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에서 승리의 수는 ‘선빵’에 있다. 미안하다. 선빵이라는 국적 불명의 단어를 인용해서. 모 프로그램의 아나운서가 옆에 있다면 새침 떨며 이렇게 말했겠지. “공부하세요! 선빵은 먼저 선先, 놓을 방放의 합성어로 선방의 센 발음입니다. 실제 한자에는 이런 단어가 없으니 ‘먼저 치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표현입니다.” 하지만 선빵을 선빵이라 부르지 못하고 마쎄이를 마쎄이라 부르지 못한다면 목울대를 타고 넘는 그 톡 쏘는 희열은 완전 포기다. 그럼에도 잡지라는 매체의 특성상 이후부터는 김빠진 맥주처럼 지린 연음(선방)을 사용하겠으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었으면 한다.
<초한지>를 읽다 보면 선즉제인(先則制人)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나온다. 먼저 치면 선수를 제압할 수 있다는 뜻. 이 한자성어의 유래엔 진나라 시대의 은통, 항량, 항우 같은 장수들의 복잡한 머리싸움이 얽혀 있지만 여기서의 교훈은 단 하나다. 선방(아쉽다. 선빵이어야 감이 살 텐데…)이 중요하다는 거다. 모든 선방에는 지략이 필수다. 도움을 청하러 온 은통을 꾀어 그 목을 내리쳤던 항량처럼 머리를 굴려야 한다. 잔머리를 굴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사와 분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거다.
모든 잡지는 선방을 꿈꾼다. 과거 특종이라는 타이틀로 종횡무진 독자의 가슴을 헤집고 다니던 놈이 실시간 검색이라는 첨단 기능 인터넷의 등장으로 꼬리를 감추면서 그것을 대신 할 선자옥질 같은 기획물을 꿈꾼다는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고?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기획물의 기기묘묘한 힘이다. 인물과 인물, 사건과 사건, 물건과 물건을 한 주제로 묶어 에디터의 시선으로 재가공하는 것은 독자들에게는 응원을, 경쟁지들에는 반격을 끌어내는 잡지만의 선방이다.
지난달 <아레나>의 수많은 선방 중 하나는 방송 3사 여자 아나운서들과의 화보 촬영이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거다. 잠시 동안 네이버 검색 1위를 차지했던 그 칼럼. 사실상 최초의 아나운서 릴레이 드레스업! 화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경천동지할 일이 하나도 없어서 선방이라 대놓고 말하기도 좀 뭐한 그런 칼럼이긴 했다. 그.런.데! 역시 선방은 선방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온오프 라인의 매체들은 이 기사를 퍼 나르기 시작했으며 나의 휴대폰은 숨이 꼴깍 넘어갈 지경이었으니까. 나의 휴대폰 번호가 네이버 검색 창에 떠 있기라도 한 걸까? 사방에서 이름도 모를 기자들의 문의가 쇄도했다. 질의는 많았으나 나의 대답은 단 하나. “잡지 먼저 보시고 기사화하십시오.” 하지만 내가 알기에 그 수많은 매체 중 <아레나> 9월호에 나온 기사를 제대로 본 기자는 딱 두 명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아나운서의 화보 촬영을 두고 방송사에서 밝힌(이 역시 공식적으로 밝혔는지 알 수 없다) 보수적 입장은 모순을 넘어 모함에 가까웠다. 의상과 콘셉트를 함께 논의한, 한 인물 당 세 시간 이상 걸린 심사숙고 끝의 촬영 결과물을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징계 운운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책을 본 많은 이들은 ‘이게, 뭐?’ 하는 반응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레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동영상이 아닌 지면으로 남기는 데 최고의 공력을 쏟아 부었다. 옷, 포토그래퍼, 헤어·메이크업 스태프까지 최고의 조합을 이루느라 한 달이라는 기간을 투자했다는 말이다. 애독자들은 알겠지만 지면에 소개된 아나운서들은 브라운관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평소 모습 중 일부였다. 12쪽에 달하는 화보 중 단 세 컷(컷이 아니라 옷이겠지만)만을 보고 ‘품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것이 그리 문제가 된다면 방송사에선 그녀들에게 항상 턱 밑 2cm를 하한선으로 정한 터틀넥 스웨터를 입도록 강력 규제하도록 하며, 오락 프로그램이 아닌 교양·보도 프로그램에만 출연시켜야 할 것이다. 방송사 안의 외로운 섬으로 남을 것인가, 방송사를 아우르는 거대한 숲이 될 것인가에 대한 입장 정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품위는 고립이 아닌 아우름에서 비롯되며 실력이라는 무기는 춘추전국시대를 평정하는 데 더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는가.
어쨌든 더위 막바지 삼일 간 벌어진 해프닝은 ‘잡지사 편집장의 사과로 일단락’이라는 기사와 ‘잡지사 입장은 당당’이라는 상반된 두 개의 기사를 끝으로 어쨌거나 그 꼬리를 감췄다. 물론 나야 사과할 수준의 화보라 생각한 적도, 일부 인터넷 기사에서 묘사한 대로 아나운서들이 품위에 어긋난 일을 한 것이라거나 그 무엇도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헐떡대는 업데이트 추격전을 흥미롭게 지켜볼 뿐이었지만 말이다.
된장은 오래 묵힐수록 맛이 더한다는 어머니 말씀은 그른 것 하나 없다. 잡지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숙성 기간을 거친다. 사소한 선방으로 벌어진 여자 아나운서 화보 촬영 논란을 지켜보면서 나는 또 한 번 잡지가 가진 선방의 파워로 말미암아 자긍심이 충만해진다. 왜 아니겠는가? 곧이어 발행될 수많은 잡지의 10월호에는 특종 아닌 기획의 선방이 줄지어 깊은 맛을 낼 것이다. <아레나> 10월호도 마찬가지다. 12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태릉에서 훈련 중인 메달 후보들의 땀내 물씬 나는 화보(214쪽), 고우영을 비롯해 지금은 우리 곁에서 떠나고 없는 선인들의 작품을 반추해보며 그들에게 드리는 헌정사(196쪽), 내년 봄·여름 트렌드를 집대성한 컬렉션 특집(별책 부록) 등 그 어느 매체에서도 앞서 다루지 않았던 기획물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방 날릴 태세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기사들은 포털 사이트와 네티즌을 자극할 만한 선방은 아니다. 말초신경보다는 근심성신경(近心性神經)을 울리는 것들이므로. 하지만 독자들은 근심성신경을 자극하는 이 ‘선빵’에 더 큰 응원을 보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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