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미디어 그룹 콘데 나스트의 중국 지사 마케팅 컨설턴트, 중앙미디어그룹의 잡지부문 전략실장을 거쳐 국내 내로라하는 잡지사 중 하나인 허스트중앙의 대표이사까지, 김소영의 이력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하지만 <요즘 저는 아버지께 책을 읽어 드립니다>는 눈부신 경력의 잘나가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살면서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절망의 순간에 어떻게 희망을 꿈꿀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앞만 보고 달리던 2010년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사지가 마비됐고, 6년 전에는 엄마의 손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아이를 위해 회사를 그만뒀다. 삶의 정점에 이르던 시기였다. 하지만 처절한 원망 대신 그녀가 선택한 것은 막다른 길에서 새로운 답을 찾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책을 통해 그 해답에 가까워졌다.
마음 한구석으로 미뤄두었던 나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점점 노쇠해지시는 부모님에 대한 걱정, 커리어에 대한 끝없는 고민, 나이 들어도 여전히 미숙하고 현명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 그녀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였다. 책을 한 장 한 장 읽다 보면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무겁던 마음을 따스하게 위로한다. 새로운 의미를 찾으며 살고픈 의지가 솟는다. 김소영의 <요즘 저는 아버지께 책을 읽어 드립니다>는 책이 가진 치유의 힘을 보여준다.
어느 날,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에 대한 책임감, 부모님의 기대. 그 모든 것은 나중에라도, 다른 사람들도 지켜낼 수 있지 않겠니? 하지만 힘들어하는 네 아이는 너 아니면 누가 사랑해 줄 수 있겠니?’
나는 인생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을 위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요즘 저는 아버지께 책을 읽어 드립니다> 중에서
커리어의 정점을 향하던 시기에 회사를 떠났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부쩍 더 엄마를 찾았다. 어느 날 학원에 가야 할 아이가 사라졌다는 연락이 왔고, 저녁이 돼도 나타나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다. 그저 학원에 가기 싫었을 뿐이었던 아들은 늦은 저녁 무사히 돌아왔지만, 그때 결심이 섰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생각하게 됐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스스로의 욕심도, 부모님이나 주변의 기대도 놓기가 쉽지 않았다. 건강이 악화돼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도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하고, 잘 조율하며,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잘 사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을 계기로 인생에는 타이밍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우선순위가 아이라는 판단이 서니 마음먹기가 쉬워졌다.
갑자기 전업주부로 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 3개월 정도는 행복하기만 했다. 아이들이 안정을 찾아가는 것에 안심했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여유가 즐거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이렇게 내 인생은 싱크대 앞에서 시시하게 끝나는 것이 아닐까? 날개가 잘려 나간 듯한 절망스러운 기분에 고무장갑을 던지고 몇 번이나 울었다. 아이나 남편에게 짜증도 늘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다. 회사를 그만둔 이유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저 불안해만 하는 대신 조금씩 준비를 시작하리라 결심했다. 아이 둘을 모두 대학에 보내기까지 앞으로 10년. 그 후 다시 사회에 나가려면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갖춰야 할 테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시작했나?
우리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몰입하고 나머지엔 시큰둥하다. 이런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적성을 찾아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감각’이 생기는 거니까. 그런데 막상 나도 내 적성이 뭔지 여전히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컬러테라피, 아로마테라피부터 미술 치료 등 나를 찾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했다. 그걸 바탕으로 10년 뒤엔 무슨 일을 할지 결정하자 싶었다.
머릿속이 많이 복잡했을 것 같다.
답답했다.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아버지의 고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끝없는 고민이 시작됐다. 도무지 어디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책에는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교육, 고난, 정체성…. 머릿속에 맴도는 키워드로 무작정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간절한 질문이 생기고 나니, 그때부터 엄청난 집중력이 생겼습니다.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다니! 아이들 학교 보내 놓고 도서관에 가서 길, 교육, 고난의 키워드로 찾아낸 책들을 양쪽에 탑처럼 쌓아 놓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제 간절함이 하늘에 가닿았을까요? 책 속에서 제 질문에 대한 답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타나 제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답답한 상황과 인생의 문제를 바라보는 제 시선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저는 아버지께 책을 읽어 드립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고민의 답을 책에서 찾으려 했다니…. 그럴 때 보통은 점을 본다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살다 보면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 수없이 많지만, 막상 누군가와 상의하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많지 않나. 차마 다른 사람에게 다 얘기할 수 없는. 그런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책밖에 없다 싶었다. 읽다 보니 책만큼 시간과 비용 모든 측면에서 가성비가 좋은 조언자가 없는 것 같다.(웃음).
결국 책 속에서 답을 찾은 건가?
책은 내 삶과 고민들을 줌아웃해 한 걸음 떨어져 볼 수 있게 해준다. 무거운 생각의 더미에서 멀어져 책 속 서사를 좇다 보면 부정적 생각은 덜어지고, 어느 순간 내가 위로받고 있더라.
누구나 책 속에서 답을 찾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그런 책을 고르는 노하우가 있나?
나 역시 책을 많이 읽지 않던 사람이라 노하우 같은 건 없다. 다만 나에게는 간절히 답을 찾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답이 돼줄 것 같은 책을 열심히 서치했고, 그렇게 소설부터 철학서, 자기 계발서 그리고 성경까지 3여 년간 많은 책을 읽었다.
감동 깊게 읽었던 책은 무엇인가?
나를 진짜 가슴 뛰게 하거나, 내 간절한 질문에 답을 해주는 책이 좋은 책이지 않을까? 많은 책이 있지만 지금 떠오르는 것은 고난에 대한 생각을 전환시켜주었던 <죽음의 수용소에서>, 제주 거상 김만덕에 대한 책인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자식 교육의 바른 자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
책을 통해 아버지와 가까워졌다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책을 읽어드리고 있다.
아버지가 처음 사고를 겪었을 때만 해도 재활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시는 채로 10년이 지나니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만 남는 기분이었다.
‘고난’이란 키워드로 책을 찾아보다 발견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전환점이 됐다. 나치 강제수용소, 그 처절한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도 의미 있는 삶을 발견하고 유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책은 고난 속에서도 무엇이 사람을 버티게 하는지, 그렇기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고난 그 자체에 함몰될 것이 아니라 거기서도 의미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우리 가족의 상황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10년이 넘게 병상에 누워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기본적인 생활도 불가하지만 여전히 서로 사랑하며 함께 극복해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힘들게 간병을 하면서도 자식들을 더 걱정하고 손주들이 올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한가득 차려내는 어머니의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된 거다. 왜 우리에게만 이런 시련이 온 건지 피해 의식과 원망, 자기 연민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조금씩 희망으로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런 희망의 마음을, 치유의 경험을 글로 써서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다.
책을 읽어드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오랜 시간 간병을 하다 보면 간병 자체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이기 때문에 정작 환자의 감정적인 케어에는 소홀하기 쉽다. 아버지에게도 치유를 경험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글의 힘, 책의 치유력을 믿게 돼가던 즈음 ‘책으로 사람을 치유한다’는 뜻의 <비블리오테라피>라는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됐다. 그 뒤로 <로빈슨 크루소> <노인과 바다> <연금술사> <성경> 등 30여 권의 책을 읽어드렸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직접 책을 읽기는 쉽지 않으시니 찾아뵙고 책을 읽어드렸다. 그러다 코로나19 등 상황이 여의치 않아 녹음을 해서 보내기 시작했다. 녹음해서 기록으로 남기고 나도 들어보다 보니 목소리 톤이나 속도에도 자연스레 신경을 쓰게 됐다. 이젠 연기도 제법 잘한다. 중간중간 여백이 주는 드라마틱한 효과도 실감하게 됐고.
주로 어떤 책을 읽어드렸나? 가장 반응이 좋았던 책은 무엇인가?
축구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축구 선수 손홍민의 아버지인 손웅정의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를 가장 좋아하셨다.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읽어드리니 표정부터 달라지시더라. 질문도 많이 하시고. 어머니는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좋아하셨다.
“예전 아이들과의 책 읽기가 내 영혼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듯,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나눈 이 시간의 추억이
내 평생에 얼마나 큰 선물이 될지 알기에
책을 읽는 시간이 오히려 내게는 설렘 가득한 기쁜 순간이었다.
기쁨이니 멈추지 않을 거다.”
아버지께 읽어드릴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고르려고 한다. 고난 속에서 의미를 찾고 그 고난을 극복해가는. 그래서 그 서사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치유를 얻을 수 있는. 무엇보다 재미가 중요하다. 꼭 먼저 읽어보고 검증한다.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셨을 것 같다.
처음에는 딸이 수고롭게 책을 읽어준다는 그 사실 자체에 고마워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 점점 딸이 낭독하며 연기하는 걸 신기하고 재미있게 여기시기 시작했고. 한두 번 하고 말 줄 알았는데 3년간 꾸준히 계속되자 그 노력에 감동하시는 것 같다.
간병하느라 지치셨을 어머니에게도 큰 힘이 됐을 것 같다. 어머니가 써주신 추천사가 정말 뭉클했다.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이 많이 드실 거다. 가끔 힘에 부치면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화를 내기도 하셨다. 요즘은 언어가 변했다. 조금씩 이 고난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시는 것 같다. “딸의 책 읽어주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힘내거라’ 하시는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라고 추천사에 써주신 걸 보고 울컥 눈물이 났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낭독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나?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도 더 자주 뵈러 갔다. 그런데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 세대에게 아버지는 가깝고도 먼, 조금은 어려운 존재이지 않나. 책을 읽어드리며 자연스레 아버지와 대화가 많아지고 길어지면서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를 알게 됐다. 젊은 시절의 이야기부터 아버지의 취향과 가치관 등등. 아버지의 인간적이고도 멋진 면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나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도 높아졌다. 아버지의 딸인 나에게도 그런 장점들이 녹아들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무엇보다 나를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달라졌다. 진짜 나를 깊이 믿고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앞으로 어떤 책을 더 읽어드리고 싶나?
책을 발간한 후 반가운 연락을 많이 받았다. 손웅정 씨는 직접 사인한 책을 보내주셔서 아버지를 감동하게 하셨다. 평소 존경해오던 김형석 교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낭독해드리라고 당신의 책 <예수>를 선물해주셨다. 먼저 다 읽어본 후 아버지께도 낭독해드릴까 한다. 요즘은 아버지가 너무 궁금해하셔서 내 책 <요즘 저는 아버지께 책을 읽어 드립니다>를 읽어드리고 있다.
“부모님의 삶에 더 많이 관심을 갖고 관찰하며 소통하면서 나를 얽매던 열등감에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했다. 아이의 적성을, ‘자아의 신화’를 찾아 주려고 끊임없이 대화하는 모든 신간이 궁극으로는 ‘나도 모르던 나’를 발견하는 고리로 연결되어 감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있는 자리에서 치열하게 사랑하고, 지혜를 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내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저는 아버지께 책을 읽어 드립니다> 중에서
할아버지를 위해 책을 낭독하는 엄마를 보며 아이들도 느끼는 바가 클 것 같다.
남자애들이라 그런지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냥 가끔 엄지척하는 걸 보면 속으론 뭔가 느끼는 거겠지. 둘째 아이가 학교 과제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할머니를 썼더라. 전신 마비가 되신 할아버지를 10년이 넘게 돌보는 할머니를 보면서 환자와 간병인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는 얘기와 함께. 그렇게 아이가 자긍심을 느끼고 있는 것, 그런 게 변화가 아닐까.
효도하는 마음에 대해 배웠을 것 같다.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효도가 아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 고난 속에도 희망과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답을 찾아가면 된다는 것. 아이들이 그런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그런 것들을 봐주셨으면 한다.
책을 통해 교육관도 달라졌나?
내 마음이 달라졌다. 전에는 아이들의 길을 내가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니 절로 이제 그런 시대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이가 사회에 나갈 10년 후를 기준으로 교육해야 하는데,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현재의 기준에 맞추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이제 좋아하는 걸 하도록 내버려둔다. 큰아이는 축구 시뮬레이션 게임을 좋아하는데, 결국 축구 관련 분야에서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찾아내더라.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좋아하는 길로 가게 하되 경계를 지켜주는 정도여야 하지 않을까.
이전과는 다른 길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행복을 찾아냈다. 앞으로의 계획은?
미국이나 일본처럼 환자의 정서적 케어에 대한 담론화가 많이 이뤄진 나라에서 이 책을 출간해보고 싶다. 책을 쓰며 내가 스토리, 서사의 힘을 믿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으니 관련된 공부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