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백년식당 2
에세이스트이자 요리사인 박찬일의 오래된 식당 탐방기 <백년식당>의 두 번째 이야기가 <아레나>에 연재된다. 박찬일이 오랜 취재를 통해 어렵게 찾아내고 담아낸 노포들의 역사를 기록할 예정이다.
야장이란 밤 야(夜)에 마당 장(場)을 합친 말이라고들 한다. 문자 그대로 밤에 벌어지는 페스티벌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소재가 바로 맥주이니, 독일 옥토버페스트를 빗대어 ‘을지로페스트’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천원짜리 노가리에 막 뽑은 싱싱한 생맥주를 싼값에 마실 수 있는 을지로 야장은 서울의 명물이 되었다. 특히 밤이 깊으면, 야장에서 내뿜는 열기와 노란 불빛, 술꾼들의 소음으로 환상적인 무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본디 호모 사피엔스가 놀기 좋아하는 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을지로 야장이 위치한 골목은 아마 서울에 산다면 한번쯤 친구 손에 이끌려 가보았을 이른바 명물 거리다. 을지로는 본디 인쇄골목과 조명 설비, 위생 설비를 파는 가게가 즐비한 곳이다. 또 사이사이 거대한 오피스 빌딩이 자리한다.
이들은 퇴근 후 한잔을 원했고, 그 수요에 맞춰 야장이 들어선 것이다. 밤의 열기를 일단 무시하고, 대낮에 골목을 찾는다. 그것은 이유가 있다.
이 집이 바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시작인 (을지)오비베어입니다.” 오비베어는 을지로 야장의 시작이자 역사적 거점이다. 현재 가게를 운영하는 창업주의 사위 최주영(61세)의 설명이다. 오비베어는 모든 역사의 시작은 미미한 데서 시작하는 법이라는 걸 깨우쳐주는 작고 소박한 가게다.
이제 찾아보기 힘든 바닥 공사인 일명 ‘도끼다시’가 깔려 있고, 청결하면서도 세월의 묵직한 공기가 가게에 서려 있다. 가게 내부라고 해봐야 대여섯 평 남짓, 4인용 테이블 네 개를 놓지 못할 공간이다. 그 바람에 탁자 대신 바로 구성했다.
벽돌을 얹어 튼튼하게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두꺼운 나무를 깔았다. 이 자리를 거쳐간 이, 수십만 명에 이를 것 같다. 반질반질한 탁자에 역사가 깃들었다. 얼마나 자리가 좁은지, 가게 벽을 따라 기역 자로 꺾어 붙인 바는 폭이 아주 좁다. 취했다가는 유리로 된 맥주잔을 떨어뜨리기 딱 좋다. “우리 집은 점잖은 손님들이 많아서인지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어요. 다만, 자리가 비좁고 해서 늘 송구한 마음이지요.”
가게 창업주에게 미리 인터뷰를 요청했다. 창업주는 연로하여 은퇴하고 신월동 자택에서 아내와 여생을 즐기신다. 올해 연세 무려 아흔. 과연 나오실 수 있을까. 어렵게 청을 넣었다. 낮 2시. 오비베어에는 혼자 온 낮술 손님이 두엇 앉아 있다.
가게 밖에 택시가 도착한다. 오비베어의 창업주 강효근 선생. 그가 인터뷰를 위해 기어이 거동하신 것이다. 나는, 솔직히 미리 마신 맥주 두어 잔에 혈관이 뜨거워지기는 했지만,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아아, 한 시대를 살아낸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의 얼굴. 그는 그 낯빛으로 차에서 내렸다.
놀랍게도 내 팔을 붙드는 그의 악력이 단단했다. 기억력은 또렷했고, 밝았다. 우리는 가게를 물려받은 따님(강호신, 56세)이 따라주는 맥주를 한 잔씩 마시며 수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일이지만, 그는 인터뷰를 하다 상기되었는지 담배도 두어 대 청해 피우셨다.
그야말로 노익장이었다. 그의 오랜 술회를 듣던 따님은 간혹 눈물을 닦아냈다. 모든 딸은 아버지로부터 각별한 것, “아버지”라고 부르는 따님의 말에는 정이 담뿍 배어 있었다. 그렇게 인터뷰는 따뜻한 여정을 시작했다.
여담인데, 이 집은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이 골목에서 노가리를 처음으로 판 것, 당시 오비맥주에서 공급한 1,000cc짜리 잔을 여럿 보관한 것(손님에게 제공하지 않는 보관품이다), 30년이 넘은 단골이 수두룩한 것, 낮 12시가 넘으면 손님이 찾아오는,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빨리 문을 여는 생맥주 전문점이라는 것…. 끝도 없다.
역사는 본디 전설을 만드는 것이니까. 강효근 선생은 황해도 송화군 태생이다. 지도를 보면 옹진에서 얼마 멀지 않은, 바닷가 면이다. 흔한 피란민이 되었다. ‘1.4후퇴’였다. 1951년, 중공군에 밀려서 전선이 남쪽으로 내려가자 수많은 이북 피란민이 이북을 탈출한 사건이었다.
“인민군이 입던 바지저고리 한 벌 입고 그냥 갑자기 내려온 거요.” 형님과 딱 둘만 내려온 길이었다. 다들 그랬듯이, 몇 달 전화를 피하면 다시 고향에 가서 살 줄 알았는데 벌써 66년이 되었다.
“백령도로 갔다가 엘에스디(미군 상륙선)를 타고 인천으로 왔지. 살아온 게 신기해. 그러다 동두천으로 갔어.” 그는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 유엔경찰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일했다. 일종의 한국인 군속이었다.
“철원 금화 지역에서 미군 25사단 군속으로 일했어.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일가붙이 없는 남쪽에서 그는 거의 피란민이 그랬듯이 생존 게임에 내몰렸다. 디아스포라, 고향 잃은 이들의 운명이었다. 그의 그런 악착스러운 생활력은 후에 오비베어의 오늘을 만들어낸다.
강 선생은 맥주 공급기를 ‘디스펜사’라고 불렀다. 디스펜서는 생맥주를 연결하여 맥주를 공급해주는 장치를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이 집의 역사를 이어온 중요한 열쇠가 된다. 맥주 공급 장치야 뭐 전화만 하면 공급사에서 설치해주고, 맥주를 따라 내면 장사를 하는 것이니 대단한 것이 못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강 선생의 팔뚝과 손에서 알 수 있다.
연로하시어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과거 은퇴 전에 그의 맥주 디스펜싱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고 단골들은 말한다.
“주문이 밀려들어도 전혀 내색이 없으셨어요. 잔을 기울이고, 디스펜서를 당기고, 차아악 밑술을 깔고 거품을 얹어 내는데, 그게 이른바 일관 작업이에요. 정확해요. 생활의 달인 같은 건데 뭐랄까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술, 그거 말고 뭐 설명할 말이 없네요.”
그는 여든일곱 살까지 가게에서 ‘디스펜사’를 잡았다. 놀라운 일이다. “내가 저 디스펜사를 놓지 않으려고 했어. 그러다 탈장 수술을 하고, 자연스레 딸아이에게 물려주게 된 거지.” 강 선생이 은퇴하고 아내 함한명(85세) 여사가 2년을 더 잡았다.
그리고 2015년 10월 6일, 그 세대는 완전히 물러난다. 이것이 오비베어의 역사다. 이제 따님 호신 씨가 전수받아 따르는 맥주를 마실 수 있다. 그도 ‘수제자’답게 완벽한 디스펜싱을 한다. 따를 때 짓는 엄격한 표정까지 닮았다.
이 집 맥주 맛은 어떤지 내가 말로 설명해야 할 차례다. 독자의 목이 마를 테니. 우선 부드럽다. 목을 치는 탄산 힘이 지나치지 않다. 물리적 통각으로 마시는 맥주가 아니라 맛과 향으로 마신다.
온도도 적당하다. 너무 차가운 맥주가 종종 저지르는, 맥주 맛을 내치는 일은 없다. 잔은 냉각 보관하지 않는다. 그럴 공간도 부족하지만, 차가운 맥주 온도와 잔의 상온이 적절히 최종 온도를 맞춘다. 그래서 부드럽게 넘어간다. 강 선생이 영업 비밀(?) 하나를 푸신다.
“겨울에는 4℃고, 여름에는 2℃야. 그게 적정 온도야. 모자라거나 넘치면 맛이 없어요. 맥주 맛이 그게 그거 같아도 다 다른 이유야.” 그날의 날씨와 습도도 생맥주의 온도를 결정하는 데 참고한다. 한 잔의 맥주에 과학이 숨어 있다.
이 집이 좁은 것은 이미 충분히 말했다. 그런데 어울리지 않는 설비가 있다. 엄청난 크기의 맥주 공급 장치, 즉 디스펜서와 연결한 냉장고다. 단순한 냉장고가 아니라 온도를 제어해주는 컨트롤러가 달려 있다.
근래 강제냉각 방식의 생맥주가 99.9%라는 걸 안다면, 이 장치의 수고로움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에는 다 이 장비였어. 점차 안 쓰게 된 거지.” 기억이 난다. 1980년대 맥줏집. 모든 가게가 전축 앰프처럼 생긴 컨트롤러를 달고 커다란 냉장고 안에 맥주 케그를 넣어 맥주를 뽑았다. 그때 이런 기계를 ‘호프 기계’라고 불렀다.
으레 이 기계를 달아야 생맥주를 뽑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공간도 많이 차지하는 데다 가격도 비싸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래도 맥주 맛 하나는 확실하다.
“저희는 일단 맥주 케그(통)가 들어오면 가게 뒤 공간에 냉장 보관을 해요. 단 한시도 상온에 노출하지 않는 거죠.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가게 안의 냉장고로 옮겨서 맥주를 뽑아내죠.” 따님의 설명이다. 원래 생맥주는 살아 있는 술이다. 병맥주와 똑같은 술이되, 가는 길이 다르다.
만들어낸 맥주 중에 병맥주가 될 놈은 병에 담아 저온 살균을 거친다. 생맥주는 케그로 옮겨 산소와 차단된 상태로 유통한다.
“우리 가게가 2호야. 1호는 을지로 오비맥주빌딩(두산빌딩) 지하에 있는 가게였고. 그러니 맥주 하나는 확실하게 받았지.”
강 선생은 생맥주 냉각기에 일찍이 관심이 있었다. 얼음통에 맥주 넣어 ‘시야시’하던 때 전기 냉장고의 힘을 알았다. 미군 부대에 근무했기 때문이었다.
“삼일빌딩 뒤에 만리향인가 하는 중국집에서 디스펜서를 수입했다고 하는 거야. 당시 돈으로 1백10만원이라고. 엄청난 돈이야. 1970년대니까. 나도 수입해야겠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는데 너무 비싸, 돈이 없어. 그래서 동두천 미군 부대에 가서 비슷한 걸 얻었어. 거기에다 모다(모터) 구해다 내가 달았어. 그렇게 디스펜사를 만들었던 거야.”
강 선생은 본래 생맥주를 알았다. 1970년대 종로3가에서 경양식집 노르망디를 운영했다. 당시 생맥주 파는 경양식집은 고급에 속했다. 멋진 설비를 차려놓고 생맥주를 ‘쪽끼’로 팔았다. 쪽끼, 또는 조끼라고 부르는 건 영어 ‘jug’가 일본어 발음으로 와전된 것이다.
그는 동양맥주(오비맥주로 상호가 변경된 것은 1995년 일이다)에서 당시 모집하기 시작한 프랜차이즈형 생맥줏집을 따냈다.
“지금 건물에 골조만 올라갔을 때야. 그때 2호로 우리가 된 거지. 흔히 오비호프라고들 하는데, 우리는 호프가 안 되었어. 10평 이상은 호프였고, 우리는 그냥 오비베어가 된 거야. 호프가 뭐야? 독일어로 광장이라는 뜻이니까 10평 이상 큰 가게만 해당되는 거지.”
우리가 생맥주를 호프라고 부르는 건, 바로 이때 나온 관습이다. 맥주에 들어가는 홉에서 온 말이다, 이런 건 다 와전이고 정설은 오비맥주에서 ‘호프’라는 말을 프랜차이즈 상호로 쓰면서 시작된 일이다.
그렇게 1980년 12월에 개업했다. 그때 맥주 한 잔에 3백80원, 안주는 일괄로 1백원이었다. 김, 땅콩, 어포류였다. 모두 오비맥주 본사에서 공급했다.
“그러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안주를 일괄 공급하고 파는 건 공정거래법 위반이라고 했어. 그러니 각자 가게서 메뉴를 만들기 시작했지. 각 업장마다 치킨도 팔고, 대구포도 팔았지. 우리는 노가리였고.”
자, 문제의 노가리가 등장한다. 왜 아니겠는가. 바로 이 동네를 을지로노가리골목이라고 하며, 근방 다른 가게에도 모두 이것을 구워 팔고 있으며, 서울 시내 숱한 노가리 파는 집이 대개 오비베어를 모델로 삼고 있으니까 말이다.
“매일 새벽에 우선 길을 쓸어. 여기 아무 술집도 없을 때야. 여기서 저기까지, 동네 길을 다 쓸어. 다 호감을 갖는 거지. 그렇게 살아왔어.”
그는 길을 쓸면서 깐깐한 동네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 원래 이 동네가 제지업이 많았다. 인쇄골목이라고도 불렀다. 종이밥, 인쇄밥 먹는 사람들이 까다롭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그들이 강 선생을 믿기 시작했다. 그의 술집을 들렀다. 맥주 맛이 좋았다. 거기에다 노가리를 뜯으며 고단한 세상도 씹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이니까. 술자리에서 말 잘못했다가는 보안법으로 잡혀가던 일이 실제 있던 때였으니까. 그저 사람들은 울화를 생맥주로 식히고, 노가리처럼 씹었다.
그는 아침에 떼어온 노가리를 길에서 매일 두들겼다. 일일이 손으로. 당시 양념물에 적신 달달한 노가리도 있었지만, 그는 순전히 두들겨 패야 맛이 나는 딱딱한 노가리를 샀다. 특제 소스도 한몫했다. 고추장은 고추장인데 맛이 삼삼하다. 그는 절대 이 고추장 맛의 비결을 털어놓지 않는다.
“그때 생맥주는 대포였어. 막걸리 같은 거지. 우리 집에 어떻게 사람들이 왔냐면….” 특별하게도 이 집은 아침부터 손님이 왔다. 당시 2·3호선 을지로3가역은 ‘교대(交代)역’이었다. 그러니 아침에 일이 끝나는 직원들도 많았다. 그들에게는 퇴근 시간이니 한잔하는 게 당연한 시간이 아침이었다.
대폿집은 안 열었고, 마침 호프집이 열려 있으니 그리 몰렸다. 아침부터 생맥주를 파는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아침 10시에 열고 밤 10시에 닫는 걸 한번도 어긴 적이 없어. 그게 우리 가게였어.” 그 꾸준함이 오늘의 오비베어를 만들었다.
“요즘 생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1도 높아요. 한마디 하고 싶은데, 생맥주에 물 탔니 어쩌니 하는 건 거짓말이야. 불가능하다고, 물 타는 건. 타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요.(웃음) 그러니 믿고들 드세요.”
강 선생은 매뉴얼이 있어도 자신의 혀를 믿었다. 일단 한 잔 마시고 그날의 생맥주 맛을 조절했다. 예전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30리터짜리 둥그런 케그가 있었다. 그걸 스무 통 팔았다. 이 작은 가게에서 기적 같은 일이다.
물론 ‘야장’을 마당에 깔아야 가능하다. 대략 1천2백 잔을 하루에 따른 것이다. 손목에 ‘엘보우’가 올 일이다. “옛날에는 정말 맥주 잘 마셨어. 서너 명이서 한 케그(30리터짜리)를 서서 마셨다니까. 원래 이 집은 의자가 없었어. 다치노미(서서 먹는 집이라는 뜻의 일본어)였으니까. 나중에 의자를 놨어.”
강 선생은 오픈하고 스티로폼 매트와 담요 한 장 가지고 2년 5개월을 이 가게에서 먹고 잤다. 아침에 길도 쓸고 가게를 더 잘하기 위해서였다. 옛 아버지들의 분투였다.
“그게 홍보였어. 여보쇼들, 우리 가게 와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잖어. 그랬던 거지.” 지금도 이 골목의 노가리는 오랫동안 1천원에 묶여 있다. 터줏대감인 이 집이 올리지 않으니 아무도 올리지 못하는 셈이다. 강 선생이 흡족한 표정으로 따님이 따른 생맥주를 드신다. 이렇게 한 시절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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