본이었기에 공인 딜러(authorized dealer) 자격을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빈틈없는 자료와 함께 꾸준하게 자신의 신용을 어필해야 한다고 밝힌다. 반면 미국의 미용 제품인 ‘American Crew’를 들여온 전익관 회장은 현지에 아예 ‘SACON TRADING, INC’라는 현지법인을 설치해 본사와 연락했다고 한다. 이 정도 규모로 진행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자본이 있거나, 축적된 노하우가 있을 때 가능하다. 전익관 회장 또한 처음 브랜드를 들여올 땐, 무역회사에 근무하면서 알고 있던 라인으로 접촉을 시도했다고 한다. 물론 내 친구나 전익관 회장의 경우만 보면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낙담하지 않아도 된다. ‘바네사 브루노’, ‘APC’ 그리고 ‘질 스튜어트’등 성공적인 국내 론칭을 진두지휘한 김성민 대표는 패션 분야와는 전혀 상관없는 삼성전자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해외 출장길에 아내의 부탁으로 바네사 브루노를 접하게 됐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이 브랜드를 들여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김성민 대표는 한번 점찍은 브랜드가 있으면 무작정 현지로 날아가 직접 대면을 시도한다. 직접 만날 경우 이메일보다 수월하게 얘기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아무래도 전혀 생소한 분야에 도전한 것이기에 패션 분야에서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라이선스 계약이 성사될 경우 다음 절차는 물건을 들여오는 것이다. 아동복 같은 경우 3월과 10월 뉴욕에서 가장 큰 페어가 열린다. 여기서 물건을 직접 보고 주문에 대한 기본적인 아우트라인을 잡아야 한다. 물론 페어에 꼭 참석하지 않아도 샘플이나 바이어를 위한 가이드북을 보고 주문할 수 있다. 물건을 주문하면 당연히 따르는 수순이 결제. 결제 수단으로는 신용장(Letter Credit), 전신환송금(Telegrahpic Transfer), PAYPAL 그리고 신용카드(Credit Card)까지 원하는 방법으로 구매할 수 있다. 브랜드마다 일시에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곳도 있고, 잔금을 치러야 하는 곳도 있는데, 자본이 넉넉하지 않다면 처음 얘기할 때 후자 쪽으로 협상해야 한다. 여기까지 진행하면 다음은 수입 절차 문제다. 김성민 대표는 수입 통관 문제는 전체 브랜드 진행 과정의 단 1%도 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수출입에 관한 책 한 권만 읽으면 웬만한 지식은 쌓게 되고, 대부분 관세사와 통관사가 해결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소자본으로 일을 진행하는 내 친구는 자신이 직접 통관 절차를 책임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통관사와 관세사에게 나가는 돈을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자 자신이 지금껏 경험한 업무력을 활용하기 위함이다. 보통 대량으로 물건을 주문할 경우 배를 이용하지만, 소량일 경우 항공편을 이용하는 게 낫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바로 해외 브랜드를 들여오는 대략적인 과정이다. 그 뒤 전개해야 하는 국내 영업은 전혀 다른 분야다.
여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알았다면 과연 해외 브랜드를 들여오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궁금할 것이다. 만약 일반 샐러리맨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이 필요하다면 이 모든 게 뜬구름 잡는 얘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네사 브루노라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처음 들여온 김성민 대표의 사업 시작 금액은 8억원이었다. 그리고 77년생인 에디터와 한 살 아래인 친구는 2억원의 총알을 장전했다고 한다. 김성민 대표는 자신의 매력이 출중하다면 - 외모와 영어 회화 실력 등 - 그래서 디자이너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다면 기존 브랜드보다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8억원과 2억원. 물론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비싼 기계식 시계 하나를 살 수 있는 가격이기도 하다. 어쨌든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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