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제62회를 맞이한 밀라노 가구 박람회는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충만했다. 먼저 이번 박람회는 예전처럼 클래식과 디자인 가구라는 이분법적 스타일을 중심으로 나누지 않은 것이 가장 큰 특징. 주방&욕실 특별관을 포함해 사무용 가구를 선보이는 ‘워크플레이스(Workplace) 3.0’, 가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솔루션을 제안하는 턴키 프로젝트에 적합한 ‘S. 프로젝트(S. Project)’, 35세 미만의 신진 디자이너들을 위한 ‘살로네 사텔리테(Salone Satellite)’로 운영됐다.
지난 4월 16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된 이번 박람회에서 사흘은 로 박람회장에서 새로운 브랜드 탐색에 집중하고, 이틀은 쇼룸과 야외 전시를 보는 데 시간을 안배했다. 밀라노 가구 박람회 기간에는 로 박람회장뿐만 아니라 밀라노 도시 전체가 한마디로 디자인 축제의 장이 된다. 리빙 제품을 판매하는 쇼룸은 물론이고 일반 백화점에서도 디스플레이가 바뀌고, 패션 분야에서도 다양한 전시 기획으로 디자인 축제를 함께 즐기는 모습이 연출된다. 유학생 시절 밀라노 페어 기간에 두오모 성당 근처 폴 스미스 쇼룸에 방문했다가 현장에서 폴 스미스를 우연히 만나기도 했을 정도(그때 찍은 사진을 싸이월드에 저장했는데, 복구가 되지 않아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속상하다).
이번 박람회에서는 한국 브랜드 제품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 공예 작가들의 작품과 전시도 밀라노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올해 밀라노 페어 한국인 방문객 수가 세계에서 13번째로 많았다고 하니, 디자인에 대해 높아진 한국인의 열정과 K-컬처에 대한 관심도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자리임이 분명했다.
빠르게 진행되는 가구 기능의 대중화
로 박람회장에서 만난 신제품에서 느낀 놀라움은 가구 기능의 대중화였다. 예전에는 고가의 주방 가구 브랜드에서만 볼 수 있었던 포켓 도어가 이번 박람회에선 다양한 브랜드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백화점 리빙 코너에 온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조명이 삽입된 선반장도 LPM, 유리, 대리석, 금속 등 다양한 재료로 믹스매치된 것이 추세. 고객의 취향에 맞춰 가구 선택의 폭 또한 좀 더 넓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이런 시도들이 가능했던 건 어떠한 무거운 자재도 거뜬히 감내하는 튼튼한 하드웨어와 제품에 대한 연구 개발을 지속하고, 각 브랜드가 고객의 만족도를 끊임없이 반영한 결과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봤다.
또한 여러 브랜드에서 아웃도어용 가구를 선보였는데, 다양한 컬러와 재료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기존보다 훨씬 넓어져 인도어용 가구와 매치하거나, 실내에서 써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강렬한 컬러 대비와 믹스매치 소재의 향연
이번에도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듯 내추럴한 톤의 컬러가 강세였지만, 달라진 점은 베이지색은 줄어들고 보색 대비로 톤앤무드가 강렬한 색조와 결합을 하고 있다는 것. 특히 사랑스러운 색감의 파우더 핑크, 식욕을 돋우는 듯 주황에 가까운 연어색, 피렌체 지붕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테라코타와 황토색(ochre) 등이 올해 많이 보인 컬러. 여러 브랜드에서 비슷한 컬러를 각기 다르게 활용하는 것을 보는 재미가 남달랐다.
마감재 특징으로는 나무·대리석·금속·유리 소재와 같이 한 가지 재료보다는 믹스매치를 통해 다양한 재료를 함께 쓰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점. 도자기같이 매끈한 질감도 유리나 판넬에서 일부 보였지만, 대부분의 부스에서는 돌을 거칠게 표면 처리해 광이 거의 없거나 유리도 오돌토돌하게 마감했다. 실루엣이 100% 선명하게 비치는 게 아니라 불투명하게, 때로는 왜곡되게 반사하는 효과로 보는 재미와 함께 어떻게 구현되는 건지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박람회의 진짜 묘미, 브랜드별 장외 전시
국내에도 소개된 적 있는 브랜드는 박람회장보다는 쇼룸을 예약하고 방문하는 걸 추천한다. 우선 박람회장에 워낙 많은 인파가 몰려 사진 찍기 쉽지 않고, 상담도 어려운 것이 사실. 장외 전시장으로 이동하며 지나가는 길에 관심 있는 브랜드 쇼룸이 있다면 한국에 있는 담당자를 통해 미리 연락해두는 것도 박람회 관람의 팁. 나는 불탑과 제시, 콜러, 무토에 예약을 하고 방문했는데, 오랜 시간 기다리지 않으면서 신제품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함께 시원한 음료도 즐길 수 있어 바쁜 일정에 쉼표가 됐다.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와 협업한 시그너처 키친 스윗 쇼룸은 방문한 날 기준으로 1시간 넘게 기다려야 신제품을 볼 수 있었다. 두오모 성당 뒤편에는 삼성전자가 크게 쓰여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두오모 복원 공사에 메인 스폰서로 우리나라의 회사가 참여하고 있다는 내용이라 반가웠다. 그다음 날 삼성전자에서 밀라노 페어 기간에 준비한 전시를 보러 가려 했으나, 주위에서 웨이팅 맛집이라며 말린 탓에 들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밀라노 최고 멋쟁이 할머니로 유명한 로자나 올란디 갤러리에서는 예술감독 최주연 스페이스비이 대표의 지휘 아래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최하는 <사유의 두께(Thoughts on Thickness)>라는 전시가 열렸다. 공간도 멋있고 작가들의 작품도 훌륭했지만, 커피 맛에 익숙한 유럽인들에게 한국의 차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함께 준비돼 현장 참여율이 매우 높았다는 평.
새로운 영감과 자극의 현장에서 미래를 그리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되돌려 밀라노로 다시 갈 수 있다면 피에르 리소니 사무실에 또 가보고 싶다. 약속을 따로 잡고 간 것도 아니었는데 박람회 기간 스튜디오를 오픈해줘 대표 집무실은 물론 건축팀, 일러스트팀, 산업디자인팀 그리고 모형제작팀까지 어떻게 프로젝트를 하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살펴볼 수 있어 더없는 영광! 사무실 투어 후에는 에스프레소까지 대접받고 카페인 충전이 돼 힘차게 다른 전시 공간을 돌아볼 수 있었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도 물론 좋았지만, 가장 부러웠던 건 반려견과 함께 근무해도 좋은 공간과 동료애가 느껴지는 분위기. 강아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처음 보는 사람들이 방문해 피곤했을 텐데, 먼저 꼬리 치며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집에 두고 온 반려견이 생각나 잠시 울컥했지만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저절로 힐링이 되는 순간으로 기억된다. 내년 밀라노 가구 박람회는 조명 전시를 중심으로 2025년 4월 8일부터 13일까지 열린다. 디자인에 대한 세계인의 열정과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느끼고 싶다면 동참해보기를 권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권혜리
@hyeree_kwon
대혜건축 신사업개발본부 사장. 6년간 이탈리아에서 건축&가구 디자인을 공부하고, 16년째 인테리어 전문 회사 대혜건축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이끌며 맹활약 중이다. 대혜건축은 2010년부터 삼성 래미안 설계사로 등록돼 아파트 설계에 특화된 팀이 별도로 있고, 에테르노 청담 등 고급 주거 공간에 탁월한 노하우를 가진 대표 기업. 2년 전부터 유한대학교에 출강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쓰는 인테리어 전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