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한홍일 Hair&Make-up 김청경 Stylist 윤은영 Editor Y.Woo.
13년 전 ‘허장강의 아들’로 만났을 때 뻣뻣하게 세운 허리가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빤한 친절보다는 행동 하나하나에 절제와 매너를 보여준 기억 역시 또렷하다. 꽃미남과의 말쑥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묘한 친밀감을 주었던 브라운관 신인 연기자가 지금 이마에 깊고 굵은 주름 서너 개를 만들어 흘러간 세월을 자연스럽게 대변하고 있다. 여전히 곧추세운 허리만은 세월을 비켜간 듯하다. 3일 전, 경남 산청 황매산 자락에서 ‘해모수’의 최후를 끝냈다는 그에게서 영웅 해모수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스튜디오 안에서 연기자 허준호가 자신이 좋아하는 다방 커피와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막 병원에 다녀왔다고 들었다(그는 드라마 <주몽>을 촬영하면서 부상을 당했다). 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
괜찮아지고 있다. 무릎 주변에 근육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 지금도 막 치료를 겸한 근육 운동을 하고 와서 이렇게 얼굴에 땀이 맺히는 것이다. 촬영 중에는 몰입하느라고 심각한 줄 몰랐다(드라마 1, 2회분 촬영 중 옆 말이 그의 다리를 차는 사고가 있었다). 촬영을 끝내고 매니저에게 “어, 내 무릎이 이상해. 마구 헛도는 느낌이야” 라고 말했다. 연골 보호제를 바른 후 진통제를 먹고 무릎 보호대를 차고서 스케줄을 마쳤다. 왼쪽 무릎의 십자인대가 찢어졌다는데 기적처럼 붙었다고 하더라. 아직까지 조금 욱신거린다. 몸을 관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체력 보강을 해야지.
부상당한 무릎에 물이 찼다면 심각한 상태가 될 뻔했는데. 부상을 입은 다음에도 한참 동안 영화 <중천> 촬영으로 2, 3개월 더 중국에 머물렀다. 이런 위험한 액션 제안이 다시 들어온다면 또 할 수 있겠는가? 대작일수록 드라마의 질은 높아지지만 연기자에 대한 관리나 시스템은 아직까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다시 할 수 없다면 할리우드로 가야 하지 않겠나? 무작정 할리우드에서처럼 대우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데뷔 시절, 안성기 선배가 카메라와 장비를 들고 스태프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았다. 예전에는 스태프들과 촬영장 세트도 같이 만들었다. 13년 전보다 점점 시스템이 좋아지는 걸 느끼고 점점 더 나아질 거라는 생각을 한다. 요즘은 현장에서 일부러 하지는 않는다. 내가 지치면 연기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까. 체력 보강 차원이랄까,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혼자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힘든 사극, 예정된 출연분도 2, 3회 정도, 소속사 측도 반대했다는 ‘해모수’였다. 캐스팅에 응한 데는 <주몽> 작가와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고 들었는데,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달라.
처음에는 최완규 작가의 작품인 줄 몰랐다. 대본을 받아들고 한동안 보지 않았다. 책상 위에 두었다가 우연히 보면서 무릎을 쳤다. ‘제대로 쓴 거구나’하고 생각한 뒤 보니 <올인>을 쓴 작가였던 것뿐이다. 사무실 측에서는 “형, 정말 할 거예요?” 하더라. 소속사 대표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드라마 3회 대본 분량을 가지고도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스케일이 크고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개인적인 고민과 맞닿아 있어서 해모수에게 더욱 강렬한 매력을 느낀 것 같다.
개인적인 고민이 무엇이었나?
대의를 가진 사람은 사라지고 죽는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역사가 평가를 한다. 그가 진정한 영웅이었는지 아닌지를. 해모수를 방해하는 세력인 신녀 여미을과 부득불은 부여의 세력과 미래를 걱정하는 입장에서 처한 행동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재평가를 받는다. 세월은 영웅을 남긴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약속은 지키며 살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이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적이 많다. 그런 갈등과 상처를 받으면서도 나는 나를 지키고 싶다. 옳은 것과 대의가 이기적인 사익(私益)으로 변절되거나 묻혀버리는 것이 싫더라. 나더러 그렇게 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스스로 용납하기 어렵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게 거짓말을 한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남아 있지 않다. 우연히 다시 만나더라도 그들이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더라. 행복해지기 위해 이기적으로 흐르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상처를 주는 지금의 문화와 풍토가 싫다.
구체적으로 언급해줄 수 있겠나?
내가 몸담고 있는 현장을 예로 들어보자. 언제부터 불륜에 둔감한 국민 정서가 되었는가. 지금 나오는 대개의 드라마가 불륜을 정당화하거나 이슈로 만드는 게 현실 아닌가. 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도움을 주는 질 좋은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야기다. 나 어릴 적에는 ‘나쁜 놈이 되지 말자’라는 명분이 있었고, 지금까지 그 대의에 따라서 살아왔다. 어른이 되어 변할지언정,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은 확실하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아이들은 어떤가? 우리 어른들이 제대로 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좀 보수적인가? 답답한 가부장은 싫지만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장점인 한국인의 정서가 옅어지는 게 싫다. 월드컵 다음 날이 싫은 것과 마찬가지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뮤지컬 <맘마미아>를 바라보는 국내 흥행과 평가다. 작품성을 떠나 뮤지컬 스토리로 보자면 우리나라 정서와 극대치점을 이룬다. 엄마가 딸을 낳았는데, 그 아버지가 누구인 줄 모른다는 스토리가 어떻게 여과도 없이 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재밌다고만 말한다. 뭔가 조금 엇박자로 나가는 느낌이다.
뮤지컬에 대한 당신의 애정은 익히 알고 있다. 지금 제작 준비 중인 뮤지컬 <해어화>는 순수 창작물이라고 들었다. 드라마와 함께 진행될 예정이라는 <해어화> 프로젝트를 들려달라. 드라마를 끝내고 <해어화> 투자를 받고 있는 중이다. 단순한 기생의 이야기가 아닌, 완전한 엔터테이너를 만드는 이야기다. 몸을 파는 여자들이 아니라 큰 것을 볼 줄 아는 여자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여자들을 보여준다. 먼저, 동일한 제목으로 드라마로 방영되고 곧바로 뮤지컬로 상영할 예정이다. 현재 우리나라 뮤지컬은 1천억대 시장이 되었는데 커진 상황만큼 관객들에게 질 좋은 서비스를 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빠른 시간 안에 뉴욕 브로드웨이의 의상, 연출 등 시스템을 모두 배웠다. 이제 우리 것을 만들 때라고 생각한다.
연극 무대와 영화를 오가는 배우는 종종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당신처럼 전 방위로 활동하는 배우는 드물다. 발군의 노래 실력과 춤 솜씨…. 뮤지컬은 단순한 연기력만 가지고는 출연할 수 없다. 당신을 연기자로만 알고 있는 현실이 섭섭하지 않은가?
돈만 되면 뉴욕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데뷔 10년 만에 처음 가본 브로드웨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내가 알았던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톱스타 더스틴 호프만이 공연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고 깨달았다. 영화배우도 없고, 뮤지컬배우도 없고 탤런트는 더더군다나 없는 상황을. 배우만큼은 장르에 구분 없이 가야 하는 것이 생명력이 길고 진짜 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신인 시절 나는 노래 실력이 형편없는 코러스였다. 뮤지컬 <캣츠> 때는 음악감독한테 쫓겨나기도 했다. 무용 실력이야 전공(그는 서울예대 무용과 출신이다)을 했으니 그렇다치고. 오기로 노래를 배웠다. 개인 레슨을 받아가면서 말이다. 무용 실력도 연습의 결과다. 무용과 선택도 막바지에 다다른 선택이었다(신일고 야구 선수 출신인 그는 대입 직전에 부상을 당했고 아들의 장래를 걱정한 어머니가 무용과 입학을 추천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건달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장르가 없는 연기자라고 하지만 뮤지컬에 대한 당신의 애정은 각별하다. 뮤지컬이 당신에게 주는 매력은 무엇인가?
휴식처이며 재충전의 장이다. 나에게 파워를 주기도 하고.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이것 또한 캐릭터에 가려진 당신의 진짜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드라마 <주몽>에서 해모수가 주몽에게 “너를 보면 나를 닮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 역시 연기자 아버지를 둔 아들이다. ‘누구의 아들’로 산 나처럼 ‘누구의 딸’로 살아야 할 아이의 아픔이나 삶이 보여 마음이 짠하고 대견스럽다.
당신의 강한 인상 때문에 악역을 많이 한 배우로 인식하더라. 그런데 이번 해모수를 통해 카리스마 있는 얼굴이 되었다. 당신의 얼굴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는가?
평소 거울을 보지 않는다. 이빨 닦고 세수할 때만 거울을 보는데 ‘오늘 얼굴이 부었네’ 하는 정도다. 배우로서 얼굴을 말하자면, 배우는 도화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 감독, 작품이 컬러를 입혀야 하지 않는가? 의도적으로 내가 색깔을 입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없다. 배우는 무대가 부르면 어디든지 가야 하니까.
선배한테 아주 깍듯한 후배로 알고 있다. 달라진 환경에서 보면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많을 것 같다. 그리고 출연한 후배들(특히 주인공)의 칭찬에도 전혀 인색하지 않다.
<올인>을 찍을 때 병헌이는 아주 예뻤다. 현장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후배지만 멋있고 기특하다. 그때 그는 정말 열심히 했다. 내가 ‘거울 공주’라고 놀렸는데 나중에는 거울도 보지 않고 캐릭터에 몰입하더라. <주몽>에서 송일국도 마찬가지다. 진중하고 아주 열심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열심히 하는 후배는 나한테는 마냥 예쁠 수밖에 없다. 축구나 야구 등 스포츠 스타들 중에는 기본기 없는 선수는 없지만 이쪽 분야에는 기본기도 없이 스타가 되는 경우가 많아 개인적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당신 인생의 롤 모델은 누구인가?
배우로서는 아버지 허장강, 살아가는 모습으로는 안성기 선배다.
한동안 네티즌 사이에 일본 기자 회견장에서 보여준 당신의 행동이 ‘멋있다’고 화제가 됐다. 즉흥적인 것치고는 아주 순발력 있는 행동이었다. 돌이켜보니 지금 ‘해모수’의 캐릭터와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싶다(그가 제작한 <갬블러> 일본 공연 당시, 양국은 독도 문제로 아주 시끄러웠다. 사전 약속과 달리 독도 문제를 언급한 기자에게 다가가 그는 그가 쥐고 있는 볼펜을 뺏은 걸로 답변을 대신했다).
짜증이 났는데… 그냥 했다. 말로 설명하기도 그렇지 않은가? 그 짧은 시간 안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었고. 정확한 답변을 하려면 나에게도 그에 걸맞은 역사적인 자료와 문헌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냥 그에게 다가가 펜을 빼앗았다. ‘네 물건 뺏긴 기분이 어떠니’라는 마음이었다. 순간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곧바로 질의응답으로 들어갔다. 어느 매체의 기자가 질문했는지도 모르겠다. 초청한 주최 측은 안절부절못했다. 일본에서 어떻게 보도됐는지도 모르겠다. 그 기자회견을 끝내고 다음 공연 때문에 곧바로 다른 지방으로 이동했으니까.
해모수의 영웅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유화 부인과의 순정적인 사랑도 화제였다. 20년을 뛰어넘은 단 한 번의 사랑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글쎄, 순정적인 스타일인 것 같지만 최근에는 개인적으로 사랑에 별 관심이 없다.
당신에게 연기란 무엇인가?
모르겠다. 무대 데뷔 20년, 방송 데뷔 13년이 되어가지만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 10년이 지나면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기본에 충실하자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워킹, 호흡 등등….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 정도? 내가 연기를 하는 데 있어 분명한 한 가지는 내 연기의 매너리즘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역을 만날 때마다 내 말투로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익숙한 내 말투로 캐릭터를 빚어 넣으면 연기하는 그 순간에는 편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내 본래의 말투에 따라서 캐릭터가 바뀌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뮤지컬 <갬블러> 이후 절감했고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를 하면서 확신을 가졌다. 받아든 대본 안에서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본에 충실하지만 지문은 잘 보지 않는다. 지문에는 함정이 많다. 지문이란 현장에서 감독에 의해서 바뀔 수도 있고 지문에 충실하려고 해도 상황과 현실이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해모수의 첫 장면, 활을 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문대로 해보니 어색해서 내가 제안을 했다. 화살 통을 바닥에 던져놓고 던지는 것이 더 현실감이 있었다.
그는 지금 현실이 해법처럼 제시하는 행복과 성공의 키워드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행복한 이기주의자’라든가 ‘멋지게 거절하고 단호하게 행복해져라’는 방법, ‘좋은 인맥이 사람을 부른다’라는 처세술이 인정받는 세상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아는 행복한 비결이‘스스로 삭이고 또 삭이는 법’이듯 그는 굽이굽이 돌아서 오르는 정상의 길을 선택했다. 세태를 거스르는 바보일지라도 세상을 아는 현자의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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