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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권하는 사회

넋두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시일야방성대곡의 운을 띤 각혈 토하는 기고문도 아니다. 각설하고, 이건 나의 잡지계 후배들에게 권하는 일종의 협조문이다.<br><br> [2006년 8월호]

UpdatedOn July 18, 2006

희한한 아니, 통탄할 일이다.
후배들 중 그 누구도 편집장으로 사는 것에 대한 희열이나 편집장이 되기 위한 무용담(?)을 묻지 않는다. 또한 장래 희망을 묻는 말에 ‘편집장’이라고 천진하게 답하는 후배를 마주한 기억이 거의 없다. 혹 경쟁이 치열할까 해서 꼬리를 못내 감추고 있는 걸까? 이런 흐뭇한 상상을 해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이는 역시 헛꿈이다. 가끔 이런 말을 하는 후배도 있다. 잡지에 입문할 무렵에는 편집장의 꿈이 있었으나 연차가 쌓일수록 늘어나는 업무량을 보니 의욕이 감퇴된다고 말하는. ‘당신을 봐도 마찬가지다’ 라는. 썩 이치에 안 맞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보여준 편집장으로서의 모습이 ‘바쁘겠다, 피곤하겠다, 참 할 일도 많구나, 골치 좀 아프겠다.’ 이 네 가지 정도라면 난 정말 접싯물에 코라도 박아야 한다. 어찌 됐든 한 부서의 수장인데, 누구보다 미래의 롤모델이 되어야 마땅한 선배인데, 부끄럽기가 한이 없다.
심장에서 땀이 나고 위액이 거꾸로 솟구치는 이 마감의 한가운데, 가로·세로 반경 1.5m인 내 책상을 필두로 하여 죽 늘어선 열한 명 기자들의 책상과 그 위에 정렬된 반듯한 얼굴들을 찬찬히 훑어내린다. 이 중 과연 누가 미래의 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인가? 저토록 치열하게 일하고 책임감에 불타며 의욕과 의지가 충천한 후배들인데, 10년 후 잡지판에 남아 독자들과 소통하고 정보를 조율하며 특유의 감수성으로 매체에 색을 입힐 자 누구인가?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 이들 중 누가 이 질곡의 마감과 질족의 경쟁에서 진득한 영혼과 강인한 체력을 무기-내가 이렇다는 말은 아니다. 앞으로 후배들이 감내할 세월을 상상하니 그렇다는 말이다-로 시간을 휘어잡을 것인가 말이다.
많은 후배들이 잡지를 떠났다. 좀 더 넓은 세계에서 학문을 득하겠다며, 많은 돈을 벌어보겠다며, 마감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며, 이래저래 한평생 쉬엄쉬엄 일해도 지금만큼은 벌겠다며,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쉬고 싶다는 천만 가지의 이유로 말이다. 혹은 많은 후배들이 몸담았던 매체를 떠나 철새처럼 옮겨다닌다. 그 이유는 뻔하다. 화려한 업무와 소박한 일상의 간극이 실로 엄청나다고 느끼는 이중의 박탈감 때문이다.

나는 안다.
우리가 잡지를 얼마나 제대로, 그리고 잘 만들고 있는지를.
나는 안다.
후배들이 이 훌륭한 콘텐츠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체력·물질의 과소비를 감내하는지를.

과장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패션지 본고장인 유럽의 편집진들은 <아레나> 한국판 에디션에 경의를 표한다. 발빠르고 꼼꼼한 정보 수집 능력과 세계적인 패션지를 앞서기 시작했다는 비주얼 전개 능력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Surprise! Unbelievable!’이라는 단어를 연발하게 만들고 나도 이에 대한 자긍심이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그들이 놀라는 가장 큰 이유는 그네들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에디터들의 숫자와 진정 한 달 만에 한 권을-그들은 보통 3개월 이상의 시간에  한 호를 준비한다고 하더라- 만들어내는 한국 에디터들의 믿을 수 없는 뚝심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여기까지 토해내고 나니 또 다시 머리채를 흔들게 된다. 후배들에게 세계적 수준의 잡지를 만들어내라며 억센 채찍질에 가속력을 더하는 편집장의 업무엔 충실하면서 ‘복합마데카솔’같은 부드러운 치유력을 널리 펼치는 폼나는 업무엔 그 언제나 충실하게 되려는가.
하지만 알아야 할 게 있다. 나의 10여 년 전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기자 타이틀을 달고 입사를 하면 질 낮은 누런 모조지, 그 두툼한 원고지 한 다발이 위풍당당한 전리품의 폼새를 하고 책상에 놓여 있었다. 간단한 인터뷰는 셔터 기능만 제대로 살아 있는 조악한 전자동 카메라와 35mm 필름 2롤을 하사받은 후 사진촬영과 취재를 동시에 진행하곤 했다. 거대 신문사의 잡지 편집부였는데도 말이다. 잡지의 레이아웃은 사진과 원고를 미세하게 잘라 접착력이 강한 3M 스프레이로 연결하는 수작업이었으며 대지에 오탈자라도 생기면 에디터들은 데스크 몰래 모음과 자음을 이어붙이는 콜라주 작업에 몰두했음은 물론이다. PC, 전문 포토그래퍼, 매킨토시를 이용한 레이아웃 작업이라는 기본 반찬이 취재의 장에 놓여진 건 한참 후의 일이다. 리처드 아베돈, 패트릭 드마슐리에, 피터 린드버그 등 패션 사진가의 이름은 알 리 만무했고 칼 라거펠트, 톰 포드라는 디자이너라든지 프라다, 구찌, 폴 스미스, 비비안 웨스트우드, 이런 브랜드 역시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가 입성하지도, 라이선스 패션지가 론칭하지도 않은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10년 만에 우리가 이렇게 변해 있다. <아레나>뿐만 아니라 그 유명하다는 라이선스 패션지 한국판들이 서점 진열대를 점령했을 뿐 아니라 그 어느 나라의 에디션보다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단 10년 만에 말이다. 그러니 후배들아, 앞으로의 10년이 그 어떤 포상을 내릴지 함부로 속단하지 말지어다. 하물며 우리는 잡지라는 매체와는 찰떡궁합인 낭만화류의 피를 타고 난 족속이 아니던가. 지난 10년의 대업 완수를 위해 나의 선배들은 그 굳건한 등을 내주었으며 나와 나의 동료들은 이로운 잡지를 널리 알리겠다는 포교정신으로 그 등을 밟고 올라섰다. 앞으로의 10년은 나의 등을 밟고 우뚝 설 후배들의 몫이다. 일차적으로는 좀 더 많은 대한의 독자들이 잡지의 위대함을 깨닫도록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좀 더 많은 에디터들이 수려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물리적인 파워를 키워야 할 것이다. 할 수 있다. 확신한다.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디 있겠나.
이를 위해 독자들에게도 부탁 하나 하련다. 주위에 아직도 잡지의 효용성을 모르는 지인들이 있을 것이다. 포교하시라. 우리는 많이 팔아야, 독자들은 많이 읽어야 서로 널리 이롭다. 잡지의 파워가 커지면 커질수록(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잡지 마니아가 되는 것) 독자들은 질 좋은 서비스의 맹공을 받게 될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P.S 넋두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시일야방성대곡의 운을 띤 각혈 토하는 기고문도 아니다. 각설하고, 이건 나의 잡지계 후배들에게 권하는 일종의 협조문이다.
후배여, 후배여!
선배가 후배의 미래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후배 역시 선배의 미래다.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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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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