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6가 공개되었다. 번뜩이는 언베일링(unveiling) 아이디어가 애플답다. 제품은 그렇지 못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스티브 잡스가 없는 만큼 아쉬웠다. 조세 무리뉴가 없는 동안 첼시도 그랬다. ‘스페셜 원’ 1기(2004~2007) 종료 후 6년간 감독 8명이 오가며 팀 컬러가 뒤죽박죽 섞여버렸다. 그래도 첼시는 애플보다 운이 좋았다. 잡스는 영영 떠났지만 무리뉴는 다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뭔가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1년간 예열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첼시, 아니 ‘무리뉴 첼시’다.
무리뉴는 예외적이다. 그의 언행 파고는 매우 높다. 같은 말도 그가 하면 더 멋있다. 거꾸로 같은 말도 그가 하면 더 문제를 일으킨다. 진짜 그랬다. 올 4월 첼시는 홈구장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선덜랜드에 2-1로 패했다. 무리뉴가 이곳에 등장한 이래 78경기 만에 처음 진 것이다. 경기 후 무리뉴는 상대팀과 주심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냈다. 매너 ‘갑’ 감독인가? 아니다.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주심을 비꼬았다며 그에게 1만 파운드 벌금 징계를 내렸다. 무리뉴의 칭찬을 ‘비아냥’으로 정의한 것이다. 무리뉴의 삶은 순탄하지 않다.
2014-15 시즌 개막을 앞두고 영국 현지 축구판에서 방귀 좀 뀐다는 전문가들이 각자 예상을 내놓았다. 누가 우승하고 누가 톱4에 진입하고 누가 강등될 것인지에 관해서 떠들었다. 조금씩 엇갈리는 목소리 가운데 예상 우승팀은 거의 의견이 일치했다. 첼시였다.
첼시가 프리미어리그를 제패할 거라는 가장 큰 이유가 감독 무리뉴다. 2002년 FC 포르투의 지휘봉을 잡은 이래 11시즌간(2007-08 시즌은 쉬었다) 무리뉴는 지금까지 포르투갈,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리그 우승만 일곱 번 해냈다. 그에게 국내 리그 우승은 기본 항목이다. 비싼 돈 들여 그를 고용하는 부자 구단주들은 더 큰 성공을 ‘당연하게’ 요구한다.
UEFA 챔피언스리그 제패다.
무리뉴라고 해도 유럽 챔피언을 장담할 순 없다. 지금 유럽 축구 판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복잡하고 치열하다. 과거 강팀은 독주가 가능했다. 선수 이적이 쉽지 않아 스타플레이어를 지키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랬던 시장 환경을 1995년 보스만 판례(유럽연합 회원국 국적자의 노동자유 보장)가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돈만 맞으면 언제든 누구든 이적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대 중반 러시아와 중동 자금이 밀려오면서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강자 독식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 정글 안에서 무리뉴는 독보적 업적을 쌓아왔다. 2002년 FC 포르투에서 시작해 첼시, 인터밀란, 레알 마드리드를 거치며 그는 UEFA 챔피언스리그 10시즌을 치렀다(2002-03 시즌 UEFA컵 우승, 2007-08 시즌 휴식). 무리뉴의 엘리트 무대 10년은 우승 2회, 4강 6회, 16강 2회로 꾸며졌다. 무리뉴만 있으면 최소 4강 진출이 보장된다는 뜻이다. 펩 과르디올라도 만만치 않지만 그에겐 리오넬 메시가 있었다. 지금은 독일에서 브라질 월드컵 챔피언 주역들을 독차지하고 있다.
라이벌 과르디올라, 카를로 안첼로티는 이미 슈퍼스타가 된 선수들을 더욱 빛내는 지도력이 탁월하다. 과르디올라는 메시의 비위를 잘 맞췄다. 안첼로티는 파올로 말디니, 카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으로부터 실력 100%를 뽑아냈다. 무리뉴는 다르다. 2004년(FC 포르투)과 2010년(인터밀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던 멤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각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선수들이 없었다. 대개 적당한 스타들이었다. 기량은 출중해도 챔피언이 아닌, 굳이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이미 배가 부른 백만장자들이었다.
무리뉴는 그런 어중간한 스타들에게 ‘최고’가 되고 싶은 열망을 심어준다. 그가 가진 가장 특별한 능력이 자기 선수를 승리자로 만드는 것이다. 올 시즌 사우샘프턴에서 프리미어리그 데뷔한 로날트 쿠만이 이를 잘 설명한다. “무리뉴 축구가 가장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승리자를 만들어낼 줄 안다. 자기 선수들을 승리자로 만드는 능력에서는 아무도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
무리뉴의 믿음도 확고하다. 축구 지식을 중시하면서도 무리뉴는 “축구가 스포츠과학이라고? 아니다. 나는 인간과학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2010년 인터밀란의 유럽 제패가 아마도 무리뉴 지도력을 가장 잘 나타내는 업적일 것이다. 2008년 무리뉴가 입성한 인터밀란 1군 스쿼드는 ‘늙어 있었다’. 33세 이상이 14명, 계약 마지막 시즌을 보내는 선수가 75%에 달했다. 무리뉴 자신도 “현역 막판에 다다른 선수들에게 개인 기량을 발전시키자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팀 전체 발전에 초점을 맞췄다. 우리가 힘을 합쳐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해보자고 말했다”라고 회상한다. 2010년 5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특별한 무리뉴와 늙은 인터밀란은 바이에른 뮌헨을 2-0으로 완파하고 유럽 최정상에 섰다. 인터밀란 베테랑들은 이탈리아 축구 최초로 트레블 주인공이 되었다.
무리뉴가 그렇게 만들었다.
이제 다시 첼시 차례다. 돌아온 첼시는 무리뉴의 팀이 아니었다. 시즌 도중 무리뉴는 “첼시는 프리미어리그,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할 수 없다”라고 인정했다. 프리미어리그는 “골잡이가 없어서”였고, 유럽은 “바이에른 뮌헨,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가 있기 때문에”라고 우승하지 못하는 이유를 달았다. 감독들의 흔해 빠진 “최선을 다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발언과 대조되는 우승 불가론이었다. 그가 옳았다. 첼시는 리그에서 사무엘 에투가 9골, 페르난도 토레스가 5골에 그쳐 시즌 3위에 머물렀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패해 4강 탈락했다. 재차 강조하지만 유럽 4강은 무리뉴에겐 평타에 불과하다.
특별하지 못했던 첫 시즌이 끝나자마자 무리뉴는 디에고 코스타를 영입했다. 그가 말했던 ‘골잡이’였다. 리버풀 이적에 실패한 로익 레미와 ‘드록신’ 디디에 드로그바를 추가했다. 후안 마타를 떠나 보낸 자리에는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데려왔다. 큰돈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다비드 루이스, 로멜루 루카쿠 등을 팔아 받은 수입을 따지면 실제 지출 규모는 1천만 유로에 그쳤다. 값비싼 슈퍼스타보다 승리자가 되고픈 야망을 품은 선수를 선호하는 무리뉴의 영입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팀은 있는데 골잡이가 없다”라고 말했던 무리뉴는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처음으로 우승을 언급했다. 그는 “우리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하고 싶고 경쟁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밝혔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 대해선 “16강 토너먼트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라며 살짝 힘을 뺐다. UEFA 챔피언스리그를 오랜 기간 거치며 얻은 지혜(혹은 처세) 덕분일 것이다. 어쨌든 지난 시즌과는 다른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 점이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2014-15 시즌 초반 ‘무리뉴 첼시’는 강하고 단단하다.
프리미어리그에서는 개막 7라운드 현재 유일한 무패팀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맨체스터 시티, 리버풀, 아스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이 벌이는 경쟁 속에서도 군계일학이다. 우승 경쟁의 방점에 해당하는 디에고 코스타는 7경기에서 9골을 터트리고 있다. 네마냐 마티치와 세스크 파브레가스는 중앙 미드필드에서 완벽한 공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 경쟁은 이미 ‘1강’ 체제로 굳어지는 형국이다.
물론 초점은 UEFA 챔피언스리그다. 첼시는 샬케04(독일), 스포르팅 리스본(포르투갈), 마리보르(슬로베니아)와 함께 G조에 속해 있다. 조별 리그 1차전에서 샬케04와 1-1로 비겼지만 2차전 원정에서는 스포르팅 리스본을 상대로 1-0 신승을 거두어 첫 승리를 신고했다. 어떻게든 승점 3점을 따내는 첼시의 집중력이 입증된 경기였다. 진짜 도전은 토너먼트 단계부터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시티 등과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누가 이긴들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엘리트 클럽들이다.
그러나 대회 출전팀을 통틀어 무리뉴의 첼시야말로 정말 만나기 싫은 팀일지 모른다. 무리뉴는 학습 효과가 매우 뛰어난 지도자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 자신에게 망신을 줬던 바르셀로나를 무리뉴는 기어이 따라잡아버렸다. 우승 후보 대부분 무리뉴가 UEFA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상대해본 팀들이다. 최근 다섯 시즌간 무리뉴는 대회 마지막 단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바이에른 뮌헨(2회), 바르셀로나와 각각 만났다. 유럽에서 무리뉴에게 연이은 아픔을 겪게 했던 경쟁자는 리버풀뿐이었다.
하지만 현 전력상 첼시가 어떤 경기에서도 리버풀에 덜미를 잡히진 않을 것 같다.
2014-15 시즌 첼시는 유럽을 통틀어 가장 균형이 잡혀 있다. 디에고 코스타의 백업이 드로그바와 레미다. 미드필더 자원은 최강이다. 에당 아자르, 파브레가스, 오스카, 안드레 슈를레, 윌리앙, 하미레스, 네마냐 마티치, 모하메드 살라, 존 오비 미켈이다. 완전한 더블 스쿼드를 구비했다. 존 테리와 게리 케이힐 중앙수비 조합도 유럽 정상급이다. 풀백 포지션에 배치된 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 필리페 루이스 역시 유럽 어느 빅 클럽에 가더라도 주전 활약이 가능하다. 골키퍼? 티보 쿠르투와와 페트르 체흐가 주전 경쟁을 벌인다. 신흥 강호들이 갖추기 어려운 연속성과 전통, 경험, 뼈대를 첼시는 장착했다. 맨체스터 시티, 파리 생제르맹에는 결여된 요소들이다. 여기에 현존 최고 명장 무리뉴가 지휘한다. 유령골, 어이없는 오심 퍼레이드,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힘(첼시를 시기하는?)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올 시즌 ‘무리뉴 첼시’는 국내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
무리뉴라면, 무리뉴라서 가능하다.
Words: 홍재민(<포포투> 기자)
Editor: 이우성
ILLUSTRATION: 이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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