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펠리프 스콜라리 + 브라질
스콜라리는 선수 시절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힘은 좋았지만, 기술이 좋지 못해 다른 선수들에게 ‘나무다리’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리더십만은 좋았다. 33세였던 1981년, CSA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자마자 1982년 그 팀의 감독이 됐다.
이후 방랑이 시작됐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샤바브, 쿠웨이트의 알카디시아, 쿠웨이트 대표팀, J리그의 주빌로이와타를 거쳤다. 스콜라리는 2002년 브라질 대표팀을 이끌고 한일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스타가 됐다. 스콜라리는 불같은 성미로 도마에 오르곤 한다. 2007년, 포르투갈 대표팀을 맡았을 때, 세르비아와의 유로 2008 예선전에서 경기 중 상대 선수인 이비차 드라구티노비치에게 주먹을 날려 4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
로이 호지슨 + 잉글랜드
잉글랜드 출신 호지슨 감독은 고국보다 외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스웨덴 할름스타드를 시작으로 핀란드 대표팀까지 30년 가까이 타향 생활을 했다. 2007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풀럼으로 돌아온 후에도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풀럼과 리버풀 그리고 웨스트브로미치에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그가 2012년 대표팀 감독이 되자 잉글랜드가 들끓었을 정도다.
하지만 호지슨은 이후 벌어진 유로 2012에서 8강,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견인했다. 그는 선수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데 능하다. 그와 함께하며 악수를 거부하기도 했던 설기현은 “내가 그런 일을 해도 단 한 번도 나무란 적이 없었다. 항상 따뜻하게 대해줬다”라고 말했다.
파비오 카펠로 + 러시아
카펠로 감독은 어떻게든 승리하고, 우승컵을 가져온다. 재미는 없어도 승점은 남는다. 냉혈한 전술의 대가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잉글랜드 대표팀과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실패한 게 유일할 정도다. 카펠로 감독은 감독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2006~2007 시즌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고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차지했지만, 다음 시즌을 앞두고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경질당했다. 그만큼 카펠로의 축구에는 인정, 자비가 없다. 팬들이야 어떻든 구단주 그리고 축구협회장은 카펠로를 사랑한다.
카펠로가 지휘한 러시아는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전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포르투갈을 2위로 밀어내고 본선행 티켓을 잡았다. 역시 카펠로였다.
오트마르 히츠펠트 + 스위스
고향인 독일보다는 스위스에서 더 존중받는 지도자다. 히츠펠트 감독은 스위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마쳤다. 선수 시절 한때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지도자 생활도 스위스에서 열었다. 스위스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히츠펠트 감독은 분데스리가 양대 명문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 뮌헨을 오가며 우승컵을 쌓았다. 우승청부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는 유로 2008을 앞두고 스위스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이후 월드컵 예선전에서 룩셈부르크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이후 팀을 잘 추슬러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그는 브라질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 한다.
위르겐 클린스만 + 미국
금발의 폭격기로 유명한 클린스만은 미국을 사랑했고, 결국 미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선수 시절부터 미국에 본가를 두었고, 2003년에는 메이저리그사커(MLS) 오렌지 카운티 블루스타에서 뛰었다. 2004년 독일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을 때도 이런 행실이 입방아에 올랐었다. 독일 팬들은 대표팀 경기가 없을 때는 미국에 거주했던 대표팀 감독을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그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하며 이런 비난을 잠재웠다.
하지만 2008년 7월 바이에른 뮌헨에 부임한 뒤 2009년 4월에 조기 해임되며 자존심을 구기기도 했다. 심기일전한 그는 2011년 미국 대표팀 감독이 됐고, 2014 브라질 월드컵 출전권을 얻었다.
카를로스 퀘이로스 + 이란
부침이 큰 지도자다. 1989년과 1991년 포르투갈 대표팀을 이끌고 U-20 청소년 월드컵을 연달아 제패하며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1994 미국 월드컵 본선행에 실패하며 경질됐고, 이후 2002 한일 월드컵 본선 티켓을 잡았지만, 대회 전 갑작스럽게 해임됐다. 이어진 레알 마드리드와 포르투갈 대표팀 생활도 평탄하지 못했다. 그는 2011년 이란 대표팀을 맡으며 다시 이름을 날렸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에서 한국과의 경기를 앞두고 과격한 언사까지 섞어가며 인터뷰를 했고, 한국을 두 번 모두 잡으며 월드컵으로 향했다. 그는 승리한 뒤 최강희 감독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이란 기자들과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루이스 판 할 + 네덜란드
판 할은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체육 교사로 일할 정도로 지능이 뛰어났다. 판 할의 능력을 알아본 AZ 알크마르는 은퇴한 판 할을 바로 코치로 발탁했고, 판 할은 1년 만에 네덜란드 최고의 명문인 아약스로 적을 옮긴다. 그는 아약스와 FC 바르셀로나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에서 성공적인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욱하는 성미 때문에 종종 구단 수뇌부, 스타 플레이어 그리고 언론과 마찰을 빚었다. 주제 무리뉴 못지않은 독설을 자랑하고, 특히 기자들이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며 무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판 할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임설이 떠돌자 웨인 루니가 구단에 반대 입장을 표했을 정도다.
페르난두 산토스 + 그리스
포르투갈 출신인 산토스 감독은 대기만성형 지도자다. 그는 에스토릴-프라이아에서 1975년 은퇴한 후 축구계를 떠나 12년 동안 전기, 통신 기술자로 일했다. 1987년 3부 리그에 있던 에스토릴-프라이아 지휘봉을 잡은 산토스는 7년 동안 팀을 맡으며 1부 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그는 포르투갈 명문 포르투를 지휘한 뒤 그리스로 떠났다. AEK 아테네를 성공적으로 이끈 산토스 감독은 이후 포르투갈과 그리스를 오갔다. 결국 산토스 감독은 고향 포르투갈보다 그리스에서 능력을 더 인정받았고, 결국 2010년 오토 레하겔 감독의 뒤를 이어 그리스 대표팀을 맡았다.
Words: 류청(풋볼리스트 기자)
Editor: 조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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