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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아름답게, 이일화

배우 이일화는 애써 세월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나아가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을 해내고, 비워 있는 것을 채우고, 조금씩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며 여전히 아름답게.

On November 01, 2024

오랜만의 화보 촬영이었어요. 감정과 몸의 움직임을 담는 영상과 달리 순간을 담는 사진 촬영은 배우로서 또 다른 즐거움일 것 같아요.
낯설기도 하고 일탈의 기분이 들기도 해요. 좋은 결과물을 위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지만 이런 식의 일탈 과정이 즐거워요. 물론 점점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긴 하지만 이 또한 재미있고요. 무엇보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예전에는 몸매 관리를 이유로 운동을 엄청 열심히 했어요. 탄츠플레이부터 골프, PT, 테니스까지 정말 다양한 운동을 섭렵했죠. 그렇게 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고, 허리 디스크가 안 좋아져 KBS2 드라마 <신사와 아가씨> 촬영 때는 치료하느라 얼굴이 부었어요. 그 뒤로는 컨디션을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운동하고 있어요. <우먼센스>와의 커버 촬영은 드라마 <미녀와 순정남> 활동 기간의 마지막 스케줄이기도 해요. 그래서 더 의미 있었고, 끝나고 나니 홀가분하기도 하더라고요. 커버 촬영을 준비하느라 간헐적 단식을 하며 식단 조절에도 신경 썼는데, 촬영을 마치고서는 김밥도 먹고, 늦은 밤에 케이크도 먹었어요.

보통 한 작품을 마치고 나면 어떻게 일상을 보내나요?
이번에는 회사 식구들과 여행을 다녀올 거예요. 그다음엔 많은 것을 배우며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원래는 고요한 걸 좋아하는 편이어서 뭔가 역동적인 활동을 하지 않다 보니 스트레스가 잘 풀리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드럼을 배워보려고 해요. 몇 년 전부터 해보고 싶었는데 막상 시간이 충분치 않아 배우지 못했죠. 오카리나도 배워볼 생각이에요. 언젠가 오카리나로 찬양을 하고 싶어요.

작품에 쏟은 에너지가 배움으로 옮겨가는 것 같아요.
연기하는 시간이 정말 좋아요. 무대 위에 있거나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엄청 행복하고요. 나이가 들수록 일의 소중함이 더 깊이 느껴져요. 그렇게 에너지를 쏟아 작품을 마치고 나면 쉬는 시간도 소중하죠. 동시에 다음 작품을 갈망하게 돼요. 연기하지 않는 시간 동안 뭔가를 배우면서 이 역시 작품을 위한 준비라고 여겨요. 예전에 취미로 댄스 스포츠를 배운 적 있어요. 그랬더니 그다음에 댄스 스포츠 강사 역할이 들어오더라고요. 목표한 바 가 있어서 배운 건 아니지만 자연스레 흐름이 이어졌어요. 연기하지 않는 동안 뭔가를 배운다는 건 쉬어 가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기를 위한 준비 과정이기도 해요. 나를 단련하는 거죠. 그것이 휴식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고, 다음 연기를 위한 비축이기도 해요.

연기 말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뭘까요?
여행이에요. 열심히 사는 이유 중에 하나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 또 하나는 여행을 위해서예요. 언젠가 여행과 관련된 예능도 해보고 싶어요.

여행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요?
연기가 극 중 새로운 인물이 돼 살아가는 것이라면, 여행은 낯선 어딘가에서 삶을 살아보는 일이에요. 살아보지 않았던 곳에서 느끼는 생동감, 그런 곳에서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즐거워요. 삶이 곧 여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삶이 영원할 것처럼 욕심부리고 안주하기보다는 제 삶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여행을 가는 것 같기도 해요. 짐을 싸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면 마음을 눌러왔던 것을 비워오기도 하고, 더 이상 쓰지 않을 물건은 여행지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하고 버리고 오기도 해요.

재킷 파비아나 필리피, 귀고리 마이미

작품을 통해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이별하기까지의 과정이 행복해요.
삶과 죽음을 계속 맞이하는 기분이에요.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나의 성숙한 면과 부족한 면을 지켜볼 수 있죠.

 

그런 점에서 연기와 여행이 닮은 것 같기도 해요. 작품을 하는 동안 새로운 인물이 됐다가 끝나면 그 인물과 이별하는 것처럼 여행도 새로운 여행지를 만나고 다시 떠나오니까요. 맞아요. 새로운 것을 채우고 다시 비워내는 이 작업이 좋아요. 저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좋아해요.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 죽음을 기억하는 건 전혀 부정적인 일이 아니에요. 매번 새로운 출발을 감사할 수 있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삶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돼주죠. 언젠가 <죽은 자의 집 청소>를 읽고 나서 누군가의 삶을 정리하는 직업이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물론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지만, 저 역시 언젠가 아이와 영원히 이별해야 하고 그날을 위해 잘 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통해 만나는 캐릭터도 마찬가지여서 한 작품이 끝나면깨끗하게 비워내고 다시 백지장처럼 순수하고 맑아진 상태로 돌아와야 해요. 그래야 다시 누군가를 새롭게 담아낼 수 있죠.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나요?
지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딸이 어렸을 때 <배비장전> 해외 공연을 함께 다녔던 거예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딸이 매니저 노릇을 해냈고, 갈아입을 옷도 달려와서 챙겨줬죠.

딸과 함께 여행을 자주 다니나요?
아쉽게도 딸이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자주 다니지 못했어요. 대신 제가 엄마와 여행을 자주 다니려고 노력해요. 내년이나 내후년에 엄마를 모시고 알래스카로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려고 해요. 제가 그런 소망이 있는 것처럼 언젠가 제 딸도 저와 여행 다니는 걸 바랐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 마음이 좀 더 일찍 든다면 좋겠고요.(웃음)

배우로서 오랫동안 이루고 싶었던 꿈이나 이미 이룬 꿈이 있나요?
막상 이룬 꿈이 무엇인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좀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한 질문 같아요. 다만 전 늘 이렇게 생각해요. ‘아니할지라도 감사하라.’ 지금 저에게 주어진 이 시간들에 감사하려고 노력하죠. 새벽에 종종 촬영장에 갈 때면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분들이 보여요. 그런 분들이 있는 새벽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지죠. 스스로에게도 칭찬을 많이 하고 하루하루 감사하게 보내려고 해요. 특별한 꿈에 대한 감사라기보다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감사죠.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K-드라마가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만큼 언젠가 선배님들이 이룬 그 기적처럼 세계 무대에서 수상 소감을 발표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는 거예요. 꿈은 충분히 크게 가져도 되니까요. 사실 <우먼센스> 촬영장에서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잡지 커버 촬영을 하 는 것도 오랜 꿈이었어요.(웃음) 연기를 시작한 지 34년쯤 됐는데, 오늘에서야 그 꿈을 이뤘네요.

요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뭔가요?
<고백의 언어들>이라는 책이요. <CBS 성서학당>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 김기성 목사님이 늘 강연을 준비하셨어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불릴 만큼 박학다식한 분이죠.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힐링이 되기도 하고, 프로그램을 통해 저 스스로 많이 변화하고 성장하고 회복도 됐어요. 그러다 일정상 그만두게 됐는데 그렇게 인연을 맺은 목사님이 보내주신 책이 <고백의 언어들>이에요. <미녀와 순정남> 촬영을 마치고 읽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많이 정화됐어요. 최근 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도 마음이 많이 움직였고요. 주인공이 보내는 지루하리만큼 평범한 일상을 그대로 따르고 싶어졌죠.

나이가 든다는 건 여성으로서 많은 신체적 변화를 겪는 일이기도 해요. 건강하게 세월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것이 있다면요?
40대까지는 나이 드는 것이 불안하고 초조했어요. 그런데 주름 같은 세월의 흔적은 제 힘으론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더라고요. 나이 들지 않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을 하기보다 세월의 흔적을 훈장처럼 여기기로 했어요. 시간을 겸허히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더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게 됐고, 나이 드는 만큼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고요. 대신 아름답게 나이 들기 위해 노력해요. 8개월간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도 운동을 놓은 적 없고, 목주름과 팔뚝 살 관리를 위해 자기 전에 꼭 홈트도 하고, 간헐적 단식도 하죠.

 

올리베토 실크 드레스 막스마라

한 가지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람의 마음이란 게 한결같을 순 없을 텐데, 지금까지 연기해오며 마음이 침잠해버릴 때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해요.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에요. 예전에는 그런 저 자신에 대해 잘 몰랐어요. 그리고 그런 감정 기복이 배우로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돼주었어요. 현장에서 모니터링을 하다 보면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예전에는 그럴 때마다 움츠러들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저 자신에게 관대해지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카메라 앞에서 자유로워지더라고요. 감정 기복이 있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때론 실수를 하더라도 인정하고. 다만 앞으로도 계속 초심을 지키며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처럼 잘해내려고 해요. 잘못한 것 같으면 금세 인정하고 “미안해요. 다시 해볼게요”라고 툴툴 털고 다시 시작하는 거죠.

슬럼프의 시간을 마주할 때면 어떻게 이겨내는 편인가요?
나 자신을 정갈하게 만들기 위해 산과 나무를 보러 가요.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을 때면 산에 가거나 숲속 카페를 찾죠. 남한산성에 가면 장작불을 피우고 앉아 쉴 수 있는 카페가 있어요. 때론 나무와 교류하는 시간을 가져요. 제가 출연한 영화 <천화>에 나무를 안으며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단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처럼 나무를 안으며 마음을 나누는 거죠.

감정 기복을 다스려야 하고, 때론 슬럼프의 시간을 지나는 배우로서의 삶이 왜 즐거운 걸까요?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는 제 딸을 위해 연기했던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도 그렇지만 연극할 때는 고달프고 힘들고 많이 다치기도 해서 배우라는 직업이 극한 직업같이 느껴졌어요. 물론 무대에서 흐트러짐 없이 연기하고 무사히 공연을 마치고 나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긴 했죠. 언젠가 나이가 아주 많이 든 다음에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작품을 통해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이별하기까지의 과정이 행복해요. 삶과 죽음을 계속 맞이하는 기분이에요.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나의 성숙한 면과 부족한 면을 지켜볼 수 있죠. 한 번 뿐인 인생 안에서 수없이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이 특별하게 느껴져요. 직업이었던 배우가 이제는 제 삶이 돼버렸죠.

많은 작품을 했음에도 여전히 보여주고 싶은 배우 이일화의 면면이 있다면요?
전 정말 다양한 캐릭터를 해낼 수 있어요. 여전히 보여드리지 못한 면이 많고요. 다만 선택받아야 역할을 할 수 있기에 모든 걸 다 할 수 는 없죠.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 들어가기 전 신원호 감독님을 만났을 때도 감독님이 “이렇게 ‘조용한 집사님’ 같은 분이 극 중 캐릭터를 잘할 수 있을까”라며 불안해했어요. 그런데 첫 촬영에서 바로 좋아해줬어요. 몇 년 전에 연극 <미저리>를 보러 갔을 때는 그 작품이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다 정말 캐스팅됐고 연기하다가 손가락 골절까지 겪었지만 연출가가 첫 공연부터 이렇게 빠르게 인물을 찾아가는 배우는 처음 봤다며 엄청 만족스러워했죠.

믿기지 않지만 벌써 한 해가 끝나가고 있어요. 1년 가까이 촬영한 작품이 끝났는데 그럼 올해는 어떤 한 해로 남을까요?
조금 아쉬워요. <미녀와 순정남> 속 캐릭터가 지난 작품과 겹치는 부분도 있었고, 연기로서 날개를 활짝 펼치지 못한 것 같기도 해요. 아쉬움이 남은 만큼 다음 작품까지 있을 공백기 동안 더 많은 것으로 저 자신을 채우려고 해요. 더 다양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우리 모두의 삶에는 기복이 있고, 그럼에도 한 걸음 더 나아갈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조금씩 성장할 수 있겠죠.

CREDIT INFO
에디터
송정은(패션), 박민(인터뷰)
2024년 11월호
2024년 11월호
에디터
송정은(패션), 박민(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