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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th, 여성을 위한 인생 노트]

선수가 아닌 심판으로, 오현정의 자신감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마음이 갔던 어떤 ‘글귀’ 하나쯤은 가슴에 담고 있지 않나요? 단어나 문장, 노래 가사나 시 구절, 누군가의 명언이거나 어록, 자신이 만들어낸 말이어도 괜찮습니다. 평범하거나 평범하지 않은 우리 주변의 모든 여성을 지금 이 자리에 있도록 도와주고, 이끌어주고, 살게 해주고, 완성시켜준 우리 마음속의 소중한 노트를 지금 공유합니다.

On August 05, 2024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이 문장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교 때였다고 오현정 심판은 말한다. 지금까지 지켜온 자신의 신념과 너무 닮아 그 후로 쭉 마음에 새기게 됐다는 그녀. 찾아보니 프랑스 출신의 정치가이자 작가인 앙드레 말로가 한 말이었고, 알고 보니 이미 너무 유명한 명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이 명언의 존재를 늦게 알았을 뿐, 저는 이미 그 말을 아주 오래전부터 실천하고 있었으니까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에서 강한 총기가 느껴졌다.

축구부의 홍일점

처음 축구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재학 중이던 학교 운동장에서 훈련 중인 축구부 선수들을 보고 공을 함께 차고 싶었던 그녀는 용감하게 축구부에 입단한다. 여자 선수는 당연히 그녀뿐. 또래 친구들과 가만히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것보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땀을 흘리는 게 훨씬 좋았다고 말하는 오현정 심판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여자 축구부가 있는 곳으로 진학한다. “제 꿈은 모두가 당연하듯 국가대표 그리고 월드컵 출전이었어요. 당시 미국의 미아 햄이라는 여자 축구 선수의 팬이었는데 월드컵에서 꼭 그녀처럼 뛰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무릎 부상을 당했죠. 부상 기간이 길어지자 운동하지 못하는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선수 생활을 그만뒀죠. 돌이켜보면 그 기간을 좋은 경험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지만, 당시 전 욕심도 많았고 아직 어렸던 것 같아요.”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운동장에서 여전히 훈련 중인 친구들을 보면 다시 축구가 하고 싶어질까 봐 일부러 후문 쪽으로 돌아갔다는 오현정 심판. 이후 그녀는 엘리트 선수가 아닌 일반 학생으로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처음 해보는 평범한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며 이제 무엇이든 잘해낼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은 그녀. 당시만 해도 자신이 필드를 뛰어다니는 축구 심판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심판을 시작한 건 정말 우연이었어요. 방학 기간 중 전국 초등학교 축구대회가 열렸는데, 축구 선수 출신인 제게 심판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약 일주일간 열리는 대회였고, 가벼운 마음으로 첫 경기에 들어갔는데, 경기 중 심판을 할 때마다 팀 감독의 항의가 굉장했어요. ‘이게 무슨 파울이야’, ‘여자가 무슨 축구를 알아’ 등의 말을 듣다 보니 부아가 치밀었죠. 그리고 그때 결심했어요. ‘아, 내가 심판을 제대로 해봐야겠다’라고.”

선수가 아닌 심판 오현정

오현정 심판은 자신에게는 오직 축구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제 선수가 아닌 심판이 돼 어쩌면 선수보다 더 열심히 필드를 뛰어다니는 그녀는 2023 시즌부터 대한민국 축구의 2부 리그 명칭인 K리그2 주심을 맡게 됐다.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을 묻자 고민도 없이 FIFA 여자 월드컵 결승전 심판을 보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오현정 심판. 앞서 말했던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문장이 결국 월드컵으로 귀결되는 그녀의 긴 축구 인생을 대변하는 듯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여자축구 결승전에서 제가 심판을 맡았어요. 대한민국 여자축구팀은 동메달에 그쳤지만, 결승전에서나마 우리나라 심판이 경기를 이끄는 모습을 보니 큰 위로가 됐다는 말을 감독님과 선수들에게 들었습니다. 뭉클한 마음과 함께 제자리에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제가 여전히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이 일을 잘하고 싶은 건 말할 것도 없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마치 자신의 이름처럼 몸과 마음에 새기고 있다는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문장과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또 하나의 문장을 귀띔하는 오현정 심판. “작가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꾸미는 여자보다 꿈 있는 여자가 아름답다’는 말을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지금 심판을 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 변화를 추구하고, 나중에 은퇴한 후에도 절대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축구가 너무 좋아 남자들 사이에서도 공을 찼듯, 내가 하고 싶고 바란다면 모든 걸 견뎌내고 마침내 해낼 자신이 있거든요. 그러니 저처럼 모든 여성이 꿈꾸는 삶을 살아가길 기원하고 또 응원하겠습니다.”

CREDIT INFO
에디터
이설희, 박민(프리랜서)
사진
김정선, 게티이미지뱅크, 비애비홈 제공
2024년 08월호
2024년 08월호
에디터
이설희, 박민(프리랜서)
사진
김정선, 게티이미지뱅크, 비애비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