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킷과 코트 모두 김서룡 옴므, 베스트는 루키버드, 체크 셔츠는 시리즈, 타이처럼 묶은 스카프는 프라다 우모, 서스펜더는 쿠플스 제품.
한 영화가 많은 걸 바꿔놓았다. <명량> 얘기다. 최다 관객 기록뿐만 아니라 한 배우도 다시 쓰게 했다. 이순신의 아들, 이회 역을 맡은 권율 말이다. 대중은 이제 권율을 알게 됐다. 이회 역으로든, 배우 그 자체로든. 미안한 말이지만 그전에는 둘 다 희미했다. 물론 그동안 영화 몇 편에 출연하긴 했다. 검색해야 아, 하며 알아챌 정도였지만. 이제는 다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명량>은 그에게 터닝 포인트 같은 영화다. 단지 대중의 인지도에 관한 얘기만은 아니다. 배우로서도 느낀 바가 컸다. 최민식이라는 거목 옆에서 한 철을 지나왔으니까. 배역을 맡기까지 다른 마음으로 임했으니까. 사람에겐 인생에서 기회가 세 번 있다고 한다.
분명 <명량>은 배우 권율에게 그 기회 중 하나였다.
이순신의 아들, 탐나는 역할이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꼭 이 역을 하고 싶었다. 지금 내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역할이었으니까. 이순신은 배우 인생에서 언젠가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들 역할은 지금 아니면 맡기 힘들다. 게다가 최민식 선배님이 이순신을 맡았으니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런 작품이어서 의미가 컸다.
잘하는 배우와 함께 연기할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
끊임없이 집중하고 고민하는 선배님의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에이, 일부러 그러시나 했다. 그런데 함께할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 정말 이게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장면도 있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이 영화가 어떻게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로 남을 수 있는, 표본이 될 수도 있잖나. 그럴 때 최민식 선배님을 정말 이순신 장군으로 후손들이 기억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코카콜라 광고에서 만든 산타클로스 이미지를 지금 우리가 산타클로스로 인식하듯이.
그런 연기를 보면 한편으로 대단하다고 느끼지만, 같은 배우로서 부럽기도 했겠다.
부럽진 않았다. 나 또한 그렇게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니까. 계속 함께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에 못지않은 역할을 할 것이라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부분에선 그냥 선배님이 존경스럽지, 난 언제 저렇게 하지, 하는 불안감은 없었다.
촬영하기 2주 전까지 이회 역을 결정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전에 오디션도 많이 봤다고 하고. 그 경쟁을 뚫고 결국 뽑혔다.
왜 뽑았다고 하던가?
한참 촬영하다가 여쭤보았다. 어렵게 출연이 결정되고, 역할을 연기하는 것도 어려웠다. 이회라는 캐릭터 자체가 어려웠다.
뭘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캐릭터여서 너무 답답한 마음에 감독님께 찾아가 물었다. 저를 왜 캐스팅하셨어요? 그냥 처음 봤을 때 네가 이회 같았다,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연기를 잘해서, 외모가 뛰어나서 뽑은 게 아니라, 이회라는 캐릭터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온전히 다 마음으로 안아야 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는데 너의 그런 넓은 마음이 느껴졌다, 라고 얘기하셨다.
무슨 선문답 같다.
그러니까. 내가 그 에너지를 온전히 다 받아줄 수 있는, 소위 말해서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어떤 착한 마음이 이회 같았다고 해주셨다. 난 착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난 욕심도 많고, 좀 못되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못된 모습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 안에 진짜 착한 면이 있는데, 감독님이 그 모습을 봐주셨을 수도 있다.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모습과 남이 보는 모습이 다르긴 하잖나.
◀ 긴 베스트 재킷은 프라다 우모, 셔츠는 S.T.듀퐁, 손에 든 코트는 서리얼 벗 나이스, 양말은 해피삭스, 슈즈는 구찌 제품.
데뷔한 지 7년. 숱한 선배들처럼 그도 잘나갈 줄 알았다. 20대 청년의 포부는 언제나 현실보다 다소 앞선다. 권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흘러간 시간만큼 필모그래피는 쌓이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가고, 해놓은 건 없었다. 그렇게 20대를 다 써버렸다. 남는 건 초조함뿐이었다. 안으로만 자꾸 파고들었다. 밖으로 향할 곳이 없었다. 그렇게 혼자 웅크리고 있었다. 권율은 계속 웅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20대를 마감하며 그 마음을 털어냈다. 초조한 자신감 대신 여유로운 도전을 택했다. 꼭 연기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냥, 웅크리지 않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봤다. 미처 보지 못한 다른 것들이 보였다.
그렇게 걸어오다 <명량>을 만났다.
데뷔한 지 7년 됐다. 그 기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잘해왔나?
흔들리고 힘든 기간도 많았다. 그래도 한 번도 연기를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왜 이렇게 세상이 나를 못 알아줄까, 원망스럽기는 했지만. 그런데 한 살 한 살 먹다 보니까 세상을 탓하기 전에 내가 뭐가 부족한지 너무 간과하고 있었더라.
처음에는 세상을 다 집어삼킬 것 같은 자신감과 욕심을 품고 나왔다.
그러다 내 맘 같지 않은 세상과 부딪혔겠다.
굉장히 겁 없이 달려들었다가 그런 기세가 꺾이면서 세상을 탓하기 시작했다. 숨어들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힘들어지고. 동네 친구들을 만나도 너 요즘 뭐하냐, 이런 얘기 듣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다. 부모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특히 스물아홉에서 서른 살이 될 때 너무 힘들었다. 나의 20대, 청춘의 상징인 20대가 지나는데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다는 것에 대한 후회? 자책?
서른 살이 되고 결심했다. 20대는 후회가 남은 삶이었다면 30대는 후회가 남지 않게 살겠다고. 내가 서른아홉에서 마흔이 될 때,
6개월 동안 잠을 못 잘 정도로 스트레스 받아 힘든, 이 지옥 같은 마음의 시기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돌파구를 찾았나?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안 해본 것들을 많이 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영화도 더 많이 보고, 여행도 자주 다니고, 전시회장도 가고…. 뭐든지 했다. 계속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20대 때 하지 못한 것들에 갈증이 있어서 기타도 쳐보고 술도 질펀하게 먹어보고. 20대 때는 그냥 딱 한 곳만 바라봤다. 여유가 없었다. 좀 빠져나와서 눈을 기르려고 노력했다. 사실 스물아홉인 12월 31일과 서른인 1월 1일이 불과 하루 차이인데, 변해봤자 얼마나 변했겠나. 그냥 그런 다짐이 날 여유 있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까 조금씩 풀리던가?
예전에는 작품 오디션에 참여하는 태도나 작품을 바라보는 눈이 이걸 꼭 해야 해, 하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시야가 넓지 않았다.
여유 있는 사람의 자신감이, 즉각적이진 않았지만 서서히 오기 시작하더라. 그렇게 30대를 보내던 중에 현재 소속사 대표님과 만났다. 20대 때도 지금 대표님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땐 나 잘난 맛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하자고 했는데도 알아서 하겠다는 마음으로 거절했다.
확실히 여유 있어야, 그러면서 이리저리 움직여야 뭐든 된다.
맞다, 하하. 오디션 기간이 굉장히 길었지만 이회라는 캐릭터를 기다리며 조마조마하진 않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을 들였다.
운명처럼 다가올 것 같다는 이상한 기대감은 있었지만, 꼭 해야 해 하며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회에 캐스팅될 때까지 일기를 썼다.
캐스팅되지도 않았는데 일기를 썼다고?
이회를 꼭 맡고 싶은 마음을 일기로 기록했다. 한 50~60일치 정도 된다. 마지막 미팅 즈음에 일기에 관해 말씀드리긴 했다. 그전에 감독님은 알고 계신 듯했지만, 그냥 지나가듯이 들으신 거 같다. 그래도 그런 내 마음이 다 전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꼭 맡기 위해 일기를 썼다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써서 특별한 경험이었다.
“반전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여러 인터뷰에서 권율이 말했다. 말만 하진 않았다. 실제로 그는 생소한 역할을 맡아왔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신체를 훼손한다든지(<피에타>), 어딘가 좀 비어 보이는 대책 없는 젊은이(<잉투기>)를 맡았다. 외모만 보면 부잣집 외동아들이 연상되는데도. 실제로 그런 역이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권율은 일부러 돌아가기로 했다.
그게 더 오래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굳게 믿어서다. 물론 그쪽이 더 재밌기도 해서다.
반전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피에타>나 <잉투기>는 그런 의도로 선택했나?
분명히 대중이 배우에게 원하는 부분이 있다. 저 배우는 저런 멜로가 딱 맞아, 저 배우는 액션이 딱 맞아, 하는 모습 말이다. 하지만 아직 나는 그런 부분을 확실히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 내게 어떤 모습을 바라는 분들도 있겠지만, 어떤 역을 잘할 수 있는지 모르는 상태다. 아직 도전하고 더 많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관객에게 어떤 것들이 잘 어울리는지 도전해볼 테니까 같이 봐주세요, 하는 마음이다. 일단 어떤 선을 그어놓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좀 두려운 역도 있지 않나? 오히려 처음이니까 더?
그런 마음은 없다. 여기서 주눅 들면 어떡하나. 물론 어떤 역이든 영화적인, 작품의 메시지가 분명해야 한다. 날 가십거리로 소모하는 캐릭터라면 안 할 테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든, 적나라한 노출 신들이 많은 역할이든 작품이 담은 철학에 공감대만 형성된다면 두렵지 않다. 주변에서 손가락질을 하든, CF가 들어오지 않든, 그 어떤 것이든.
예상을 벗어나는 데 희열을 느끼나 보다.
관객에게 ‘서프라이즈’ 느낌을 주고 싶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이건 재밌네? 저런 모습이 있었어? 하면 성공한 거고. 외모와 다른 역할을 맡아 색다른 정서를 전달하고 싶다. 어찌 됐든 대중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재미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기적인 재미 외에도 캐릭터만 봐도 느낄 수 있는, 찰나의 희열을 주고 싶다.
PHOTOGRAPHY: 이상엽
EDITOR: 김종훈
STYLIST: 김하늘
HAIR: 재황(에이바이봄)
MAKE-UP: 재희
ASSISTANT: 박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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