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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 60년 신달자 시인 위로의 언어들

오랜 연륜으로 지혜와 단단함이 느껴지는 어른의 말씀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올해로 등단 60년의 신달자 시인이 전하는 진솔한 인생 고백과 위로의 언어들.

On February 0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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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에 쓰는 반성문
“잘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 합니다”

매서운 칼바람과 함박눈이 걱정이었는데, 시인을 만나러 가는 날은 평년보다 포근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 신달자. 1964년 등단했으니 올해로 시를 쓴 지 60년이다. 한국 여성시를 개척한 선구적 시인으로 평가받는 그녀는 시뿐 아니라 수필집 <백치애인>과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가 인기를 얻으면서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등 당대 최고의 밀리언 셀러 작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23년 여든을 맞은 시인은 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 시선집 <저 거리의 암자> 등 무려 세 권의 책을 냈다.

“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은 우리에게 과연 육신은 무엇인가, 내 몸에 생겨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집 중에 ‘나의 양 떼들’이라는 시가 있는데 ‘수심이랄까 근심이랄까 상심이랄까 / 아픔과 시련과 고통과 신음과 통증들은 / 모두 나의 양 떼들이라 // 나는 이 양들을 몰고 먹이를 주는 목동 /’이라고 표현했어요. 육신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썼죠.” 시인의 말처럼 나이 든 몸의 고통을 절절하게 그려낸 동시에 앓는 몸을 보듬는 위로의 언어들로 가득하다.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는 팔순을 맞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낸 인생을 솔직하게 고백해 진한 울림을 준다. 지금까지 발표한 1,000편이 넘는 시 중 182편을 정선해 새롭게 선보인 <저 거리의 암자>는 시력 60년을 결산한 시선집이다.

“팔십 년 인생을 축소하면 ‘잘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전부”라는 노시인은 누구보다 바쁘게 보낸 2023년에 대한 고마움과 아쉬움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온전한 내 것은 시간과 마음과 기도뿐”

나이가 무색할 만큼 2023년을 무척 바쁘게 보내셨습니다.
2023년에 많은 일을 했어요. 세 권의 책을 냈고, 시 낭송회도 많이 하고, 매달 칼럼도 쓰고 또 <유심>이라는 시 전문 계간지 주간을 맡아서 잡지 두 권을 냈어요. <유심>은 1918년에 만해 한용운 선생이 창간한 잡지인데 3·1운동으로 종간됐고, 무산 스님이 2001년부터 15년 동안 발행하시다 다시 종간됐죠. 그러다 이번에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행인을 맡아 재창간했어요. 나한테 같이 하자고 제안해 제가 편집을 맡았고요. 우리나라에서 고료도 가장 후하게 주는 좋은 시 전문 잡지입니다.(웃음) 제가 유명 인사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는 코너가 있는데 유홍준 교수, 김형석 교수를 만났어요. 배우 신영균 씨 인터뷰는 이번 봄호에 실릴 예정이고요. 그분들을 만나보니 배울 점도 많고 좋더라고요. 1년에 네 번 나오는 계간지인데도 엄청 바쁘게 돌아가요. 지금 벌써 여름호 청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계절을 앞서가니 시간이 더 빨리 지나는 걸 실감하시겠어요.
시간은 늘 아쉽죠. 다시는 안 오는 게 시간이잖아요. 온전한 내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바로 시간인 거 같아요. 나를 다 알 것 같은 아내나 남편도 내 것은 아니고, 또 그 사랑으로 태어난 자식도 내 것은 아니죠. 생각해보면 온전한 내 것은 시간과 마음과 기도인 거 같아요. 그러니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흘려보낼 수도 있고 의미를 만들 수도 있죠. 마음도 나만 갖고 있으면 소용없어요. 마음을 나누고 표현해야 의미가 있고, 기도 역시 내 것이기는 하지만 나만 잘되라고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죠. 그러고 보면 내 것으로 마지막까지 남는 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죽을 때는 누구나 공평하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나 봅니다.

팔순에 낸 시집의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내가 부엌에 선 지 50년이 훨씬 넘었는데 어느 날 문득 ‘부엌은 칼, 가위, 믹서가 있고 물이 막 펄펄 끓는 무서운 곳이구나’라는 감정이 처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도 우리는 부엌에서 또 얼마나 다정하고 평화롭게 밥을 먹는가. 그래서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이에요. 우리의 삶이 다 그렇죠. 전쟁터 같지만 또 그 안에 평화가 있어요.
“누르면 불이 되는 인덕션 옆에는 뼈도 가루가 되는 믹서기가 돌지만 / 공포와 두려움은 없어요 잘 길들여져 / 평화롭게 먹고 마시는 내 부엌”(‘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중)

시집도 묵상집도 지금까지의 선생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번 시집은 우리에게 육신은 무엇인지, 육신에 대한 고통을 많이 썼어요. 정신만 아끼다가 육신이 정신을 앞지르는 나이가 되니까 쇠한 육신에게 미안했던 거죠. 또 묵상집은 팔순을 맞으면서 내 인생의 지나간 시간을 다시 생각해봤더니 잘못한 것, 감사한 것, 사랑한 것이 참 많다는 이야기를 담았어요. 내 인생에 대한 뉘우침이에요. 다음에 내가 또 시집을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한 권쯤 더 낼 수 있다면 좀 희망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나한테 진짜 소중한 것들에 대해 쓰고 싶어요.

언제 시가 선생님께 오나요? 매일매일 쓰시는 편인가요?
시간을 정해놓고 쓰지는 않아요. 어떤 경우에는 24시간 내내 쓰기도 하고, 자다가 일어나서도 뭔가 생각나면 기록해놓고 다시 자고 그럽니다. 벌떡 일어나서 기록할 때는 ‘야, 나 큰 거 하나 잡았다’ 생각하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면 아무것도 아닐 때도 있고.(웃음) 오히려 생각보다 쉽게 떠올랐는데 ‘이건 괜찮은 작품이 되겠다’ 하는 것도 있죠.

60년이나 시를 쓰셨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시는 어려운가요?
예를 들어 뜨개질 같은 걸 60년 하면 제법 잘 뜨겠죠. 그런데 시는 좀 달라요. 그래도 제법 발전하긴 하죠. 보는 눈이 생겨 남의 것은 되게 잘 봐요. 자기 것은 잘 못해도. 제가 문예창작과 교수를 오래 했기 때문에 작품을 보면 ‘이건 되겠다, 아니다’는 금방 보이죠. 어제저녁에 막내딸 부부랑 피아니스트 임윤찬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는데 그 어린 친구가 “상을 받았다고 해서 내가 피아노를 더 잘 치게 되는 건 아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열 몇 살 아이가 깨달은 거예요. 대단하지 않아요? 엄청 겸손하고 집중력이 강하더군요. 그 영화를 보면서 ‘나는 과연 저런 집중력으로 시를 써본 적이 있나’ 반성했어요.

시를 쓸 때 행복하세요?
행복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고통이죠. 시는 내 것만은 아니에요. 반드시 독자가 있기 때문에 이게 독자의 마음에 가서 닿아야 해요. 어떻게 보면 시는 상처가 상처 만나기, 기쁨이 기쁨 만나기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너무 힘들고 우울할 때 떠올리는 장면 하나가 있어요. 대형 문고에 책을 사러 가서 계산하려고 줄을 섰는데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 책을 두 권 사 가지고 줄을 서 있는 거예요. 그걸 현장에서 직접 보는 건 정말 다르더군요. ‘내가 저 여자를 위해 기도하고 정말 어려운 일이 생겨도 꾹 참고 이겨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죠. 공감이 없는 시는 의미가 없어요. 내가 쓰지만 누군가가 읽었을 때 공감이 와야 합니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소설가(小說家)’라고 하지만 시를 쓰는 이에게는 ‘시인(詩人), 사람 인’을 붙이잖아요. 그래서 시는 문학의 꽃인 겁니다.

언제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나요?
중학교 2학년 때인데, 우리 집이 시골에서 제재소도 하고 정미소도 하고 꽤 잘살았어요. 당시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돈도 명예도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게 됐는데 1일, 2일, 3일 첫마디가 똑같아요. 일기장 5권이. 그 첫마디가 “오늘도 나는 홀로 울었다”로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 일기장을 본 적이 없어요. 그 나이에 그 문장을 마주하면서 ‘사람의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이래? 아버지가 왜 혼자야? 주변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라는 생각을 했죠.

아버지가 굉장히 문학적인 분이셨네요.
맞아요. 88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 일기를 쓰셨으니까. 아버지 일기를 보고 충격받아 그때 사람 마음을 볼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죠. 그러다가 친구 중에 오빠가 국문과에 다니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 집에 가면 시집이 많았는데, 그때 빌려본 책이 김소월의 <진달래>였어요. 밤새 필사한 후 가져다주곤 했죠. 그렇게 시에 접근했다가 고등학교에 가서 백일장에 나가 1등을 하고 국문과에 진학해 시를 쓰게 된 겁니다. 어떻게 보면 별 고민 없이 그쪽으로 가게 된 거죠.

어머니, 김남조
시인과 함께.

어머니, 김남조 시인과 함께.

어머니, 김남조 시인과 함께.

“기역자도 모르던 엄마가 내
출판기념회 방명록에 글을 쓰려고
20일 동안 밤낮으로 글씨 연습을 해서
문장을 적었어요. ‘일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기뿜이다’라고요.”

“기역자도 모르던 엄마가 내 출판기념회 방명록에 글을 쓰려고 20일 동안 밤낮으로 글씨 연습을 해서 문장을 적었어요. ‘일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기뿜이다’라고요.”

“기역자도 모르던 엄마가 내 출판기념회 방명록에 글을 쓰려고 20일 동안 밤낮으로 글씨 연습을 해서 문장을 적었어요. ‘일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기뿜이다’라고요.”

“선생님은 좀 신비했어요” 고 김남조 시인과의 인연

지난해 10월 작고한 김남조 시인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으신 걸로 압니다.
1961년에 숙명여대 교수와 제자 사이로 만나 지금까지 함께했습니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이틀 전 아침에 신문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선생님 생각이 자꾸 나는 거예요. 일단 가봐야 할 거 같아서 병원에 찾아갔는데 말문은 이미 닫은 거 같더라고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선생님 손을 잡고 막 울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더라고. 말은 못 해도 누군지는 알아보시는 거 같았어요. 내 목소리를 듣고 아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선생님이 기억하는 김남조 시인은 어떤 분입니까?
저는 고등학교 때 경남백일장이라는 역사가 오래된 백일장에서 1등을 해서 숙명여대에 입학했어요. 숙명여대 교무과에 가서 시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종이에 한자로 이름을 하나 써주더라고요. ‘김(金)남(南)’까지는 알겠는데 ‘조(祚)’를 못 읽겠더라고. 학교 바로 앞 서점에 가서 이 사람 책이 있냐고 물었더니 “아, 김남조” 하더라고요. ‘김남조’라고 해서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어요. 우리 때는 명자, 숙희 뭐 그런 이름이 많을 때잖아요.

이름도 중성적이고 여성 교수가 많은 시절이 아니니 그런 오해도 무리는 아니네요.
남자인 줄 알고 선생님 첫 수업에 제일 앞에 앉아 있었어요. 그랬더니 한복 저고리를 곱게 입은 여성이 강의실로 걸어 들어오는데 바로 김남조 선생님이었죠. 선생님은 좀 신비했어요. 뭔가 밥도 안 먹을 거 같고, 일반적인 여자들과는 다를 거 같았죠. 그 신비를 깬 사건이 하나 있는데 1학년 가을 어느 날 선생님이 명동 미도파백화점에서 뭐 살게 있다고 해서 따라갔어요. 백화점 구경을 하고 그 건너편에 있는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자고 하셔서 놀랐어요. 이분도 중국 음식을 먹네? 게다가 저는 짜장면을 시켰는데 선생님은 짬뽕을 시켜서 국물까지 맛있게 드시더라고요. 그렇게 신비하게만 보이던 김남조 선생님도 그냥 우리 엄마 같은 평범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웃음) 여신처럼 신비하지만 시에 있어서만큼은 매몰찬 선생님이기도 하셨어요.

지난해 12월에도 고 김남조 시인을 위한 행사를 진행하셨죠?
성북동에 있는 무산선원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종교 화합과 동행의 의미로 스님, 신부님, 목사님, 시인들이 함께 시 낭송 음악회를 열었어요. 김남조 선생님을 추모하는 시 낭송도 했죠. 가수 최성수 씨, 배우 장미희 씨도 참석했는데 내가 사회를 봤어요. 분위기가 아주 좋았고 재미있게 잘 끝났어요. 난 살짝 무대 체질인가 봐. 사회 보는 게 너무 재밌더라고. 내가 좀 활달한 성격이라 중학생 때는 연극을 했고, 고등학생 때는 배구도 했어요. 활동적인 걸 좋아해요. 다들 나보고 돌아가신 송해 씨처럼 오래오래 사회 보라고 하더라고.(웃음) 행사 진행이나 시 잡지 만드는 거나 이런 다양한 활동이 나를 긴장시켜요. 신문을 보거나 책을 보거나 하물며 자연을 볼 때도 그냥 안 넘어가고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 고민해요. 머리가 텅 빌 때가 없으니 그게 정말 좋아요. 뭔가 열심히 산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선생님은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불교와 연관이 많으신 거 같아요.
제가 불교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어서 불교에 대해 많이 알아요. 사실 종교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가 아닐까요? ‘베풀고 나를 희생하면서 선하게 살자’. 그게 종교인 것 같아요. 또 내 생일이 사월 초파일이에요. 부처님하고 시도 같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호적에 올라간 생일은 12월 25일로 돼 있어요. 성인 생일을 2개나 가지고 있는 셈이죠. 우리 엄마는 “계집애 팔자가 세진다”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10살 때까지 꼭 절에 가서 생일밥을 먹었죠.

“남자 그거 별거 아니다. 네가 성공해야지”

세상 모든 어머니의 가장 큰 걱정은 자식 걱정이죠.
어머니에 대해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요. 어머니에 대한 시집도 있고, 아버지에 대한 시집도 있을 정도예요. 특히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정말 글감이에요. 어머니 인생도 그렇고 내 인생도 그렇고. 우리 엄마는 기역자도 모르는 분이었어요. 내가 시집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하는데, 그때는 방명록에 기록을 하던 시절이에요. 엄마가 20일 동안 밤낮으로 글씨 연습을 해서 문장을 적었어요. “일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기뿜이다”라고 쓰셨어요. 내가 가장 불행할 때 엄마가 돌아가셔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내가 교수는커녕 강사라도 된 걸 보셨다면 아마 광화문에 나가서 만세를 부르셨을 겁니다. 내가 잘되기만을 바라셨어요.

결국 어머니의 바람대로 시인도 되고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셨습니다.
고등학교 때 나를 부산으로 보내면서 차부에서 차가 떠나기 10분 전 엄마가 당부한 말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내가 살아보니 여자도 돈이 필요하다. 너는 돈도 벌어라”였어요. 우리 엄마는 사회적인 성공을 원했어요. ‘결혼해서 잘살아라’가 아니라 “남자 그거 별거 아니다. 네가 성공해야지”라는 말을 많이 하셨죠. 당신이 그렇게 못 해본 거에 대한 후회가 너무 컸던 거죠. 당시 우리 엄마의 비교 대상은 동서, 작은엄마였는데 숙모는 대구 경북여고 출신에 부잣집 딸이었어요. 남편은 국회의원이고. 사실 그것보다 더한 건 숙모는 아들 여섯에 딸 하나를 낳았는데, 우리 엄마는 딸 여섯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 거였죠. 그게 엄마한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항상 “너는 숙모보다 더 잘돼라” 하다가 나중에는 “너희 작은아버지같이 돼라”고 하셨어요.


한글도 모르던 어머니가 고등학교 때 나를 부산으로 보내면서
차부에서 차가 떠나기 10분 전 당부한 말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내가 살아보니 여자도 돈이 필요하다’였어요.
우리 엄마는 사회적인 성공을 원했어요.
‘결혼해서 잘살아라’가 아니라 ‘남자 그거 별거 아니다.
네가 성공해야지”라는 말을 많이 하셨죠.

신달자 시인은…
1943년 경남 거창 출생으로 숙명여대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했으며, 1972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재등단했다. <열애> <종이>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등 열일곱
권의 시집과 수필집 <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을
발표했다.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
서정시문학상, 만해대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신달자 시인은… 1943년 경남 거창 출생으로 숙명여대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했으며, 1972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재등단했다. <열애> <종이>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등 열일곱 권의 시집과 수필집 <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을 발표했다.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 서정시문학상, 만해대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신달자 시인은…
1943년 경남 거창 출생으로 숙명여대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했으며, 1972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재등단했다. <열애> <종이>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등 열일곱 권의 시집과 수필집 <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을 발표했다.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 서정시문학상, 만해대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어머니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었겠어요.
사실 공부는 열심히 안 했어요. 우리 엄마 교육열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셋째 딸부터 막내까지 전부 고등학교를 외지로 보냈어요. 아버지 돈을 애들 공부시키는 데 다 썼어요. 대단한 여잡니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 “그래도 니는 될 끼다”라고 하셨어요. 그런 엄마의 염원에 비하면 좀 못된 거죠.

시 쓰시는 것 외에 요즘 선생님의 관심을 끄는 건 무엇인가요?
사람 마음을 읽어내는 것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지난해 1월 1일에 노트 하나를 마련해 그날그날 내가 만난 사람에 대해 써보고 있어요. 그 사람은 이런 표정이 있고, 이런 표정일 때 이런 마음일 거 같다는 것들을 기록해요. 심리학 책도 여러 권 봤어요.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 <마음 가면> 같은. 읽으면서 사람 마음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요. 팔자 좋고 다 가진 것 같은 사람도 그 마음 안에는 우는 아이가 있어요. 상처받은 자기 자신이 있는 거죠. 나한테는 글을 쓰는 일이 내면아이와의 대화이자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미안한 사람과 고마운 사람은 누구인가요?
역시 자식인 거 같아요. 가장 미안한 게 애들이 중고등학생일 때 가장 예민한데, 그때는 시어머니도 남편도 아팠던 때라 경제적으로 어려웠어요. 그런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애들이 자칫 꿈을 잃을 뻔한 순간이 있었거든요. 애들 어렸을 때도 석박사 공부하느라 내 손이 못 미친 게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때는 삶 자체가 하나의 싸움터였어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내느라 힘들었죠. 주변 사람들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 미안하죠.

올해로 아흔을 바라본다는 망구(望九), 여든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데 있어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백세시대’라고 말하는데 사실 인간은 겨우 100년 살다 사라지는 거예요. 훨씬 더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는 자연 같은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나는 도인이 아니라서 나이가 들었다고 삶의 깨달음을 얻고 그런 건 아닌데, 젊은 시절에는 나밖에 몰랐던 게 사실이에요. 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에 대한 집착이 강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굳이 만나거나 전화하지 않아도 내가 알았던 사람들이 다 평안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잘 주무셨어요, 굿모닝, 좋은 아침” 같은 아침 인사가 참 훌륭한 인사라고 생각해요. 뻔한 것 같지만 모두의 평안을 바라는 보석 같은 말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신달자 시인은 5년 전 단독주택을 지어 딸 셋, 사위 셋, 손자 셋과 함께 살고 있다. 함께 하지만, 현관의 비밀번호조차 서로 모를 만큼 사생활이 존중되는 독립된 공간이다. 한겨울에 눈이 내리면 먼저 본 사람이 정원의 눈을 치우고, 나머지 가족들은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면 그뿐이다. 작은 집이지만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는 신달자 시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덕분에 팔십 계단에 이르러 “미안하고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희망의 언어로 채워질 노시인의 다음 시집을 기다린다.


요즘은 만나거나 전화하지 않아도 내가 알았던 사람들이
다 평안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잘 주무셨어요, 굿모닝, 좋은 아침’ 같은 아침 인사가
참 훌륭한 인사라고 생각해요.
뻔한 것 같지만 모두의 평안을 바라는 보석 같은 말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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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기획
하은정 기자
취재
박현구(프리랜서)
사진
김정선, 신달자 시인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2024년 02월호
2024년 02월호
기획
하은정 기자
취재
박현구(프리랜서)
사진
김정선, 신달자 시인 제공, 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