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이지영 Illustration 이우식
"눈이 높으시군요.” 결혼 적정기의 솔로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듣는 말. 모종의 비난이다. 대부분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적어도 나는 다르다. 그래, 인정한다. 사실 난 눈이 높다. 제아무리 낭창낭창한 샤이니를 데리고 와봐라, 눈 한번 깜짝하나. 부리부리한 눈매에 날카로운 턱선을 자랑하는 장동건형 미남도 ‘노 생큐’다. 한 입 베어 물면 금세 질릴 것 같은, 강박적인 데커레이션을 과시하는 케이크 한 조각에 불과하다. 사내라면 자고로 끌어안기에는 살짝 버거울 정도의 머리 둘레에 흐르는 세월을 이길 수 없어 적절히 나온 배, 살짝 처진 볼, 인생을 조소하는 듯한 쓴웃음 정도는 구비하고 있어야지!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만, 나는 소위 말하는 ‘아저씨’ 취향이다. 사람들은 내게 이상형을 캐묻다 입을 쩌억 벌린다. 오랜 세월 굳건한 내 이상형의 계보도는 송강호-설경구-김윤석-바트을지(몽골의 국민 배우다. 궁금하면 한번 찾아보라)다. 이런 내게 “차라리 조인성, 강동원이라고 말해!”라고 읍소하는 것은,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를 씹고 싶은 사람에게 스테이크버거를 먹으라는 소리와 뭐가 다른가.
사랑은 연민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나는, 자신이 믿어온 것들에 배반당한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 끌린다. 엄밀히 말해 삶이라는 쓰나미가 할퀴고 간 그 흔적과 상실감에 끌리는 거다. 나는 불완전하고, 균열되어가는 것들이 안쓰럽고 탐스럽다. 그래서 자꾸만 보듬고 싶어진다. 싱싱한 육체 하나를 믿고 까부는 젊은 남자들의 근원을 알 수 없는 자만보다는, 화석화된 자아 이면에 봉인한 아저씨들의 결핍과 허무가 사랑스럽다. 위축된 그들의 자아와 마주하는 순간, 미추의 기준과 나이 차이는 단박에 뛰어넘을 것 같은 합일의 경지를 느끼게 된다. 세월 속에 차곡차곡 쌓인 ‘찌질한’ 사연들을 술안주 차원으로 털어내는 호방함도 좋다. ‘트라우마 놀이’로 대변되는 새파란 청춘들의 허세와는 격이 다르니까. 사사로운 질투나 밀고 당기기 따위엔 점잖은 ‘체’해줄 것 같고, 어지간해서는 무슨 짓이든 용서해줄 것 같은 점도 매력 포인트다. 혹시, 이거 환상인가?
김현민(영화 월간지
처음 대면한 사람들이 낯선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나에게 흔히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떤 연예인 만나봤어요?”다. 곧이어 “누가 제일 좋았어요?”로 이어지는 정해진 패턴. 상대방이 소개팅남이라면 이 질문 때문에 그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로 분류된다. 어쨌든 대답은 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잘생긴 남자 연예인들이 스쳐 지나간다. 내 눈에 소프트 필터를 끼운 것처럼 오라를 뿌려댔던 강동원도 떠올랐고, 털털하게 웃음 지었던 현빈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고심 끝 나의 대답은 “김승우 씨랑 김태우 씨?” 상대방은 ‘헉’한 표정을 짓는다. 젊고 잘생기고 거기다 대화까지 잘 통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20대 꽃미남들은 ‘인생, 그거 뭐 별것 있어?’ 하며 편안하게 속내를 드러낼 줄 아는 대화 기술이 없다는 말씀. 야심만만하게(때로는 허풍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아등바등 고민하는 어린 녀석들과 달리 ‘인생의 여유’를 능청스럽게 말할 줄 아는 건 ‘시간’이 주는 힘임에 틀림없고, 그것이 ‘젊음’ 이상의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연예인만 그런 건 아니다. 일반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3545 남자란, 바지를 똥배 위(혹은 아래)로 끌어올려(혹은 내려) 입고 흰색 양말을 구두 속에 신고 있는 양반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자를 앞에 앉혀두고 자신이 얼마나 잘난 삶을 살아왔는지 하루 종일 주절주절 떠들고 계신 그 재수 없는 분들도 삭제해주시길 바란다(이분들은 나이가 들수록 주절병이 심해질 확률이 높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가 매력적으로 느끼고 있는 3545세대의 특성에는 인생의 여유 이외에 책임감 혹은 마초성도 있다. 요즘 젊은 청년들은 너무 식물적이다. 잘 꾸미고, 취향도 좋고, 다리도 길고 다 좋은데, 여자를 넓게 품어줄 가슴이 없다. ‘쿨’한 줄 알고 ‘매너’까지 물 말아드신 어린 분들보다는 여자를 리드할 줄 알고, 징징대는 것도 들어줄 줄 알고, 남녀 관계의 ‘의리’가 뭔지 한 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성숙한 남자가 더 좋은 건 당연지사 아니겠나.
손혜영(<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싱싱한 육체만 믿고 까부는 젊은 남자들의 자만보다는, 화석화된 자아 이면에 봉인한 아저씨들의 결핍과 허무가 사랑스럽다. 위축된 그들의 자아와 마주하는 순간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합일의 경지를 느낀다. |
어쩌면 할머니와 나는 남자 취향이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구시대적인 데다가 약간 마초 편애 성향이 있다. 할머니 말씀은 이렇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자고로 몸을 써야 한다.” 최소한 전구라도 갈아 끼우고 부서진 밥통이라도 고쳐야 한다는 얘기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만큼이나 당연한 소리다. 남자들은 자신의 몸뚱아리를 부단히 연마해야 할 터. 가능하다면 인류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쓰면 더 좋겠다.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몸 만드는 남자완 구별되어야 하니까.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남자는 친구의 얘기 속에서도 싫다. ‘내일 모레 연락할까 글피에 연락할까’로 초롱불을 지새우는 남자 따윈 어디 인사시킬 수도 없다. 전화 안 하고 문자만 자꾸 보내는 남자는 순위의 맨 끝에 자리하고 있다. 사나이라면 전화를 해야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뭔가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보면 언제나 두 다리에서 힘이 풀린다. 비록 가까이 갔을 때 땀 냄새가 진동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땀을 훔쳐줄 수 있다. 이해하기 쉽게 영화 속 예를 들자면, 제임스 본드, 그중 특히 선배 본드보다 유난히 몸을 더 많이 쓰는 다니엘 크레이그, 지하철 타랴 여자 구하랴 전 세계 지도 중 발자국 안 찍은 데 없이 한시가 바쁜 제이슨 본, 실제로 무역선의 하급 선원, 오일 정비공, 트럭 운전사 등 몸 쓰는 일이라면 안 한 게 없는 액션 히어로 스티브 맥퀸 등이 나의 이상형이다. 그들은 어찌나 바쁜지 공과금은 언제 내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절대 죽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인지) 총구가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데도 겁 한번 먹지 않는다. 스케일도 크다. 추격하는 놈들을 따돌린 후에 호텔 방에서 한숨 돌리며 ‘다이어리’ 같은 걸 끼적거린다거나 도망가야 할 때를 대비해서 샴푸와 린스 따위를 챙길 것 같진 않으니까 말이다. 맹점이 있긴 하다. 바빠 죽는 남자에게 칭얼거리며 “음, 스티브, 키스는 언제 해줄 거죠?”라는 영화 같은 대사가 현실 속에선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만은 않는다는 것.
나지언(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인이 되는 것에 살짝 두려움이 있었다. 그걸 눈치 챈 한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다. “왜 그런 걸 걱정해? 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까봐 걱정할 게 아니라, 사회에 물들까봐 걱정해야 하는 거야.” 그 말이 그때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사회인이 된 지 8년이 넘은 지금은 뼈저리게 공감하고 있다. 야금야금 나는 물들어가고 있다. 물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 해도, 사회가 그런 나마저 받아줄 만큼 난 잘나지 못했다. 내가 주성치를 좋아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1990년 <도성>을 통해 처음 주성치를 봤다. 세상에 무슨 저런 배우가 있나 싶었다. 멀쩡하게, 아니 잘생긴 얼굴로(자세히 보시라. 그는 정말 잘생겼다), 본인은 정작 웃지도 않고 나를 때굴때굴 구르게 만드는 저 남자는 누구인가. 영화가 나올 때마다 찾아봤다. 그는 똑같이 그 특이한 코미디로 나를 웃겨주었다. 남들은 아무도 할 수 없는, 그만 할 수 있는 그 코미디. 내가 나이를 들어보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겠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알아야 하고, 재능도 있어야 하고, 세월이 지나서도 원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눈길과 입김쯤은 아랑곳하지 않아야 하고, 이 모든 것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주성치는 영화 주연을 맡은 후 곧 이름도 알려가고, 유명해졌다. 그런데 그는 변하지 않았다. 남이 어떻게 보건 말건, 뭐라 하건 말건, 주성치는 변하지 않았다. 신인 시절 자신이 보여주었던 코미디를 흰머리가 많아지고, 주름살이 보이는 나이가 되어서도 똑같이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주성치 팬이라는 건, 이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난 그를 평소에 ‘형님’이라고 부른다. 난 형님이 좋다. 형님의 재능이 좋다. 형님을 오랫동안 알아온 나의 시간이 뿌듯하다. 그래서 그의 흰머리까지 사랑한다.
박은경(<무비위크> 기자)
무조건 나이 든 남자를 예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애초에 어린 것들과는 말도 섞기 싫어할 정도로 연하남의 ‘치기’에 비위 상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나이 든 남자가 100% 끌리는 건 아니다. 이유는 분명하다. 나이 든 남자는 몸이 잘 아프다. 조금만 운전해도 허리가 아파서 골골대며, 때론 시름시름 앓는다. 안 그런 척, 괜찮은 척해도 티가 팍 난다. 그럴 땐 이 남자와 더 이상 청춘을 나눌 수 없다는 걱정까지 든다. 함께 늙어갈 일만 남았다는 건, 정말 뜨악할 수밖에 없는 걱정이자, 현실인 것이다. 하나 더 있다. 나이 든 남자는 의외로 잘 토라진다. 그리고 이건 젊은이들의 욱하는 성질과는 다르다. 그들은 오랜 시간 ‘노여워’한다. (노인네들의 노여움 섞인 똥고집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니 3545세대를 온전히 예찬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 주위에 나이를 잘 먹은 남자가 하나 있다. 그의 애칭을 명품이라 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를 더해가니까!) 명품 선배는 올해 나이 서른여덟, 곧 마흔을 바라본다. 그의 직업은 한때 신문기자. 물론, 지금은 손 털고 나왔다. 그가 10년간 일하던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던 날이 기억난다. “처음부터 기자라는 직업이 대단하다고 생각해본 적 한 번도 없었어. 기자가, 대단한가?” 거대한 직함을 벗어던질 때, 난 이 정도 쿨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느는 건 명예에 대한 욕심이요, 집착일 텐데 역시나 명품 선배는 담백했다. “한 번쯤 고수하고 있는 원칙을 버려봐. 그러면 인생이 다르게 보일 거야.” 우여곡절 겪어보지 않은 이가 이런 말을 한다면, 짜증이 확 솟구칠 테지만 명품 선배가 이런 말을 해줬을 때, 나는 그 말을 뼈에 새겼다. 살 만큼 살아본 이의 충고는 어딘지 담배 연기처럼 멋있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명품 선배는 건재하다. 어쩌면 머지않아 노인네 냄새가 팍팍 코를 찌르는 늙은이가 된다 할지라도 아직은 훌륭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내 루이 비통 가방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빛나게 될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손때 묻은 가죽 가방을 참 좋아한다. 그것은 쉽게 끊기지도, 금세 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린다.
이지영(<아레나> 피처 에디터)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