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나 몽정을 겪는 것처럼 누구나 청소년 시절 한 번쯤 누구누구의 ‘빠’가 된다. 고백하자면 나는 듀스의 빠였다. 지금은 노래방에서 브로콜리 너마저의 ‘유자차’를 청초하게(?) 부르지만, 그때는 듀스의 랩을 격정적으로 따라 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스키니 팬츠보다 3.5배가량 폭넓은 청바지에 나이키 에어포스 원을 신고, 바둑판 무늬 디키즈 셔츠, 캉골 벙거지 모자를 썼다. 이건 나만의 룩이 아니라, 00중학교 2학년 7반 모두의 룩이었다. 1990년대 초반, 한국 청소년 대부분은 힙합(패션)에 빠져 있었다.
영화 <8마일>에서 에미넴은 힙합을 시작하던 초창기 시절을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힙합 패션의 시작도 시궁창 같았다. 돈이 없어 재활용센터에서 구한 사이즈도 제멋대로인 옷. 또 팬티가 보일 정도로 내려 입는 바지(이는 죄수복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흑인들은 가난의 연쇄 작용인 범죄로 인해 교도소를 자주 들락거렸다. 죄수복은 허리띠를 사용할 수 없어 항상 팬티가 보일 정도로 내려갔다). 거기에 금 목걸이 몇 개 걸친 게 바로 힙합 가수들의 무대의상이 되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그들의 힙합 패션이 꽂혔다. 당시, 우리가 익숙한 건 힙합 음악이 아니라 힙합 패션이었다. 분명 발라드를 좋아하는 이도, 록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을 텐데 중학교 수학여행 사진에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힙합 팬츠에 빅 사이즈 폴로 셔츠를 입은 힙합맨들이 무성했다. 당시 힙합의 ‘흥’과 함께 가장 ‘성’한 브랜드는 아디다스(80년대 RUN D.M.C가 부른 ‘My Addidas’는 많은 청소년들을 맥도날드에서 일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아이다스 슈퍼스타를 사기 위해 일했다), 나이키(힙합퍼들은 길거리 농구를 즐겼고, 당연 농구화에 관심이 많았다. 검은색 수트에 에어포스 원을 신은 디디는 갱스터 힙합 룩의 표본이었다), 르꼬끄 스포르티브 등이었다. 아예 힙합만 전문으로 하는 브랜드들도 1990년대에는 인기 폭발이었다. 칼카니나, 후부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으니. 여기에 또 힙합 하면 빠질 수 없는 장신구들. 힙합의 성공을 상징하는 순금을 거쳐 순백금, 다이아몬드까지. 캐시 머니 레코드 간부이자 래퍼인 브라이언 베이비 윌리엄스가 백금 한 주먹으로 모든 치아를 장식한 사실을 볼 때 힙합만큼 보석 시장에 기여한 음악 장르는 없을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재활용센터에서 시작된 힙합 패션은 드디어 구찌나 루이 비통, 샤넬 같은 럭셔리 패션 하우스까지 점령한다. 그들은 명품 로고로 온몸을 도배하고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구찌의 힙색이 힙합 가수들의 필수 아이템이 되었던 적이 있다. 통 크고(사이즈 말이다) 저렴한 힙합 패션 시대는 끝나고 이제 새로운 힙합 패션의 세계가 펼쳐진다. 디디, 제이지, B.I.G, 페이스 에반스 등등 몇몇 유명 힙합퍼들이 돈방석에 앉게 되자, 지나온 세월을 보상하듯 돈을 쓰기 시작한다. 2003년 은퇴를 선언하며 마지막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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