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크에 갔다. 종로3가 서울극장의 한쪽. 정재영이 들어왔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초대로, 그는 친구로서 참여했다. 오후 3시에는 다르덴 형제의 <아들>을 상영할 예정이다. 그가 추천한 영화 세 편 중 한 편이다. 그는 <아들>로 관객과도 몇 시간 후 만날 거다. 보통 배우를 만나면 그의 출연작에 대해 얘기한다. 보통 출연작 개봉할 때 만나니까. 이번에는 달랐다. 그가 출연하지도 않은 다르덴 형제의 <아들>에 대해 물었다. 낯설었다. 아마 정재영도 낯설었을 게다. 중간중간 옥타브 높은 정재영 특유의 웃음이 라운지를 채웠다. <아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20년 연기 인생으로 이어졌다. 연기란 무엇인가. 정재영은 <아들> 속 한 장면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재영이 하고자 하는 연기도.
낯선 곳에서 인터뷰한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예전부터 알았나?
1회 영화제 때 박찬욱 감독님이 초청하셔서 한 번 왔다. 그땐 서울극장이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 초청해주셔서 기꺼이.
고전 영화는 좀 찾아보나? 이제는 고전 영화라 해도 아주 옛날 영화만 뜻하진 않지만.
사실 많이는 못 본다. 예전에는 감독님들이 DVD를 주시면 보는 정도였다. 요즘에는 케이블 TV에서 해주는 것들을 좀 봤다. 내가 어릴 때 본 것도 벌써 한 30년 지나서 고전이 됐다, 하하.
30여 년 전에 본 영화들 중 지금도 기억하는 영화는 뭔가?
중학교 때 단체 관람했던 영화 한 편을 기억한다. 한 30년 전이겠다. 그때 개봉한 영화니까. 앤서니 퀸 나오는… 좀 찾아보겠다. (휴대폰으로 검색한 후) 하하하, 있다. <사막의 라이온>이라는 영화다. 제목은 약간 유치한데, 단체 관람으로 봤다. 이게 실화다. 앤서니 퀸이 게릴라 전투의 왕인 레지스탕스 대장으로 나왔다. 나중엔 전차 상대로 싸우는데, 사막에서 전차가 오니까 겁먹지 않으려고 다리를 땅에 묶는다, 부대원들이. 전차가 밟고 지나가고 그러는데, 어린 나이에 너무 충격받았다. 아직까지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릴 때 극장에서 본 장면들은 단편이지만 확실히 기억에 남는 거 같다. 어릴 때
쇼킹한 장면이었다. 그때는 영화 보려면 시내까지 나와야 하니까 더 인상적이었다. 극장에 가는 거 자체가 나들이였으니까. 고등학교 때는 <영웅본색> 시리즈들이 되게 유행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유치하더라, 하하. 그때는 너무 재밌었는데.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다르덴
추천한 세 편 중 한 편이다. <방황하는 칼날> 준비할 때 봤다. 이정호 감독님이 여러 편 추천해주셨는데, 그중 한 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르덴 형제 영화는 한 편도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뭐 이렇게 지루해, 했는데 나중에는 몰입도가. 거의 핸드헬드로 찍어서 독특했다. 처음에는 즉흥극 같았는데 알고 보니 굉장히 오래 연습해서 찍었다고 하더라. 감독님이 <아들>처럼 <방황하는 칼날>에서 아버지의 복잡한 마음 같은 걸 보여달라는 뜻이었겠지.
<방황하는 칼날>의 이상현도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는 평범한 남자였으니까.
<아들> 속 아버지도 되게 평범하니까. 하여튼 마지막까지 되게 긴장하게 되더라. 처음에는 뭐지? 하다가 나중에는 과연 이 양반이 복수할까? 용서할까? 하면서 봤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데 계속 긴장하면서 점점 빠져들게 되더라. 차 타고 가다가 나중에는 말하잖나. 내가 그 아이 아빠다, 하니까 죽인 애가 너무너무 놀라서 도망가고, 쫓아가고. 내가 원래 영화 보면 잘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확 인상이 남지 않으면 잘 잊는다. 그런데 <아들>은 지금 줄거리까지 기억한다. 마지막에 아빠가 혼자 있을 때 그 아이가 옆에 와서 딱 같이 드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무 좋더라. 이렇게 풀어낼 수 있구나, 하고 감명받았다.
영화는 이래야지, 하는 선입견이 깨지는 느낌이긴 했다. 그냥 바라보는 시선만으로 어마어마한 긴장감을 뽑아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자기 정서에 도움되는 책이 있고, 판타지 소설 같은 책이나 만화 같은 책도 있다. 영화도 그런 거 같다. 보통 영화 볼 때 뭔가 해소하고 싶어 한다. 극장에까지 고민을 안은 채 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놀러 가듯이 가는데 괜히 인생에 대해서 고민을 안고 오면 싫어하니까. 그렇다고 그런 영화가 좋지 않다고 할 수도 없다. 만약에 <아들> 같은 영화만 있다면, 그것도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받을 거다. 그래도 영화 많이 보신 분들은 오락 영화만 볼 수는 없으니까. 그럴 땐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는 고전 영화가 시야를 넓혀줄 수 있겠다.
이번에 <아들>로 GV(관객과의 만남)도 한다. 보통 자기가 출연한 영화 GV에는 참석해도 남의 영화 GV에 참석하는 경우는 없지 않나?
할 말 없는데, 하하하. 나도 관객과 똑같은 마음으로 봐서 영화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다. 그냥 멀뚱히 앉아 있어야 하나?
<아들>에서 아버지 맡은 배우가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배우로서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 씁쓸한가?
같은 배우로서, 씁쓸한 느낌은 안 든다. 사실 그 양반이 상 받은지도 모르고 그냥 봤다. 아무 정보 없이 봤는데, 진짜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와, 이게 연기인가? 하며 의심 드는. 유명한 배우가 아니니까, 일반인인가? 진짜 아버지인가? 이런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열연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모든 걸 다 버리고, 다른 것 하나도 필요 없이 진짜처럼 느꼈다. 진짜처럼 하는 게 가장 좋은 연기다. <아들> 같은 영화의 연기들은 대부분 그렇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짜 같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결국 연기라는 거 자체가 그만큼 내려놓고 할 줄 아느냐 하는 문제다. 변신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진짜 그 사람, 일반인같이 하느냐다. <아들> 보면 다큐멘터리 같잖나. 그러니까 몰입하는 거다. 그걸 보면 깨닫고.
1996년 연극 <허탕>으로 데뷔했다.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연기 대하는 마음 자세가 어떻게 달라졌나?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을 느끼잖나. 연기가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간이 축적되면서 살면서 느꼈던 것들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분명히 다르게 표현됐을 거다. 뭐가 어떻게 다른지는 확실히 모른다. 그냥 <아들> 같은 영화를 보면서 혹은 다른 영화를 보면서, 좋은 영화를 보면서, 나쁜 영화를 보면서 영화와 연기에 대한 생각이 종합적으로 쌓이거나 느끼는 거다. 물론 느낀다고 해서 그게 연기로 발현되는 건 아니다. 사실 모르는 거다. 그냥 항상 그러려고 노력하는 거다.
기술적인 면 혹은 매체 특성에 따라 연기가 달라지진 않나? 그런 점은 시간이 쌓일수록 익숙해지잖나.
시간이 쌓이면 오히려 그런 부분을 더 생각하지 않게 된다. 예전 한 중간쯤 그렇게 생각한 거 같다. 예전에는 연기란 이런 것이라고 더 얘기하고 자꾸 이론화하려고 했다면, 이제는 점점 더 그런 걸 하지 않는다. 노하우가 오히려 없는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게 없다는 걸 반대로 깨닫는다. 기술이라면 진짜같이 해야 하는 거랄까. <아들>에서 그 배우는 몇 개월 동안 리허설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진짜처럼 만들어가는 거다. 사실 처음에는, 어떻게 보면 어색할 거 아닌가. 이렇게 움직이면 카메라가 저렇게 움직이니까. 얼마나 인위적인가. 그런데 계속 리허설하면서 정말로 연기 같지 않게끔 자연스럽게 만들어가는 거다. 카메라 움직임까지 자연스럽게. 짠 걸 관객이 눈치 채지 않게 하는 게 기술이라면 기술이다.
연기하다 도를 깨우치듯이 연기에 대한 답은 얻을 수 없다는 얘기인가.
그런 건 없다. 계속 생각하는 거다. 과연 좋은 연기는 뭔지, 잘하는 연기는 뭔지 생각한다. 남이 보는 거 말고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답은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인터뷰하면서도 생각해보는 거다. 평생 공식을 찾지만, 결국 공식이 없으니까.
20년 동안 꾸준히 작품을 해온 건 스스로 자부심 느끼겠다.
자부심은 무슨. 이거 말고 할 게 없는데, 하하하.
그렇게라도 했으니 다행이지, 이런 건가?
맞다, 하하. 많이 하는 게 아니니 매번 하고 싶다. 영화를 1년 내내 찍진 않으니까. 물론 <신기전> 같은 경우는 9개월도 찍었지만, 보통 3~4개월 걸린다. 홍상수 감독님 영화는 열흘이면 찍고. 그 기간 빼면 나머지는, 사실 거의 논다. 1년의 반은 논다, 하하. 그러면 또 하고 싶다.
홍상수 감독 영화에 출연한 배우마다 말한다. 독특한 연기 경험이 매력적이라고. 그런 매력이 확실히 있나?
일단 상업 영화는 많은 걸 신경 써야 하잖나. 쉽게 말해서 걱정도 하고, 들어가는 돈도 많고, 이것저것 많이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서는 배우가 그냥 딱,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진짜처럼 하려고만 생각하면 된다. 외적인 부담이 없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머리 깎을 필요도 없고, 옷도 그냥 자기가 입던 옷 입고 나가도 된다. 상대편과 나누는 대사나 연기만 신경 쓰면 되니까 트레이닝 같은 거다. 자꾸 본질을 까먹고 다른 쪽에 신경 쓰다가 홍상수 감독님 영화를 하다 보면 쓸데없는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본질만 딱 남는다. 그래서 재밌다. 그렇다고 해서 쉽지는 않다. 쉽게 하는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다 내놓고 해야 하니까. 이런 걸 즐기는 배우들이나 할 수 있다.
20주년이니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겠다.
20주년이라고 해서 돌아보고, 아직 19년이라서 안 돌아보고 그러진 않는다. 매년 생각한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 한 지 몇 년 됐구나.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 오래 살았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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