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이 말이 제 신조어입니다.
저는 사람도 물건도 검박하고 겸손한 면모를 좋아합니다.
72살 할머니의 유튜브 채널 <밀라논나>에는 MZ 세대는 물론 길을 묻는 나그네가 많이 모인다. 사람들은 그녀의 녹슬지 않은 패션 센스와 인테리어에 감탄하고 따뜻한 어른의 마음이 담긴 이야기에 위안을 얻는다. 이탈리아어로 ‘친구’를 뜻하는 아미치(Amici)라 불리는 구독자는 94만 명이 넘었다.
‘밀라논나’ 장명숙은 1978년 밀라노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1986년 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의상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유명 백화점 패션 담당 바이어, 무대의상 디자이너, 교수로 활약하며 페라가모, 막스마라 등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를 한국에 안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밀라노(Milano)와 이탈리아어로 ‘할머니’를 뜻하는 논나(Nonna)를 합친 의미의 유튜브 채널 <밀라논나>를 2019년부터 운영 중이다.
지난 9월 25일 에세이집 <오롯이 내 인생이잖아요>(김영사) 출간을 기념해 열린 북 토크쇼에는 독자 200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산뜻하고 유쾌한 할머니’ 장명숙의 따뜻한 지혜와 진한 여운이 함께한 그날의 현장을 Q&A로 재구성했다.
밀라논나의 요즘
이번에 출간한 책 제목이 <오롯이 내 인생이잖아요>입니다. 무슨 의미가 담겨 있나요?
나만 생각하며 내 마음대로 살자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며 살자’는 뜻이에요. 남이 나를 위로하거나 인정하지 않아도, 사랑하지 않더라도 오롯이 온전한 내 인생이니 나를 중심에 두고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아야겠지요. 내가 없어지면 온 우주가 멸망하잖아요.
어느덧 유튜브 채널 구독자가 100만을 향해 가고 있어요.
할머니가 나오는 채널에 이렇게 관심과 사랑을 주다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요.(웃음) 유튜브 영상 댓글을 보고 있으면 구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애정이 느껴져요. 내가 먼저 겪은 경험을 이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도움이 될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시간을 내어 저를 보는 사람들의 시간을 아깝게 하면 안 되잖아요. 그 소중한 시간이 좋은 경험으로 남길 바라요.
멋지게 나이 듦
“제가 지금껏 살며 도전한 모든 것에서 결실을 거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 주어진 이 삶에서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다고는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도전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해보기 전까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일흔이 넘은 지금도 제 남은 인생에서 또 어떤 도전을 마주할지 설렙니다.” -<오롯이 내 인생이잖아요>에서
사람들이 논나님을 보면서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 거 같아요. 좋은 어른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은 저에게도 도전이기도 해요. 과거에는 내 앞에 길을 물을 어른이 없었어요. 밀라노 유학도 처음이고, 첫 자갈밭을 매는 분위기였죠. 힘들다고 하면 그만두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지만 꿈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일이 재밌었어요. 이 세상에 완벽한 어른은 없습니다. 내가 보는 어른들의 장점만 뽑아 퍼즐처럼 모아 나만의 것을 만드세요.
나이가 들수록 꼰대가 돼가는지 아랫사람과 어울리는 게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세대 간의 갈등을 만들지 말고 풀어야 해요. 결국은 존중과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은 수평 관계예요.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죠. 수평으로 바라보면 갈등도 줄고 친밀감도 깊어져요. 모든 것은 자세에서 나와요.
행복한 노년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잖아요. 자신의 노년기를 스스로 책임지며 살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경제와 건강, 정서의 자립은 노후의 밑바탕입니다. 100세 시대 노후는 생각보다 길고 예상보다 돈이 많이 필요합니다. 의식주를 독립적으로 해결하려면 절약할 수밖에 없지요. 균형 잡힌 삶도 중요해요. 돈이 많아도 같이 밥 한 끼 먹을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다면 행복할까요? 유럽에서는 은퇴한 사람들이 가족과 여행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어요. 다양한 취미 생활 또한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요. 겁먹지 마세요. 맞닥뜨려야 느낄 수 있는 생생한 행복이 곳곳에 숨겨져 있으니 보물찾기를 하듯 부딪쳐보자고요.
논나님처럼 나를 사랑하는 긍정적 시각을 갖고 싶어요.
나를 멋지다고 생각해보세요. 자신을 들볶지 말고 자기 한계를 긍정할 때 자존감은 회복됩니다. ‘이렇게 해야 해’라는 기준에 발목 잡히지 마세요. 나이가 들수록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편안함이 있어야 해요. 세상에 나는 하나뿐이잖아요. 내가 살아온 날을 나는 기억해줘야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하루를 최대한 정성껏 살아요. 내 삶을 극진히 대우하는 시간이 모이면 내 가치가 더 소중해지고 빛나지 않을까요?
다스리기
“제 아버지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껏 살면서 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요. 이것은 제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나이 들수록 가슴에 새록새록 새기는 교훈입니다.” -<오롯이 내 인생이잖아요>에서
요즘 뉴스를 보면 우리 사회는 어느새 분노 사회가 돼가고 있는 것 같아요. 화가 날 땐 어떻게 하세요?
화는 아기 같아서 달래고 보살펴야 해요. 저는 제가 화가 났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속 분노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제 감각이 변하는 것을 느껴봐요. 화라는 촛불이 횃불로 커져 잔학성을 드러내지 않게 주의하지요. 화가 날 때는 걷기 편한 신발을 찾아 신고 밖으로 나가 걷습니다. 걷다 보면 분노로 씩씩거리던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지요. 걸음 수가 늘어날수록 호흡과 감정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요. 분노는 마음속을 전쟁터로 만들고, 평정심은 마음속을 풀밭으로 만들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걸으면서 마음을 평평하게 만드는 연습을 합니다.
나이 들수록 싸우지 않는 것도, 싸움도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이면 싸울 수밖에요.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이 언쟁한 대상은 남편이었어요. 언어라는 게 참으로 묘합니다. 격앙돼 감정적 단어를 내뱉으면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지요. 나이 들고 나선 젊을 때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완전히 끊을 관계가 아니라면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와도 가능한 한 나의 내면 상태부터 점검한 후 전열을 가다듬고 상대를 대하는 게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려면 내 약점을 건드려도 발끈하지 않을 인내심을 키워야겠지요. 느긋하게 한발 물러서서 상대에게 시간을 주세요. 기다리면 상대방도 누그러져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더군요.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야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때론 나의 위로가 보잘것없어 초라할 때가 있어요.
나이가 들어 상담사 역할을 자주 하다 보니 깨닫는 것이 있어요. 누군가가 근심할 때 답을 주려고 조바심을 내면 도리어 부질없는 말만 하게 된다는 것을요. 요즘은 누가 제게 조언을 구하면 제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조언해주려 노력합니다. 암담한 상황에 놓였다면 가만히 어깨를 내주고 울게 내버려둡니다. “괜찮아. 나아질 거야. 힘내.” 이런 말은 하지 않아요. 듣는 이의 입장에서 숨통을 더 막는 소리니까요.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봐주는 것. 그것이 더 효과적인 위로일 때가 있습니다.
나는 잘 살고 있나 가끔 회의감이 들기도 해요. 다른 친구들은 다 잘나가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기준을 내 안에 둬야 해요. 친구는 친구의 길을 가면 되고,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돼요. 각자의 길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 돌체앤가바나의 도미니코 돌체랑 같은 학교에서 함께 공부했어요. 돌체가 패션쇼를 하고 승승장구할 때 저는 둘째를 낳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죠. 각자의 길이 다 달라요. 나의 때가 올 수도, 안 올 수도 있어요. 그래도 오늘 이렇게 숨 쉬고 밥 먹고 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 잘 챙겨 먹으면 즐거운 인생 아니에요?
생각하기
“어떤 삶에도 햇빛이 닿으면 그늘지는 부분이 생기잖아요. 그늘을 끌어안아야 삶이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 비로소 인생과 연애하는 느낌이랄까요.” -<오롯이 내 인생이잖아요>에서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면서도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50년 전엔 커리어 우먼도 없고 워킹맘도 없고 여자의 자아실현은 상상이 안 됐죠. 엄마, 아내, 딸, 며느리 등 여러 역할을 하면서도 내 안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았어요. 한 번뿐인 오롯이 내 인생인데 내 꿈이 사그라지지 않더라고요. 꿈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버리지 말아요. 내가 간절하면 우주가 이뤄준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내 꿈을 붙드세요.
불안을 이기는 방법이 있을까요? 불안이 선택 앞에서 주저하게 만듭니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신중한 태도와 머뭇거리는 태도는 다르지요. 그런데 완벽한 선택이 있을까요? 10년 뒤에도 완벽한 선택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완벽한’이라는 단어가 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완벽한을 ‘충분히 좋은’이라는 말로 대체해보세요. 충분히 숙고하고 “이 정도면 됐어. 충분히 좋은 선택이야”라고요. 완벽한 결정은 없어요. 잘못된 결정도 역경도 인생의 일부입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다음에 만회할 기회가 있음을 믿어보세요. 다음 기회가 없었다면 세상의 모든 위인전은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논나님도 외로움을 느끼시나요?
외롭지 않은 인간은 없어요. 그저 스스로 견딜 뿐이죠. 저는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랐어요. 어머니의 사랑 결핍이 저를 자극할 때마다 정서적 허기를 느껴요. 헛헛함이 저를 덮치면 그걸 관조하려 노력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이면 특히 외롭다고 느끼는지, 그 상황이 내게 주는 좌절감이 무엇인지 가만히 느껴보는 거죠. 그리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 합니다. 내 감정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허기를 견딜 수 있더라고요. 요즘도 여전히 외로움을 느끼지만, 그것에 압도되지는 않아요. 외로운 감정이 슬며시 올라오면 운동, 독서, 산책 등을 하면서 나와 놀아줘요.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일 테니까요.
직장은 선택해 들어가도 직장 내 사람은 선택할 수 없잖아요.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순 없어요. 내게 등을 돌리는 사람 중에는 딱히 미워하는 이유가 없을 수도 있어요. 황당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반드시 이유가 있나요? 미움도 똑같아요. 타인의 감정에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수렁에 빠지고 맙니다.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오랜 시간 사람을 겪어보니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손을 내밀수록 내 마음만 힘들어지더라고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내 인생에서 과감히 지우세요. 모든 이유를 내게서 찾으며 자신을 괴롭히면 안 돼요.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부자가 성공의 잣대가 되기도 하죠. 제가 생각하는 성공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고 스스로 떳떳할 수 있으면 만족스러운 삶이죠.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젠지 궁금해요.
저는 늘 행복해요. 매일 무조건 행복하기로 결심했거든요. 행복은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거예요. 행복할 게 얼마나 많아요. 이른 아침 따뜻한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그 순간도 즐겨요. 눈뜰 때부터 유쾌하려고 노력하죠. 스스로 유쾌 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 잘 놀아야 해요.
살다 보면 지치고 힘에 부칠 때가 있어요.
저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되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해요. 자신을 너무 혹독하게 다루면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할 수밖에 없어요. 나와 놀 에너지는 남겨둬야죠. 에너지와 사랑이 남아 있어야 가족을 비롯해 주변 사람에게 나눠줄 사랑이 나와요. 나를 사랑하고 달래주고 놀아주는 힘, 그것이 나를 더 빛나게 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삶을 관조하세요. <밀라논나> 제작자 경신 씨에게도 자주 하는 이야기예요. 나를 객관적으로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해요. 살아보니 인생은 마라톤이에요. 눈앞의 이익, 성과에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는 걸 저는 45살이 돼 깨달았어요. 그걸 알고는 좀 더 일찍 관조하며 일하고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죠. 인생을 달리는 기차라고 보면 나라는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 내 마음에 안 드는 승객이 탔다고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잖아요. 그 손님이 내릴 때 ‘잘 가세요’ 보내주고, 내 마음에 드는 승객을 또 태우면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