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힘은 거대하고 또 무한하다. 각국의 서로 다른 언어 체계는 사고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원어민 뺨치는 수준으로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한다 하더라도 미묘한 뉘앙스의 실낱 같은 균열이 거대한 오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해 뭐할까. 2003년 ‘던킨 도너츠’ CF로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오타니 료헤이는 MBC 드라마 <소울메이트>를 통해 배우 활동을 시작해 <도쿄, 여우비> <집으로 가는 길> 등 많진 않지만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2011년 <최종병기 활>에서 ‘쥬신타(류승룡)’를 지키는 몽골 장수 ‘노가미’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에서 그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언어장애를 가진 역으로 분했고 말 대신 눈빛과 몸짓으로 모든 표현을 해냈다. <히어로>와 <추적자> <구가의 서>와 같은 드라마 활동도 최근 <조선총잡이>까지 이어졌고, 현재 1천7백만의 관객 수를 갱신한 <명량>에 출연하면서 그의 눈빛은 더 강해지고 깊어졌다. 특히 작품을 작품만으로 볼 수 없는 ‘이순신’에 관한 역사물인 만큼 일본인으로서 아군을 배신하고 조선의 배에 올라 ‘구루지마’에게 칼을 꽂는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도 오타니 료헤이에 대한 대중의 이목을 더 끌게 만들었다.
그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배우’라는 자신에 대한 수식어에서 ‘일본인’이라는 단어로부터 굳이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10년 동안 한국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이미 그럴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 듯했다. 하지만 그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건 ‘배우’라는 단어다. 자신의 현실에서 주어진 것을 기다리되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힘들다고 앓는 소리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오타니 료헤이가 삶을 대하고 연기를 대하는 방식이다.
◀ 남색 수트 재킷과 팬츠 모두 디올 옴므, 와인색 터틀넥 니트는 발렌시아가 by 무이, 은반지는 메탈릭본드 제품.
연기를 외국어로 해야 하니 두 배로 힘들겠다.
드라마, 영화 작업 들어갈 땐 시나리오 보고 이해가 안 가거나 어려운 부분은 주변 지인들이나 회사 매니저들에게 계속 물어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준비하는 편이다.
<명량> 개봉 이후 인터뷰를 많이 했겠다.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요즘 가장 많이 했을걸. 그런데 화보는 쉽지 않다. 오늘 해보니 어떤가, 괜찮았지?
그걸 나한테 묻는 건가? 하하. 좋았다, 좋았다.
어때, 료헤이는 할 만했나?
<아레나>가 남성 잡지 아닌가. 이런 거 많이 해보고 싶다.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나를 <아레나> 전속 모델로….
뭐라고? 잘 못 들었다.
전속 모델.
(웃음) 아~ 촬영 때부터 느꼈는데 자신만의 개그 코드가 있다. 조용하고 나긋이 말하는데 주의 깊게 들어보면 농담이고, 이런 거.
(조용히 끄덕끄덕)
배구 선수 출신이라 들었다. 그만둔 이유는 뭐였나?
대학 때까진 선수로 활동했다. 그다음 수순은 프로 리그였는데 더 이상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배구 선수치고 키가 큰 편도 아니었고 운동하면서 어려움이나 한계 같은 걸 느꼈다.
그러다 어떻게 모델이 되었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같이 일하는 형이 모델이었다. 그 형 소개로 에이전시 사장을 만나게 됐고 계약으로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델이라는 건 파리 컬렉션 런웨이에나 서는 건 줄 알고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할 수 있겠나 했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니 괜찮더라. 나처럼 평범하게 생긴 사람도 많이 있었다.
평범하게 생겼다고?(웃음) 일이 본인에게 잘 맞았나?
그런 생각보다 한 번 촬영하면 큰 액수의 돈이 들어오는 게 좋았다. 학생이 아르바이트만 하다 처음으로 사회 나가서 번 돈이었으니까. 그렇게 모델 일을 시작해서 몇 개월 안 됐는데 한국에서 광고를 찍게 됐다. ‘던킨 도너츠’ 찍은 게 2003년이었는데 다음 해 여름, 한국 회사와 계약하고 한국에 들어와 살았다. 한국 회사에서는 나를 배우로 만들고 싶어 했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처음부터 내가 관심 있었던 건 연기였다.
일본인에 신인임에도 첫 작품이 <소울메이트>였다.
2006년 회사 사무실에 예능 프로그램 작가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때 내가 고집 같은 게 있어서 ‘내가 무슨 예능이야, 처음은 무조건 드라마다’ 하며 안 한다고 했다. 진짜 건방지게. 그런데 그 이후 같은 작가가 드라마 시나리오를 가지고 오셨더라. 그걸 읽어보니 내 역할 이름이 ‘료헤이’였다. 나를 위해 그 역할을 만들어준 거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작품이 <소울메이트>였다.
거절할 수가 없었겠다.
그렇지. 거절할 필요도 없었고. 운이 정말 좋았다. 한국에 건너와서 작품 시작할 때도 사람들이 호의를 베풀어주고 따뜻하게 도와줬다. 한국에서 10년이나 살면서 역사적인 문제로 힘들어본 적 없느냐고 사람들이 정말 많이 물어보는데 그런 적이 전혀 없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한국에 살면서 한번도 감정적으로 상처받거나 힘들었던 적이 없더라.
▶ 격자무늬 갈색 코트는 겐조, 기하학 패턴의 흰색 셔츠는 산드로 옴므, 팬츠는 버버리 프로섬, 검은색 슈즈는 보테가 베네타 제품.
인생의 3분의 1을 타국에서 살았다.
그러네…. 한국이 외국이란 느낌이 없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기서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거의 없네. 촬영 현장에서도 사람들이 나를 이방인으로 대하지 않는다.
일본인으로서 한국 작품을 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아무래도 일본 배우와 한국 배우가 연기하는 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나 뉘앙스 차이가 있다. 비주얼적인 면도 그렇고. 생각하기 나름인데 내가 한국 배우를 따라 하려고 하면 오히려 나만의 느낌이나 매력이 떨어질 것 같다. 일본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느낌을 살려 연기하는 게 오히려 재미있고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제 ‘연기의 맛’을 어느 정도 알겠나?
전혀.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직 내가 뭔가 해내고 달성했다는 느낌이 하나도 안 든다. 여전히 데뷔하기 전 같다. 연기를 하는 순간 자체가 너무 좋고 행복해서 헤어나올 수 없는 건데 하다 보면 분명 뭔가 될 것 같은, 내가 생각한 대로 될랑 말랑 한 정도까지 올라갔다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계속 하는 거다.
스스로 만족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래도 ‘내 생애의 한 신’은 있을 거다.
<최종병기 활>에서 죽는 장면.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연기해온 것 중 몰입 상태가 최고였다. 주변이 하나도 안 보이고, 한마디로 제대로 미쳤었다. ‘남이(박해일)’와 싸우다 죽는 신이었는데 그땐 정말 박해일 선배를 죽여버리겠다는 느낌까지 갔었다. 정말 미친 거지. 몰입이 되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바뀌더라. 그게 감독님한테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게 연기하는 재미인 것 같다.
그런 순간이 자주 오는 건 아니겠지.
그게 자주 반복되면 너무 힘들어 죽을 거다.
작품에서 한국인 역할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나?
음… 사실 ‘노력해서 그렇게 해보고 싶다’가 맞는 대답일 텐데 솔직히 그건 내 욕심이라는 걸 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게 아니니까. 남자가 여자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외국인이 한국 작품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 이미지나 느낌을 좋아하고 찾아주는 감독님들이 많다. 감사하게도. 굳이 일본인이 아니어도 되는데 나를 위해 역할을 바꾸거나 맞춰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건 내가 일본인이어서가 아니라 료헤이라는 사람의 느낌이 좋아서가 아닐까. 그러면서 점점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나 같은 경우엔 뭐든 억지로 달려들어 하려고 하면 오히려 잘 안 되더라. 자연스럽게 연이 맞아 나에게 오는 걸 기다리는 게 낫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스타일이 아닌가 보다.
받는다, 스트레스. 예민한 편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힘든 걸 표현하는 게 싫다. ‘이런 게 힘들었다. 쉽지 않다’라고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런 건 싫다. 바보 같다.
STYLIST: 노희구
HAIR: 이현(제니하우스)
MAKE-UP: 김주희(제니하우스)
photography: 목정욱
editor: 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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