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30년 넘게 하면 고수나 장인이 된다는데 연기는 그렇지 않다.
보여줄 카드가 많으면 좋겠지만 30여 년 연기하다 보면 카드가 몇 개 안 남는다.
그래서 해가 가면 갈수록 고민이 많다.
설경구가 30여 년 만에 출연한 시리즈물로 ‘대박’을 터트렸다. “넷플릭스 클래식 K-정치 드라마의 등장”이라는 평가와 함께 압도하는 연기 역시 찬사 일색이다.
<돌풍>은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사이의 대결을 그린다. 극 중 설경구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단단함과 이를 지키기 위해 어떤 행동도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폭주하는 ‘박동호’로 분해 새로운 결의 연기를 선보인다. 상대역은 김희애다. 연기 고수들이 펼치는 연기 앙상블 역시 관전 포인트다. 특히 박경수 작가의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다. 박 작가는 SBS 드라마 <추적자 THE CHASER> <황금의 제국> <펀치> 등 ‘권력 3부작’으로 호평을 얻은 바 있다.
<돌풍>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영화 <보통의 가족>을 촬영하고 있을 때 김희애 씨가 옆에서 <돌풍>에 대한 얘기를 하더라. 시나리오가 들어와서 읽었는데 재미있으니 같이 해보자며 일단 한번 읽어보라는 거다. 읽어보니 이야기에 힘이 있더라. 시나리오가 쭉쭉 읽히고 재미있었다. 이번 작품에 대해 ‘섹시하다’, ‘멋지다’라는 댓글도 많다.
극 중 캐릭터의 행동이 거침없어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물불 안 가리고 명언 날리는 캐릭터다. 나는 단지 시나리오에 집중했을 뿐이다. 주어진 것만이라도 잘 소화하자 싶었다.
상대역이 김희애 배우다. 호흡은 어땠나?
김희애 씨는 올해 연기 경력 42년 차인 걸로 안다. 나와 나이는 같지만, 연기 경력은 10년 선배다. 진짜 열심히 한다. 아마 그동안 쭉 그렇게 작업했을 것이다. 대본을 ‘외운다’는 표현보다 완전히 숙지해 입에 착 붙어서 온다. 또한 현장 상황이 어떻든 누가 보든 상황이 어수선해도 개의치 않고 혼자 몰입해 연습한다. 집중력이 대단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이 42년 동안 김희애로 사는 이유가 있구나’ 싶더라. 방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드라마가 반전의 연속이었다. 인상 깊었던 박동호의 전략은 무엇인가?
‘선을 넘는 자에게 한계는 없다.’ 그게 이 사람의 전략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보다 더 악.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을 꼭 잡아야 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했고, 방법은 권력밖에 없었다. 그래서 불법도 저지르고 나랏돈도 막 쓴다. 한계란 없었다. 그게 박동호의 전략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악역이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이 이 캐릭터에 이입하고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조직 생활을 하면 다들 지쳐 있지 않나. 어떻게 보면 판타지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조직에서 저렇게 불법을 저지르고 선을 넘으면 바로 응징당하는 게 현실인데, 이 사람은 갈 때까지 간다. 그런 모습에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 나 역시 공감을 안 했다면 출연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감이 안 되면 대사가 입에 붙지도 않는다. 다만 캐릭터가 움직임이 적다 보니 연기할 때 힘든 부분도 있었다.
극 중 국무총리에서 결국 대통령이 된다. 실제로 연상케 하는 인물은 없었나?
그런 생각을 했으면 연기하는 데 불편했을 것 같다. 전혀 연상되는 인물이 없다고 생각해서 자유롭게 연기했다. 단지 판타지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 있는 인물처럼 연기하려고 노력했다.
김용완 감독이 설경구 배우에 대해 “수줍고 소탈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예전보다는 뻔뻔스러워졌다. 예전에는 눈도 잘 못 마주쳤다. 배우들 중에는 의외로 내성적인 사람이 많다. 김희애 씨도 나와 비슷하다. 둘 다 MBTI도 극I다. 아마도 연기로 내재돼 있는 걸 푸는 것 같다. 숨어 있다가 소심하게 말이다.(웃음)
대사량이 어마어마하다.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사고’라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책 외우듯이 못 외운다. 그래서 대본을 받는 순간부터 작은 소리로 계속 중얼거리며 외운다. 심지어 이번 대사는 평소에 쓰는 말도 아니었다. 전혀 안 쓰는 말인지라 더 많이 중얼거리며 읽었던 것 같다. 김희애 씨는 방대한 양의 대사를 많이 접해서인지 잘 외우더라. 놀라운 배우다.
최근 전도연 배우가 출연했던 연극 <벚꽃동산>을 보러 간 모습도 포착됐다. 연극에 대한 생각은 없나?
사실 얼마 전에도 연극 제의가 들어왔다. 그런데 대극장 무대라 결국 고사했다. “한 편 해야지”라고 내뱉는 순간 책임을 져야 해서 조심스럽다. 얼마 전에 전도연 배우 작품을 보러 갔는데 눈이 번쩍 뜨이더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출연한 (박)해수랑 (전)도연이 부럽더라. 정말 잘하고, 정말 재미있더라.
오랜 시간 좋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슬럼프나 번아웃이 온 적은 없었나?
매번 슬럼프고 고비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연기가 힘들더라. 안 했던 역할들이 와주면 감사한데, 그렇지 않으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뭔가를 30년 넘게 하면 고수나 장인이 된다는데 연기는 그렇지 않다. 그에 대한 고민이 많다. 그래서 해가 가면 갈수록 괴롭더라. 보여줄 카드가 많으면 좋겠지만 30여 년 연기하다 보면 카드가 몇 개 안 남는다. 예전에 영화 <박하사탕>을 생각해보면, 못 보던 놈이 튀어나와 그런 연기를 하니 그 자체로 얼마나 신선한가. 이제 그걸 기대하기 힘들다는 걸 알아서 매번 슬럼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