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돈 벌자고 하는 일은 아니다만 현실의 제구력이 칼날 같아 꿈만 가지고 글을 쓰면 삼진을 당할 뿐이다.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도 하루키 책이 나오면 최소한 기십만 부 팔려 나간다.
옆 나라 ‘니뽕’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 <色彩を持たない 多崎つくると、彼の巡禮の年>, 단지 한가할 때 읽어 젖히는 기능을 가진(본질적으로는) 한 편의 ‘소설’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선 ‘색채를 띠지 않은(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쯤으로 번역될 예정이다. 다자키 쓰쿠루가 대체 누군지, 색채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어째서 순례인지 순대인지 하는 해를 보내는지 내용을 추측할 수 없다. ‘그의 순례의 해’라는 문장은 조사 ‘의’가 두 음절에 겹치면서 모양 빠지는 데다, 유난히 긴 제목을 싫어하는 독자들의 관심은 못 끌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빌어먹을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인 것이다. 이번 소설 제목조차 독특하게 느껴지고 저 긴 제목은 자동으로 외워져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에서 이 소설은 기록적으로 팔려 나가는 추세다. 6일 만에 1백만 부를 돌파했다니 <1Q84>의 판매 속도 기록을 뛰어넘는 대형 홈런을 또 때린 것이다. 판매량이 작품의 질을 연대보증 서주는 건 아니다만, 확실한 강타자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무서워라. 이 아저씨 좀체 맛 가지도, 맛 갈 예정도 없는 것 같아.
이 소설이 번역 출간되면 우리나라에서도 아마 기록적으로 팔리겠지. 엄청난 고정 독자의 힘으로 <1Q84>에 이은 연타석 홈런이 될 것이다. 단순 비교하긴 좀 겸연쩍지만 한국문학은 지지리 외면받고 고사 위기인데 왜 하루키 책만 이토록 열심히 사 젖히는 걸까. 자동 판매 흑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걸까. 으음, 멀리 갈 것 없이 20년 하루키 애독자인 나 자신에게 질문해본다. 왜지?
‘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알 게 뭐야.’(<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마지막 문장)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실망스럽다. 담배나 술이나 게임처럼 하루키에 중독된 게 분명하다. 좋게 보면 행복한 마니아고 나쁘게 보면 노예 같다. 하루키가 사람들을 사로잡은 요인에 대해 말하자면 일단 재미가 우선일 테다. 책이란 걸 읽지 않게 생긴 내 하우스메이트도 딱 하루키 책만 페이지를 아껴가며 읽는다. 너도 이렇게 재미있게 좀 쓰란 말이야, 지랄하면서. 또한 하루키는 독자들마다 읽고 생각할 수 있는 부채꼴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에게서 도회적이며 시니컬한 분위기, 쩌는 묘사력, 절제 있는 인물들, 쿨한 자세와 심플 라이프 지향, 상처를 입었으나 다시 상처받지 않으려는 태도, 삶에 대한 사유의 파도, 은근히 꼴리는 에로티시즘 등을 높게 산다.
물론 그중에서 ‘은꼴’이 가장 좋다. (아이 부끄러워라.) 그의 소설은 남녀 출연진의 ‘팥팥팥’ 행위가 은근히 잦거나, 결정적일 때 나오고, 색다른 정서와 맥락을 가진 섹스 신을 세련되고 정제된 묘사로 다뤄 울긋불긋하다. 수없는 예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최근 걸로 <1Q84>에서 덴고와 후카에리의 그 정사 장면! 말도 마라. 내 야설 차트 부동의 1위에 올라 있다. 그건 정말 야릇한 흥분을 자아내어 손발과 ‘거기’ 끝을 저리게 했다. (후카에리가 10대니까 ‘아청법’에 걸리는 상상인가?) 이봐, 진지하게 하는 얘기는 아니라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지 그래.
사실상 하루키가 인기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여성의 심리와 말투를 정말 잘 묘사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잠> 같은 책이 대표적인 여주인공 1인칭 시점인데, 읽다 보면 여자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하루키에게서 상당 부분 가르침 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책의 주 구매층인 여자들이 공감의 지갑을 열기 쉬운 것 아닐까. 아무튼 그 점도 그의 작품이 가진 수많은 매력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고, 독자마다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매력 포인트가 참 다양하다는 게 그의 탁월한 점인 것이다.
하루키의 데뷔작을 읽고 전율하면서 내 문학의 엔진에 시동을 땡기던 1993년 가을이 부릉부릉 떠오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시를 쓰고 싶었고 시밖에 모르는 바보였는데(습작 실력은 떡잎부터 노랬고) 하루키 때문에 소설로 전향하리라 결심했고, 이렇게 소설가가 되었다. 데뷔작부터 그 이후의 책 세 권 정도를 읽고 감동한 나머지 그를 따라쟁이 하겠다고 했을 때 근엄한 동료 문학도들은 만류했다. 하루키 따위를 롤모델 삼아? 너도 뭔가 있는 척하고 멋 부리는 껍데기가 되고 싶어? 넌 시대와 정면으로 소통하지 않고 도망가려는 거지. 하루키는 일종의 유행일 뿐이야 하면서.
어휴, 근시안들 아니었을까. 이렇게 오래가는 유행 봤니. 처음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그를 롤모델 삼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다. 극복하면서 성장해가는 모델은 몸매가 완전 예술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 롤모델을 좀체 따라 하기 힘든 것이다. 일단 그는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나는 노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마라톤으로 자신의 인내심을 단련하던데 나는 러닝머신 10분 달리다 퍼진다. 하루키가 초기작들을 주로 외국에서 생활하며 썼길래 나도 무작정 기어나갔지만 생활비가 없어서 조낸 아르바이트만 하다 왔다.
그는 재즈 바를 경영했고 자세히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말아먹지는 않은 것 같다. 반면 나는 집 기둥뿌리를 과감히 뽑아(아, 가엾은 우리 아버지!) 삼겹살집을 차렸다 쫄딱 망했다. 그는 재즈 바 한구석에 앉아 우아하게 데뷔작을 썼고 나는 유통기한 지난 삼겹살을 쓰레기통에 처넣으며 처절하게 등단작을 써야 했다. 뭐 이렇게 따라 하기 힘든 롤모델이 다 있어. 잘못 택한 것 같아 가랑이 찢어진 뱁새가 된 기분이다. 물론 정작 따라 해야 하는 건 작가의 일상과 개인사가 아니라 자신에게 관대하지 않은 자세와, 고리타분할 만큼 자신과 한 규칙과 약속을 지키려는 태도와, 멋진 작품을 꾸준히 써내는 에너지 등등 아니겠나. 사실 하루키와 나 같은 듣보잡 작가를 잠깐이나마 비교하는 글을 쓰는 걸 하루키 팬인 엄마가 아실까봐 몹시 두렵다.
여하간 ‘넘사벽’ 하루키에 대한 얘기로 이 원고를 다 채울 수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작가로서 박탈감도 크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책이 오라지게 안 팔리는 추세인 지 오래다. 책 말고 관심을 끄는 매체들이 범람해 찬밥 취급인 데다 책 읽는 습관을 기르지 않는 사회 분위기로 봐선 장기 불황 내지는 ‘폭망 스멜’까지 풍기고 있다. 그러니 작가들은 아주 그냥 줄줄이 헛스윙이다. 불황은 좀체 실투가 없다. 몇 년을 고생해서 책 한 권 써내봤자 귀신같이 안 팔린다. 문학이 돈 벌자고 하는 일은 아니다만 현실의 제구력이 칼날 같아 꿈만 가지고 글을 쓰려면 루킹 삼진을 당할 뿐이다.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도 하루키 책이 나오면 최소한 기십만 부 팔려 나간다. 그러니 출판사들이 서로 내겠다고 입찰 경쟁에 매달리는 것 아니겠나.
이렇게 책이 안 팔리는 나라에서, 특히나 문학 작품이 미세 먼지만큼의 파이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하루키 책만큼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떡하니 홈런을 치니 괴물 타자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혼자 그렇게 잘 치나, 우린 다 바보인 건가, 박탈감이 먼저 밀려들 수밖에 없지만 다르게 보면 시원하기도 하다. 그래, 날려버려.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줘버려. 우어어! 하고 응원하게 된다. 이런 하루키를 보면 어떤 야구 용어가 떠오른다. ‘잘놈잘’. 야구팬이라면 얼추 아는 이 은어는 ‘야구는 원래 잘하는 놈이 잘해’의 준말이다. 나는 현대 야구의 명이론으로 치부한다. 야구를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이유가 야구로 현상을 바라볼 때 들어맞을 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는 그 ‘잘놈잘’ 이론을 문학에서 훌륭히 입증하는 존재다. 한국문학은 반대되는 야구 이론을 입증하고 있다.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간혹 초판이 쭉쭉 팔리는 책이 있는데 오랜만에 오르가슴을 느낀 출판사가 막 책을 더 찍어내봤자 결국 플라이 아웃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요즘은 ‘스크린셀러(영화나 드라마의 원작으로 주목받는 책)’밖에는 안 팔리니 그저 밥이나 먹고살려면 위대한 영상 문명에 굽실거려야 할 지경이다. 그런데 하루키는 맞는 순간 넘어갈 걸 직감할 수 있다고 할 만한 타구만 계속 날리면서 그 비루한 자괴감을 해소해준다. 이번 책도 일본의 리뷰를 살펴보니 반응이 핫식스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대략의 줄거리를 떠들진 못하겠다만 독자들의 졸음을 해소할 타우린이 풍부한 작품을 낸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는 ‘스크린셀러’ 공식을 따르지도 않는다. 따를 이유가 없다. 그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노르웨이의 숲>을 이름난 감독이 영화화했지만 나는 보면서 하품을 너무 많이 해 한동안 양악이 쓰라렸다.
<토니 다키타니>란 영화도 동명의 하루키 소설이 베이스라던데 신체의 배배 꼬임을 견디지 못해 포기했다. 영화의 잘못이 아니라 내 영화 감상 수준의 문제겠지만(‘액숀’이 안 나오잖아 액숀이!) 여기서 한 가지 포인트를 발견했다. 그는 콧대 높은 영상 문명에 발가락만큼도 굽실거린 적 없으며, 영상 문법으로 치환되기 아주 힘든 텍스트만의 매혹을 너무나 훌륭히 부여잡고 있다는 점이다.
시류에 편승하거나, 다양한 매체로 멀티를 까지 않고 텍스트만의 문명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이 미친 듯이 팔리는 양상을 긍정적으로 본다. 한국 땅에서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된 독자들이 그만큼 발굴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잘 쓰면 된다. 그런데 잘하기 위해 한 가지만 더 우는 소릴 하자면 야구 해설가 허구연 아저씨가 입술만 달싹거려도 거론하는 인프라 문제다. 한국 작가들은 제대로 된 야구장 하나 없이 야구 하는 기분이다. 작품 세계(플레이)를 펼칠 수 없거나 위험한 필드, 그 저변이 되는 독자(관중)층을 확보할 수 없는 스탠드, 연봉(원고료), 팜 육성(신진 작가 지원) 그런 것 없이 뛰는 거다.
그 와중에도 류현진처럼 잘하는 선수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시스템이 옳은 건 아니다. 돔 구장보다 문학 구장 같은 게 여러 개 있어야 한다. 일본 문학에서 괜찮은 작가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그 나라에 좋은 야구장이 많아서기도 하지만 문화적 인프라의 차이가 크다고 본다. 원고료만 해도 우리나라의 세 배 정도 되더만. 글 써서 가늘게라도 먹고살아야 하루키 급의 타자가 나올 확률이 높아질 것 아닌가. 물론 우울한 얘기다. 우리나라 출판사 뒤뜰에서 유전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책이 안 팔리는데 뭔 돈이 있겠어.
하루키는 이제 세계적 문호로 등극할 기세다. 초기 하루키의 글을 보고 동양 고수의 무공을 기대했건만 햄버거를 하나 먹은 기분이라고 서구의 평론가들이 비판했다지만 전 세계로 번역되어 판매와 주목의 흑마법을 시전하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그를 보면 소설가도 참 괜찮은 직업이니 열심히 쓰자는 생각이 들며 기운이 난다.
나오지도 않은 신간에 대해 떠들려니 영 두서가 없었지만 맺는말이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팬인 하루키는 진구 구장 외야에서 타구가 날아가는 걸 보며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이 훗날 엄청난 강타자가 될 걸 그때 예감한 건지도 모르겠다. 시장과 평단의 찬사를 골고루 받은 작품들을 줄줄이 토해낸 그는 이미 문학 리그 최강의 홈런왕이다. 아직 안 나온 이번 소설이 <1Q84>에 이은 연타석 홈런이 될지 안타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가 타석에 서면 항상 기대가 된다.
지금 우리 팀(한국문학)이 못해도 누군가 야구(문학)를 잘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나는 야구팬이니까. 메이저리그의 류현진과 다르빗슈를 응원하는 것처럼 야구와 문학의 건재함을 위해 하루키를 계속 응원하기로 했다. 아울러 독자님들께 은근슬쩍 부탁하건대 한국문학도 좀 응원해주십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대호나 추신수처럼 나가서 홈런을 때릴 역량을 갖춘 잘생긴 시인과 소설가들이 엄청 많아요. 그러니 부디 관심 좀.
이런! 내가 이 깔끔한 매거진에 ‘기승전구걸’을 하다니. 상당히 덥고 부끄럽군. 아, 맥주 없나.
EDITOR: 이우성
WORDS: 박상(소설가)
ILLUSTRATION: 이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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