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터틀넥 원피스는 제이어퍼스트로피, 검은색 신발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10대 때는 큰 좌절을 겪지 않았던 거지?
어릴 때는 순탄했다. 세상에 무서운 게 없었다. 마음먹으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일을 시작한 후로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며,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은데, 모래처럼 흩어지는 게 배우 같았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단역과 조연을 전전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오디션을 봤다. 최종까지 되었는데, 막판에 엎어지고, 이런저런 이유로 안 된 적이 많았다. 솔직히 머리가 나쁜 것 같다. 기억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공부는 잘하지 않았나?
단순 암기랑은 다르지. 잘 까먹는다. 대본이나 사람, 상황에 대해 잘 잊는다. 지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지울 수 있는 것 같다. 하하.
잊으려 하면 더 기억나는 것도 있다. 트라우마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기억을 지워야지 내가 안 아프다. 계속 생각하면 뭐하나? 그것도 일종의 자기 파괴다. 누구나 상처는 받고, 자기 상처가 무기인 양 비장하게 구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남한테도 내 상처나 힘든 얘길 잘 안 한다. 듣는 사람이 힘드니까. 남의 기분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내 힘든 부분은 내색 안 한다.
그래도 살다 보면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또 그런 일이 생기고.
기대고 싶을 때가 많지 않았다. 남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 얘길 듣고 상대가 슬픈 표정 지으면 위로를 받는 게 아니라, 나도 힘 빠진다. 나 때문에 웃는 얼굴을 보고 힘을 얻는다. 그래서 친구가 많은 편이다.
친구들은 가끔 힘든 일을 얘기하는데, 그들이 안 힘들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
내 사람들을 보호해주고 싶은 건가?
맞다. 그런 성향을 타고난 것 같다. 친구들이나 내 사람들, 누가 괴롭히면 보호해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내가 힘이 더 세져야 한다고 믿는다.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사랑할 줄도 아는 것 같다. 사랑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다 보면, 스스로 한계를 느낄 때가 있을 것 같다.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가 있어서 기쁘다는 표현을 하면 그게 내가 숨 쉬는 이유가 된다. 나를 오해하면 속상하다. 그렇게 떠나간 친구들도 다시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이 없으니까. 나 같은 친구가 곁에 있으면 참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난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보살핌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한다. 그게 사는 이유다.
그럼 연기를 하는 이유도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인가?
연기는 재미있다. 그리고 연기는 합창처럼 공동 작업이다. 배우 몇 명으로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모든 스태프들과 협업해 나온 결과물이 영화다. 촬영 초반에는 서로 서먹하지만 끝날 때는 정 들어서 헤어지는 게 가슴 아프다. 연기는 촬영장 사람들과의 교감으로 만들어진다.
교감이 제일 잘됐던 작품이나 감독은 누군가?
전부 다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교감이 잘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힘든 작품도 있다. 매끄럽지 못하고, 덜컥하는 부분이 있다. 전부 다 잘할 수는 없다. 내가 미흡해서 앞으로 더 나아져야겠다고 반성도 많이 하고, 숨고 싶을 때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있다. 자책하다 보면 숨고 싶고, 자존감이 내려가면 연기를 할 수 없다. 내 탓이지만 자책하지 않으려 든다. 감독님과 문제를 논하고, 내가 잘해야겠다고 마침표를 찍는다.
정신 똑바로 차리려고 한다.
본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로 <하모니>를 꼽았다. 그래서 오늘 성가대의 성스러운 느낌을 표현하려고 첫 컷에 면사포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하모니>를 꼽은 이유는 무엇인가?
합창단을 통해 마음을 여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마음을 열었고, 그전까지는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갑고 어두운 역할이었다. 전주에서 촬영하는 동안 역할이 사람을 이렇게 버리는구나 생각했다. 나 스스로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와도 대화를 안 했다.
▶ 검은색 민소매 니트는 아메리칸 어패럴, 검은색 메시 스커트는 아장프로보카퇴르, 검은색 스트랩 힐은 SYNN 제품.
촬영할 때 말을 안 했다는 건가?
후반부에 마음이 열리면서 서로 공감했다. 그때는 연기한 작품이 몇 개 없었다. 미숙했다. 집중해야만 감정이 유지됐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작품이 망할 것 같았다. 정말 유미처럼 살았다. 사람들이 내게 섭섭하다고 얘기했다. 조연 배우들도 친한 친구들이었는데, 내가 말을 안 하니까 변했다고 했다. 역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무표정으로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나의 유미는 배신, 좌절, 슬픔 이런 감정밖에 없었다. 그 연기할 때 너무 힘들었다. 이후로는 밝은 작품 위주로 행복한 드라마나 따뜻한 연기를 하려고 한다. 근데 주위에서는 <하모니>의 역할이 실제 나와 가장 흡사하다더라. 난 사실 <퀵> 이런 게 좋다. 재미있으니까.
코미디를 정말 많이 했다. 그래서 강예원의 유쾌한 면을 기대했다.
나 유쾌하다. 명랑하고 캔디 같다. 집안이 어려웠던 것도 아닌데, 캔디 같은 구석이 있다. 주위 사람들이 조금만 힘들어도 못 참는다.
배신을 많이 당했나?
성향인 것 같다. 남들은 신경 안 쓰고 잘만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고민했다. 남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런 내가 싫을 때가 있다.
<나쁜 녀석들>에서 왜 그렇게 설명을 많이 하나? 수사물이라서 질문을 통해 설명해야 내용이 전달되어 그런 건가?
나도 질문하기 싫었다. 결과적으로 해결은 나쁜 녀석들이 다 한다.
그래도 삽으로 뒤통수 때린 건 한 건 했다고 봐야지?
그거야 내가 살려고 때린 거지. 현장에서 체력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남자 배우들도 인정한다. <퀵>도 그렇고, <해운대>에서도 물에 빠지고.
검은색 니트 원피스는 아메리칸 어패럴, 골드 체인 네크리스는 H&M 제품.
주로 몸 쓰는 역할을 많이 했다.
근데 체력이 강한 건 아니거든. 의지가 강한 것 같다. 질문은 시나리오에 쓰여 있으니까 해야 한다. 연기하기 어색한 대사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답답하더라도 바꾸면 안 된다. 촬영 끝나고 작가님이 미안하다고 하더라. 나쁜 녀석들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내 역할을 더 살릴 수 있는 방향이 없었다. 나 하나쯤이야 그렇게 된다고 해도 드라마가 잘됐으니까 괜찮다.
수사물을 매끄럽게 풀면 좋지만, 그게 쉽지 않다. 시청자들한테 설명해주는 조력자 역할이 필요하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나쁜 녀석들>에서 난 없어도 되는 인물이지. 상상하게 만드는 스토리가 좋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극의 수준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내가 드라마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역할이라 가슴이 아프더라. 하지만 내가 감독이나 작가가 아니니까. 최선을 다 하는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몸 쓰는 역할을 많이 할까?
강해 보이나? 그게 내 이미지인 것 같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몸 써도 불평 안 하는 여배우로 알려졌나 보다. 사실은 나도 힘들다. 힘들어도 내색 안 한다. 나도 다른 여배우들처럼 까칠하게 못한다고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몸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강예원의 몸매에 대한 이야기도 하자. 강예원 하면 몸매 좋은 여배우라는 인식이 있다.
비율이 좋은 것 같다. 키는 작지만 팔다리가 길다. 그리고 수술의 힘을 빌린 게 아니니까. 하하. 요즘에는 몸매 좋은 여배우들이 정말 많다. 이제는 몸매에 별로 관심 없다.
그래도 남자 관객들은 <퀵>을 비롯한 영화에서 강예원의 몸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과 배역이 나를 그렇게 입혀놓은 거다. 몸매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 이제는 운동도 힙업이나 가슴 위주로 하지 않는다.
강예원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건강 아닐까? 건강하게 살려고 한다. 혼자 있으면 자신감이 없을 것 같다. 친구와 매니저, 엄마가 곁에 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다. 혼자 있다고 생각하면 쥐구멍에 숨어 살 것 같다. 난 나약하다. 겁이 되게 많거든.
겁 없고, 당돌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겁이 엄청 많다. 눈물도 많고, 어린아이 같다. 그런 내가 춤출 수 있게 주위 사람들이 도와준다. 나를 알려면 내 주변을 보면 된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내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나도 좋은 사람이다.
착하고 좋은 사람을 주변에 두려고 한다. 능력이 뛰어나도 마음 나쁜 사람은 무섭다. 나를 해칠 것 같거든. 기왕이면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무엇이든 만들어가려 한다. 마음이 통해야 자신감이 생긴다.
이제 다시 1월이다. 새해 계획을 물어보는 건 유치한가?
남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나 역시 정서적으로 여유를 갖고 싶다. 하루에 여러 일을 하지 않고, 한두 가지만 하면서 여유를 즐기고 싶다. 상대에게도 여유가 생기길 바란다. 더 행복해지는 것만이 내 인생의 목표다. 그것 말고는 바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