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를 자주 보고 싶다면? 요즘은 극장에 가는 것보다 웹사이트를 열면 된다. 검색어는 ‘채널 현대카드’. 현대카드의 온라인 방송 채널에서 그는 ‘호스트’로서 대중과 만난다. 한정판 서적을 소개하고, 좋아하는 LP 음반을 추천한다. 때론 저명 인사를 초대해 대화할 때도 있다. 배우가 진행자로 나선 적은 종종 있었다. 물론 공중파 토크쇼. 이정재는 보다 친밀하게 접근한다. 위에서 아래로 전달하지 않는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옆으로, 옆으로 퍼뜨린다. 함께 소통해보자고. 어쩌면 지금 배우 이정재의 위치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그는 데뷔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 사이 도전도 아쉬움도 환호도 겪었다. 두 세대 거치며 풍화된 이정재는 자연이 만든 기묘한 암석처럼 자기만의 음영이 생겼다. 그런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시간이 지났기에 얻는 가치. 이정재와 시네마테크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지점이다.
채널 현대카드에서 문화를 공유하면서 함께 즐겨보자는 진행자 역할을 맡았다. 예전부터 그런 역할에 관심이 있었나?
경험해보지 못한 여러 가지가 많이 있으니까 관심 있긴 했다.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겠지만, 일로 묶으면 스케줄로 짜이니까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생각만 하면 차일피일 미룰 테니까.
소개해야 하는 입장이니 관심 있는 분야는 더 살펴보게 되고, 준비나 공부도 해야겠다.
모르는 것은 확실히 모른다고, 아는 건 확실히 안다고 얘기하는 형식으로 하고 싶었다. 내가 대중의 기준이라고 해야 할까. 남들보다 어느 부분은 좀 더 알고 어느 부분은 덜 아는 걸 그대로 스스럼없이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솔직하게 대화하면서 진행하면 좀 더 재밌을 거 같았다. 일방적으로 아는 척만 하다 보면, 교육 프로그램도 아닌데, 재미없을 거다. 모르는 걸 물어봐서 알게 되는 방식이 훨씬 더 자유롭고 편하지 않나. 나 역시 모르는 걸 알아가는 게 재밌으니까.
원래 음악, 전시 같은 문화에 관심이 많았나?
많은 편이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생각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하는가 하는 점을 굉장히 궁금해했다. 나도 이야기와 감정을 표현해서 전달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얼마만큼 파격적으로, 얼마만큼 미니멀하게, 얼마만큼 깊이 있게, 이런 지점에 관심이 많다.
다른 사람의 표현 방식에 관심이 많다는 건 그 방식에 자극받고 받아들이고 싶다는 열린 자세로도 읽힌다.
본인의 습성이라든가 살아온 경험치가 표현해낼 수 있는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팔로 각도를 만들며) 이 각도 자체가 나보다 훨씬 많이 넓고, 깊게 경험한 분의 작업을 보면 감탄한다. 보면서 나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넓힐 수 있을까? 얼마만큼 내가 더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렇더라도 너무 깊이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아예 정보 없이 전시를 거꾸로 도는 경우도 있다. 선입견 없이 이 사람이 왜 이렇게 그렸을까? 하면서 혼자 유추하는 거다. 다 보고 설명 보면서 내 의견과 맞는지 다른지 보는 재미도 있다. 그런 걸 자꾸 느껴보고 싶다. 솔직히 나는 문화니 예술이니 다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여유가 없어서 잘 접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어렵다고 거리감 느끼진 않았으면 좋겠다. 혼자 산책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접근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가치를 발견하게 되니까. 시네마테크도 그런 가치를 전달하려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배우 이정재는 어떤 가치를 전달하려 하나?
글쎄… 연기자는 40~50년도 일할 수 있다. 10년 단위든, 5년 단위든 잘라서 필모그래피를 봤을 때 사회적으로 영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연기자가 그것만 의식하고 일할 수는 없으니까. 흥행이나 관객이 좋아해주는 면도 고려해야 하니까.
20년 넘게 계속, 아니 뛰어나게 해왔으니 잘했다고 자평할 수도 있겠다.
기본적으로 잘 왔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일하고 있으니까. 지금 일한다는 것에 제일 감사하고 행복하다. 앞으로 어떤 역할이 됐든, 큰 역할이든 작은 역할이든 계속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 겸손하게 말하는 거 아닌가?
일에 욕심이 너무 많을 때도 있었고,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항상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으니까. 그러면서도 현장에 있는 게 참 즐겁고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현장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사실 누구도 모르는 일이잖나.
배우를 인터뷰할 때마다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막연한 공포감을 얘기한다.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배우는 다 그런 공포감이 있나 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대가 바뀌니까 그런 거 같다. 계속 새로운 세대가 시청자로서, 관객으로서 바뀌니까. 새로운 세대가 원하는 감정이나 표현력을 알 수 없으니까 올드 세대처럼 느껴져서 그럴 거다. 새로운 세대의 감성은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러 있다. 이렇게 한 세대, 두 세대, 세 세대 넘어가버리면, 계속 이해해서 재미를 줄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 있다고 감히 얘기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세대 차이를 간과했다.
하지만 진정성은 아무리 세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으니까. 다르게 얘기하면 깊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그 부분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 나와 동년배나 선배든 이런 분들도 깊이가 안 생기는 건 아니잖나, 하하. 경쟁 아닌 경쟁하면서 서로 자극하는 존재가 되는 거다.
세대의 감성은, 지금 미디어에 나오는 배우 이정재를 보면 잘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힘 뺀 모습이 통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한 것이라고 말할 순 없다. 의도적인 부분이라면 약간 풀린 캐릭터를 살짝살짝 한 번씩 해준 정도다. 전략이라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재치 있거나 발랄한 역할을 해보고 싶은 욕구가 좀 있었다. 나 스스로도 반응에 놀라긴 한다. <관상> <신세계> <암살>에서 맡은 내 캐릭터를 굉장히 많이 흉내 내시더라. 그런 동영상이 많더라. 희한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대사까지 기억하지, 할 정도로 나도 잘 기억하지 못한 대사들이 툭툭 튀어나오더라. 그래서 선배나 감독님께 내 연기가 그 정도로 이상하냐고 물어봤다. 이상해서 날 흉내 내는 거냐고. 좋은 반응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그래서 보면 재밌다. 내가 어떤 의도로 그런 부분을 만든 건 아니니까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 면이 배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작업 결과물에 반응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결과물에 대한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의식해서 표현하다 보면 안 좋은 결과를 더러 내기도 한다. 사실 10년 전에 이미 그런 시도는 다 했다. 이제 내 표현력이 다른 분들과는 조금 다른 색깔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이젠 내 색깔을 믿고 그대로 계속 더 잘 표현하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역시 긴 세월 버릴 건 버리고 시행착오도 겪어 뭘 하든 편안한 상태가 된 건가?
그럼에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모든 게 다 편하지는 않다. 항상 다르게 보여드리고 싶은 욕망은 있으니까. 오래 할수록 연습량이라든가 신경 쓰는 시간은 더 많아진다. 예전에는 안경 썼을 때와 안 썼을 때 이미지가 달라 사람들이 잘 못 알아봤다. 지금은 어떤 모습이든 다 봤으니 새로운 걸 못 느낄 거다. 그 상황에서 나 스스로 다른 걸 찾아야 하니까 쉽진 않다.
시네마테크 얘기도 해보자. 최동훈 감독과 나온 영상에서 최동훈 감독은 고전 영화를 보면서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고전 영화 좀 보나?
시대에 상관없이 여러 영화를 가리지 않고 많이 본다. 고전 영화에서는 근본적인 스토리 라인과 샷 구성을 볼 수 있다. 본질적인 부분을 접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연출자와 배우는 고전 영화를 대하는 시각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연출자는 현란해진 요즘 영화와 다른 고전 영화에서 본질적인 면을 더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반면 배우는 본질전인 표현법도 중요하지만 요즘 영화에서 표현하는 지독할 정도의 생활 연기를 보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내 기준에선 그렇다.
지금까지 본인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작품이 오래 남아서 고전 영화관에 걸리면 좋겠나?
<젊은 남자>가 걸리길 바란다. 1994년 여름에 찍어서 겨울에 개봉한 영화인데, 당시가 영화계에선 중요한 시기였다. 그 시절 유학 갔다 돌아온 새로운 영화인들이 굉장히 많았다. <젊은 남자>는 배창호 감독님이라는 거장과 작업했는데, 배 감독님마저도 새로운 표현을 하고 싶어 했으니까. 기성 감독님들도 뭔가 바꾸고 싶어 하는 욕구가 팽배한, 젊은 에너지가 당시에 있었다. 자기 꿈과 욕망을 위해서 파멸로 치닫는 젊은 남자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두 번 다시 할 수 없기도 하고. <젊은 남자>가 기억 속에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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