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사주를 보면 나에게 나무라 했다. 그래서인지 산이 집처럼 좋다. 그렇다고 주말마다 등산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산에 머무는 건 좋지만 오르는 행위 자체는 그다지 매력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백패킹을 알게 됐다. 자연과 함께하면서 산행보다는 오지에서 캠핑을 즐기는 것에 구미가 당겼다. 이미 오토 캠핑에 발을 담근 터라 백패킹이 어떤 것인지는 대충 파악한 상태. 선뜻 큼지막한 배낭부터 구입했다. 나름 쇼핑 노하우가 있어 기존에 알고 있던 그리고 좋아하던 켈티의 ‘레드 클라우드 90’을 구매했다.
배낭을 사고 나니 채우고 싶어졌다. 인터넷 쇼핑 홍수 속에서 진정한 옥석을 가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나름의 기준으로 하나둘씩 장비를 사 모았다.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니 실전만이 남았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제주도였다. 우도 안에 위치한 비양도를 목적지로 삼았다. 그래도 패션 에디터랍시고 장비들을 한번에 다 사진 않았다. 분명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첫 백패킹은 너무 좋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내내 걸었지만 불평불만은 없었다. 백패킹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도 했지만 1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짊어지고 제주도를 거닌다는 것이 그리 고생스럽지만은 않았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첫 백패킹은 성공적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뭔가 더 필요했다. 모르는 장비부터 브랜드, 배테랑의 노하우 등이 이제야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놀란 부분은 백패킹 전문 브랜드들이다. 기존에 나는 콜맨, 노스페이스, 몽벨, 코베아 등 누구나 아는 대중적 아웃도어 브랜드만 꿰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백패킹 용품은 그런 브랜드에서 찾기 어렵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목적이 다르다. 백패킹 용품은 기본적으로 경량성과 축소 패킹을 최우선시한다. 배낭에 안에 모든 장비를 넣어야 하니 그럴 수밖에. 기본적으로 모든 장비는 1kg을 넘지 않는다. 텐트는 물론 의자, 테이블, 매트, 타프, 침낭이 모두 해당된다. 그렇다 보니 각 아이템별로 잘 만드는 브랜드가 손에 딱 꼽힌다.
텐트는 힐레베르그, MSR, 시에라 디자인, 에어 매트는 서머래스트, 클라이밋, 방고, 등산 스틱은 블랙 다이아몬드, 레키, 테이블이나 의자는 헬리녹스, 베른이 있다. 이 밖에도 스토브를 전문으로 만드는 소토, 물병으로 유명한 날진, 백패킹 용품을 전반적으로 잘 만드는 국내 브랜드 미니멀 웍스와 제로그램, 10년 차 패션 에디터도 반색할 새로운 브랜드들이 밀려왔다.
생각해보면 각각의 브랜드를 이해하고 구입하는 것 또한 백패킹의 묘미 중 하나인 것 같다. 이를테면 패션의 ‘ㅍ’자도 모르는 남성이 클래식한 남성복 아이템을 하나씩 사 모을 때와 비슷한 이치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런 구매가 지속되다 보면 가치관이 흔들릴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크게 중요성을 못 느끼는 아이템을 구매할 때 꼭 전문 브랜드에서 사야 할까? 가격이 3배나 높은데? 나 역시 이런 유혹에 많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렇게 구매한 아이템은 꼭 다시 전문 브랜드에서 구매하게 된다. 앞서 말한 시행착오란 것이 바로 이런 거다. 조금 싼 가격에 현혹되어, 그것도 실물이 아닌 인터넷 쇼핑으로 구매하다 보면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엔 이런 경험이 불필요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역시 하나의 소중한 경험이었다. 실패를 해야만 얻는 값진 경험. 그리고 그 장비가 왜 좋은지 몸소 느낄 수 있는 뜻깊은 기회 말이다. 누군가 백패킹에 입문한다며 장비 리스트를 알려달라고 하면 난 처음부터 정답을 알려주지 않을 거다. 다만 이것과 저것 중 고민한다면 추천해줄 수 있다. 그만큼 두 브랜드를 안다는 얘기니까.
백패킹 장비는 옷은 많은데 입을 옷이 없는 우리네 옷장과 같아서 끝이란 게 없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같다고나 할까? 이런 과정을 겪고 나면 안목이 좋아져 구입 횟수는 줄고 실패를 하지 않는 경지에 오른다. 그러면 원 없이 백패킹을 즐길 수 있다. 산이고 들이고 바다고 국내고, 해외고 가리지 않게 된다.
가끔 캠핑을 백패킹으로 시작한 것을 아주 다행으로 느낄 때가 있다. 바로 호환성 때문이다. 백패킹은 다양한 캠핑 종류의 교집합과 같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오토 캠핑을 예로 들어보자. 오토 캠핑으로 시작한 사람은 그 규모나 무게 때문에 오토 캠핑밖에 할 수 없다.
반면 백패킹은 오토 캠핑도 가능하고 오토바이, 고무 보트로 캠핑을 즐기는 팩래프팅도 가능하다. 나 같은 경우도 차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트렁크에 모든 백패킹 장비를 싣고 다닌다. 오토 캠핑을 즐기는 이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래서 백패킹은 투자 가치가 충분하다. 단순한 취미생활을 넘어 하나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한때 술렁였던 아웃도어 열풍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때도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아웃도어는 트렌드가 아니라 문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제 거품은 걷히고 아웃도어를 문화로 삶의 일부로 여기는 이들만 남았다. 그렇게 점점 더 전문화될 것이다.
백패킹뿐만 아니라 모든 레저 활동이 그럴 것이다. 이를 알기에 다른 레포츠 문화를 존중한다. 그리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뭐든 시작하라고. 무언가에 흠뻑 빠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고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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