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만 대표는 업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손꼽힌다. 대형 건축사무소에서 마흔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대표직을 달았다. 건축계에서는 그것만으로 그의 이름이 회자되었다. 물론, 그가 빠른 성공만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 주변의 거대한 건물을 만들어왔다. 용산역, 플로팅아일랜드, 행복도시 중심행정타운, 서울추모공원 등 우리 곁의 익숙한 공간 중 많은 게 그의 작품이다. 건축, 도시, 조경 등 다양한 영역과 거대한 규모의 마스터플랜도 그가 맡은 업무의 일부일 정도다. 대한민국 건축계를 이끌어가는 젊은 건축가로 알려진 김태만 대표와 술잔을 기울이며 솔직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SF 영화를 즐겨 보고, 피겨와 DVD를 모으기도 하는 남자다. 성당 합창단의 일원이자 딸의 학원 시간에 맞춰 운전기사 노릇을 하고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는 열혈 아빠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동산 투자에서 쓴맛을 본 건축가라는 숨은 이야기도 있다. 파란만장하다.
해안건축의 젊은 대표
해안건축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다 너무 지루해서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게 해안건축이었다. 1990년 설립한 회사에 1994년 입사했다. 막 태생한 회사로 쓸 만한 프로젝트들을 발표하는 시기였다.
입사 초기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하이테크 건축가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 스타일을 살려 시도한 게 원주 시청사 현상 공모였다. 당연히 떨어졌지. 완전히 하이테크 스타일로 설계했는데, 디테일이 많았다. 당시는 컴퓨터 그래픽 초창기였는데, 렌더링하다가 다운되는 일이 잦았다. CG 수준도 낮았거든.
40대 초반이라는 이른 나이에 대표가 되었다. 업계에서 큰 화제였다. 어떻게 된 건가?
사원으로 시작했다. 당시 작은 회사라 가방끈이 길다고 대리부터 시작했는데, 금세 과장, 실장 등 회사가 성장할수록 매년 직급이 달라졌다. 그러다 소위 부소장이라는 ‘부’자만 단 소장에 오른 게 2000년 정도였던 것 같다. 몇 년 뒤 디자인 대표를 맡게 되었다. 회사가 작아서 운이 좋았지.
30대 초·중반에는 자신감이 넘칠 법도 하다. 많은 사람이 그런 시기를 겪으니까. 그때 박사 과정을 마치기 위해 학교에 갈지, 독립해서 건축사무소를 차릴지 갈등은 없었나?
그런 생각을 조금은 했었다. 당시 규모가 큰 일을 많이 했고, 마스터플랜이나 대형 프로젝트들을 많이 진행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독립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주택이었지만, 성에 안 찼다. 그때는 큰 걸 그리는 게 좋았다. 물론 지금은 무섭지만. 이제는 작은 걸 그리고 싶다. 차라리 지금은 현실을 제대로 알아서 독립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힘들 거다. 몸과 마음이 배고플 것 같다. 하하.
그럼 결국 건축회사를 평생 다니는 건데, 아쉬움은 없나?
물론 한계는 있다. 생각을 해안건축이라는 큰 틀에서 한다. 내가 원하는 목표점이 아니더라도 해안건축을 위해 필요한 디자인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내 일은 직접 하는 것, 훈수를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등이다. 모른 척하는 일은 본부장님이 알아서 잘해야 하는 일이고, 훈수 두는 일은 해당 프로젝트의 목표를 살펴야 하고, 내가 직접 붙잡는 것들은 조금 더 내 스타일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여러 이해 관계자들의 의견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 분명 한계는 있다. 내 색깔을 보여줄 기회가 적은 것은 맞다.
조직에서 위로 올라가다 보면 못하게 되는 것들이 많을 것 같다.
스스로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아진다. 초기에는 내 색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40대까지는 자신이 뭘 잘할 수 있는지, 무엇이 자신의 몸에 더 맞고 관심사인지를 알아보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자기 시간을 많이 가질 필요가 있는 것 같고.
이제 50대에 접어들었는데, 본인만의 건축 방향을 세워서 추구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진행하고 있다. 해안건축 설립자가 그런 마인드다. 나 역시 그 생각에 공감하기 때문에 CDO를 하고, 계속 만들어 나가고 있다. 색깔이 있는 스튜디오 집합체는 해안건축이 지향하는 것 중 하나다. 아직 조직을 구성한 것은 아니지만, 내부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큰 규모의 회사들이 작품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어려운 점은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다 보니 프로젝트 진도가 안 나간다. 사실 프로젝트가 커지면 오너가 없다. 그럼 실무팀들이 각계의 요구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계획안이 진행될수록 뭉툭해진다. 모든 세부를 하자 없는 것으로 선택하게 되고, 재료도 무난한 걸 고르고, 특이한 점은 잘라내는 식으로 진행한다. 보수적이 된다. 그런 구조 때문에 높은 퀄리티의 대형 건물이 안 나오는 것 같다.
유럽의 공공 프로젝트 중에는 굉장히 쇼킹한 경우도 많다. 국가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와 비교해볼 때 어떤 차이가 있나?
사회가 디자인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하느냐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건축을 비롯해 디자인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경제 발전과 관계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아직 경제 성장기다. 지금부터 건물을 공들여 만들어가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은 예전에 성장기가 끝났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가 성장기였고. 앞서 말한 나라들은 공들여 만드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추정한다.
직접 작업한 프로젝트 중에 플로팅아일랜드도 있다. 그때는 어땠나? 기술적인 부분에 많이 집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술적으로는 재미난 요소가 많은 프로젝트다. 엄격히 말하면 선박이니까. 선박 위에 건물을 짓는 형태다.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다. 건축보다 물 위에 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말이다. 만드는 방식이 되게 재밌었다. 과학 잡지에 나올 것 같은 프로젝트였지. 하하.
아빠와 딸
직접 설계한 단독주택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했다고 들었다. 무슨 사연이었을까?
한 10년 전에 단독주택을 구입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때 마당 있는 집에서 개를 키우고 싶다고 말한 게 이유였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이사갔다. 나 어릴 때는 집은 후졌어도 마당은 있었다. 그래서 역시 애한테는 마당 있는 집이 필요하다며, 구입했다. 그리고 강아지 한 번 키웠고, 잔디 한 번 깎아봤다. 결국 잡초밭이 되더라. 잔디 관리는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잔디 있는 집에 사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그래서 포기했다. 텐트를 사서 펴봤는데, 한 번 펴보고 또 접었다. 우리나라에는 모기가 많아서, 그것도 못할 짓이더라. 거기에 다세대 주택을 지었다. 아래층은 전부 팔고, 제일 위층을 복층으로 지어 살았다. 법정 기준 면적보다 공간을 많이 만들었더니 집이 너무 컸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고. 나름 재미있게 지었는데, 몸에 안 맞더라고. 그렇게 살다가 ‘역시 우리에겐 아파트가 편해’ 이러면서 아파트로 들어왔다. 하하.
집에서 쉴 때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아이와 TV 보는 걸 좋아한다. 함께 노는 게 집에서 하는 일이다.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대학 입시에 적극적인 아빠일 것 같다.
아이가 고3 때는 거의 기사 노릇만 했다. 아내보다는 내가 아이 학업을 챙기는 편이다. 그래서 선생님도 만나러 다녔다. 초등학교 때부터 방문 수업을 참관했고, 학부모 회의에도 참석했다. 고등학교 때는 ‘뻘쭘’해서 못 갔고. 하하. 부부가 오는 경우는 있는데, 아빠 혼자 참석하는 경우는 별로 없더라고.
딸이 디자인과 건축 중 무슨 과를 가길 원하나?
가능하면 건축을 하라는 입장이다. 본인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데, 활동 폭이 가장 넓은 건 건축인 것 같다. 고민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고, 다룰 수 있는 스케일도 더 넓다. 디자인을 하면서 가장 큰 스케일부터 작은 것까지. 스펙트럼이 제일 넓은 분야는 건축 같다.
딸과 함께하는 취미도 있나?
딸도 SF 영화나 만화, 하이테크 건축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나의 그런 유전자를 지닌 것 같다. 여자애인데도 어려서부터 잔인한 걸 같이 봤다. 그래서 가끔 ‘그 잔인한 걸 어린 날 데리고 봤어?’ 이렇게 묻기도 한다.
여행도 함께 다니나?
최근 딸이 졸업할 때 유럽에 단둘이 다녀왔다. 아이가 디자인과 건축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곳 위주로 다녔다. 출장을 주로 유명한 도시로 다니는데, 그곳에서 건물을 찾아다니지는 않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안 가본 곳들을 가다 보니, 암스테르담과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게 됐다.
여행은 건축가에게 중요한 부분이다. 인상 깊은 여행지를 꼽는다면 어디일까?
최근에 본 가우디의 작품들을 꼽고 싶다. 가우디는 학생 때 말고는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 사실 참 기괴하고, 나와 과가 다르다고 느꼈다. 건축적으로 참조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실제 가보니 충격이더라. 가우디 건물은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뭐, 아직도 공사 중인 건물이긴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가우디 건축을 ‘모더니즘’이라고도 부르더라.
직접 보니까 무슨 뜻인지 느껴지더라. 옛날 스타일의 건물이 아니었다. 굉장히 아방가르드하고, 컨템퍼러리한 건물로 특정 짓더라. 그리고 이탈리아 언덕 위의 도시들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슬람을 피해 도망 다니던 중세 시대의 요새 도시들이었다. 또 그 도시의 빽빽한 밀도. 사실 유럽에 빽빽한 고딕 도시는 많지만, 그 콘텍스트는 마치 섬 같았다.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분위기라고 할까?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도시 공부를 한 입장에서 그런 유럽 도시들의 콘텍스트를 서울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서울 역시 밀도가 높다.
이슬람을 피해 도망가기 위해 건설한 도시라 성격이 다르다. 그런 밀도 높은 도시에 관심이 간다. 실제 리테일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그런 요소를 많이 차용한다.
오늘도 느낀 거지만, 우리나라는 교육과 주거를 떼려야 뗄 수 없다.
내가 애 때문에 집을 선택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현대판 맹모삼천지교를 했다. 아이가 처음 명동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이태원에 살았다. 터널만 지나면 명동이라 가까우니까. 그러다 학교가 반포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집을 반포로 옮겼다. 초등학교는 걸어서 다녀야 한다는 입장이거든. 방배동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그쪽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도 근처 아파트로 갔고. 아이의 학교를 따라 집을 옮긴 꼴이 됐다. 이제 아이가 대학이나 유학을 가면, 학교 근처에 안 살아도 될 테니 어디에서 살지가 고민이다.
하이테크는 나의 꿈
취미 생활 하나 정도는 즐길 것 같다.
노래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성당에서 합창단을 하고 있다. 최근에 중창단 비슷한 걸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하는데, 시간이 많이 든다. 최근에는 발표회 같은 것도 했다. 또 SF 영화를 좋아한다. 이건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취향이다.
SF 영화는 언제부터 즐겨 봤나?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최근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영화도 좋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영화도 좋아한다. DVD를 사서 보는데, SF 위주로만 모았다. 요즘 영화는 IPTV로 보는데, 그래도 실물이 있는 게 좋더라.
시간이 없어서 즐기지 못하는 취미도 있을 것 같다. 여유가 생기면 무엇을 해보고 싶나?
목공이나 용접을 배워보고 싶다. 특히 스틸을 좋아한다. 로봇을 좋아하는 이유도 스틸이기 때문이고, 목재도 스틸과 결합된 것이 좋다.
스틸 작업이라면 대부분 커팅, 벤딩, 용접, 샌딩 이런 거 아닌가?
맞다. 또 정크 아트 비슷한 것도 해보고 싶다. 칼을 소재로 고등어 같은 걸 만드는 작가들이 있다. 부서진 스탠드나 의자 같은 걸로 나도 만들어볼까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아직 시도는 못하고 있다. 은퇴해야 가능한 것 같다. 또 포클레인, 크레인 등 중장비 스틸 모형도 모으고 있다.
중장비의 어떤 점이 매력적인가?
기계의 느낌이 좋다. 특히 크레인은 파워가 매력적이다. 플랜트가 주는 건축적인 힘과 스틸이 주는 산업적인 힘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만약 국내에 기반이 있었다면 하이테크 건축을 시도했을 거다.
앞으로는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정교한 수준으로 건축할 순 없다. 우리는 미국 방식으로 건물을 만든다. 기성품, 스탠더드 부품을 활용하는 식이다. 하지만 하이테크 건축은 수공예적인 건축이다. 하이테크 건축은 부품을 하나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건축 시스템과는 맞지 않다.
합창은 무슨 재미인가?
사람들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졌을 때 쾌감이 있다.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는 것. 합창은 자기 소리를 전부 내는 게 아니라 절제해야 한다. 조화가 중요하니까.
합창 이야기를 하니까 표정이 밝아진다. 하하.
즐거운 순간이니까. 록 밴드보다야 화려하지 않지만 하는 입장에서는 재미있다. 최근 늙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노안이 오고, 기력이 떨어지고, 운동을 해도 별 효과가 없다. 근육 만드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한 시기다. 나이 든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니까, 외로움이 엄습하더라. 이 외로움을 어떻게 다룰지 많이 생각한다.
두 번의 부동산 투자
건축가는 부동산 정보를 많이 접하다 보니, 투자를 잘하는 경우도 있고, 매번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실패하는 축이다. 나름 트렌드를 읽는다고는 하지만…. 좋은 건물이 가치 있다고 믿는데, 좋은 건물이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더라.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느냐, 떨어지느냐는 결국 임대 수익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점인데, 나는 그런 면에서 실패했다. 나는 건축의 힘을 믿었는데, 아직 입지의 힘이 더 세더라. 그리고 시장이 가격을 결정한다.
예를 들자면 서래마을에 지은 다세대 주택일까?
맞다. 또 서래마을에 아파트를 하나 분양받았는데 가격이 확 떨어졌다. 아직도 갖고 있는데, 분양 당시의 80%로 시세가 떨어졌다. 깡통 주택 비슷한 게 또 하나 있고.
주택은 손해 안 봤나?
봤지. 내가 지은 건물이다. 진짜 잘 지었다. 그 동네는 평당 5백만~6백만원으로 집을 짓는데, 신경 써서 작업하면 원가가 올라간다. 눈에 안 보이는 공정이 들어가니까. 그래서 평당 6백만원에 지을 건물을 8백만원에 짓게 되었다. 집은 좋아서 동네 시세보다 비싸다. 결국에는 시장가를 따르게 된다. 아직 건축이 시장가를 못 이긴다.
건축가는 값이 오를 만한 곳을 앞서 보는데, 사지는 못한다. 사더라도 돈을 못 번다.
입지를 봐야 한다. 입지와 가격을 함께 봐야 하는데, 건축하는 사람은 그걸 못한다. 건축의 질이 좋으면 사람들이 더 높은 가치로 구입할 거라 생각한다. 또 그런 방향으로 설계한다. 아파트도 비슷하다. 실제 굉장히 잘 지은 아파트인데, 시장 가치가 받쳐주질 못하더라.
그럼 두 번 투자해서 전부 실패했다고 해야겠네?
투자는 실패했다고 본다. 집의 퀄리티는 만족한다. 가치는 높은데, 숫자로 말하자면 실패지. 설계하는 사람이 사업하면 안 된다는 인식을 사내에서 금과옥조처럼 생각한다. 건축가가 개발하는 경우가 있다. 팔려고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고.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못 봤다. 하하.
장순각 교수의 건축가 재정립
인생은 끝없는 공사의 시작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성을 지으며 살아가고, 공사를 한창 진행하고 나서야 깨닫곤 한다. 더 나은 건축 방식이 있었다는 것을. 건축가 장순각이 유별난 성을 짓고 있는 건축가들을 만나 그들의 건축 인생을 구성하는 재료와 방법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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