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작가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문장과 이미지를 유산으로 남긴 이국인들. 이를테면 카프카나 카뮈 같은 단어들 말이다. 그들의 그림자가 메이크업실을 부유하다 오연서가 웃음을 멈추자 사라지곤 했다. 오연서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검정 스타킹과 작은 스니커즈를 착용하고 소파에 기대 앉았다. 우리는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들과 앞으로 출연할 드라마에 대해서. 그런 건 좀 뻔한 질문과 뻔한 대답들이 만들어내는 인사다. 우리는 처음 만났고, 어색한 시간을 그런 질문들로 풀어 나갔다. 하지만 궁금했다. 작품이 끝나면 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약속이 없는 날에는 어떤 음악을 듣고 무슨 영화를 보는지. 그녀의 취미를 알면 그녀와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했다.
오연서는 다른 여자들과 달랐다. 배우 특유의 도도함, 고지식함, 털털함과 우아함을 꾸며내지 않았다. 그녀는 솔직했다. 자신의 뚜렷한 취향을 갖고, 그 세계 안에 머물렀다. 그게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완벽한 왕국을 건설하며, 그 안에 머물고자 하는 것. 그래서 오연서는 타인에게 화내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그녀는 자신만의 왕국에서 살고 있고, 타인의 일은 왕국 밖의 일이니까. 그런 오연서가 좋아진 건 그녀의 취향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민소매 상의는 칼이석태, 가터벨트 프린트 스타킹은 월포드, 앵클 샌들은 올세인츠, 쇼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만화광 오연서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좋아해요. 남자들보다 더 좋아하죠. 이를테면 <원피스>나 <블리치> 이런 건 꾸준히 보고, 홀로 만화방에도 자주 가요. 활동할 때도 모자랑 후드 티셔츠를 푹 쓰고 가죠.”
오연서는 내가 본 오타쿠 중에서 가장 예뻤다. 오타쿠가 아름다움의 동의어처럼 느껴졌다. “그런 편이에요. 사실 피겨도 모으고 싶은데, 아직 부모님과 함께 살아서 못 모으고 있어요. 서른에 독립하면 본격적으로 컬렉션을 시작해야죠. 부모님만 아니라 친구들도 이상하게 봐요. 그래도 좋아하는 만화가 너무 많아요. 작가 중에는 우라사와 나오키를 좋아해요. <몬스터>는 정말 좋아요. 그는 천재 같아요.”
우리는 덕후처럼 대화를 나눴다. 무엇인지 알지만 해볼 수 없던 것. 용기가 없어서 못했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코스프레였다. 그녀가 코스프레에 관련된 포스팅을 종종 읽는다는 게 더 이상 놀랍지 않았다. 그녀는 코스프레를 직접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고스로리’ 콘셉트. 분홍색 옷을 입은 롤리타가 아니라 고스족처럼 분장한 롤리타 말이다. 오연서의 취향은 소년에 가까웠다. 소녀가 소년의 취향을 가졌다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매력이다.
검은색 미니 원피스는 필립플레인, 초록 샌들은 아쿠아주라
by 라꼴렉씨옹 제품.
추리소설 읽는 여자
눈이 반짝였다. 오연서는 집중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했다. 입에서 나온 말은 추리소설이었다. 그녀는 만화보다 추리소설을 더 많이 읽는다. 소설은 오직 추리소설만 읽고, 주로 일본 추리소설을 읽는다. 그녀가 모은 추리소설은 약 1백 권 정도. 그녀는 방 안에 누워 책에 심취한다. 추리소설의 장점은 한 번 손에 들면 끝까지 읽게 된다는 것. 그런 취미가 그녀를 보호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울과 슬픈 사건들을 겪을 때, 우리는 어디로 도피할까? 대부분은 술이겠지만, 그녀는 아니다. 기쁠 때에만 술을 마신다. 대신 추리소설과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본다.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고, 집중하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특정한 장르만 편식하다 보면 그 장르의 캐릭터에 심취하게 된다. 그리고 롤모델로 삼거나, 행동이나 의식을 따라 하기도 한다. 오연서는 탐정과 고고학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내게 탐정을 권하며, 자신이 조수를 하겠다고 했다. 기뻤다.
오연서의 성
그녀의 세계를 이루는 실체들. 만화책, 애니메이션 파일, 추리소설 등. 이것들은 만질 수 있는 실체로서 오연서의 방에 존재한다. 그녀에게 방은 그녀를 보호해줄 수 있는 안식처이자 도피처다.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 굳건한 왕국처럼.
“일주일 동안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때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편의점도 안 가요. 누워서 보고 싶은 미국 드라마 전 시즌을 봐요.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해요. 최근에는 <왕좌의 게임>을 봤어요. 물론 픽션이지만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더 재밌게 볼 수 있어요.”
어른이 됐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생활이 바빠지면 스스로 성찰할 시간이 줄어든다. 몸이 피곤하면 여유가 없다. 몸과 머리 모두 휴식이 필요하다. 브릿팝과 우울한 음악을 즐겨 듣던 시기가 지났다. 가만히 앉아서 지나가는 시간을 바라만 볼 수 없는 나이가 됐다. 그렇게 쌓이는 스트레스는 그녀만의 왕국에서 그녀만의 방식으로 해소된다.
이상적인 남자
B급 영화의 캐릭터,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남자. 그녀는 그런 남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자신과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남자. 적시적소 가벼운 농담을 할 만큼 감각 있는 남자. 그녀가 만나고 싶은 남자다. 하지만 그녀 주변에는 없다. “우리나라는 B급이라는 개념이 없지 않나요? 저예산 영화는 있지만 B급 코드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기에는 수요나 공급이 부족하죠. 일본이나 미국은 그런 장르 영화가 있지만, 우리는 소수의 덕후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녀는 경이롭다고 했다. 건담을 모으거나 신발만 모으는 남자들을 멋있다고 했다. 함께 피겨를 모으고, 만화를 보고, 미국 드라마를 챙겨 볼 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런 남자들은 자신의 집착도 이해해줄 거라 믿었다.
▲트렌치코트와 민소매 상의는 모두 앤 드뮐미스터, 밴드 스타킹은 월포드, 앵클 샌들은 올세인츠, 쇼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인디아나 존스와 희열
“고고학자를 꿈꾸기도 했어요.” 오연서는 어려서 <인디아나 존스>와 <내셔널 트레져>를 보며, 모험을 상상했다. 내성적이고 혼자 있길 좋아했던 그녀의 꿈은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마치 제임스 본드처럼. 니키타처럼 싸움을 잘하고, 똑똑한 모습에서 희열을 느낀다. 그녀는 공상을 자주 한다. 누워서 천장에 액션 배우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녀는 발차기를 잘할 것 같았다.
다리가 길고, 아름다운 허벅지와 종아리를 지녔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맡은 역할들은 도도한 여주인공이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배우 오연서를 어려워한다. 하지만 실제 그녀는 농담을 잘 받아치고, 자주 웃는다.
“화를 잘 안 내고, 삐지지도 않아요. 근데 사람이 삐질 일이란 게 있나요?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저를 이해 못해요.” 기대하는 사람만이 실망한다. 기대가 없으면 아쉬움도 없다. 보상받고자 하는 게 없으니까. “감정이든, 무엇이든 남에게 주면 받을 생각을 안 해요. 그냥 줄 뿐이죠. 저는 친해지기까지 오래 걸려요. 쾌활해서 스스럼없이 어울려요. 사람들은 성격 털털하고 좋다고 하죠.
하지만 친한 친구가 되기까지는 오래 걸려요. 제가 마음이 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거든요.”
Editor: 조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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