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도 다음 생도 스스로가 만드는 것
불교,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의 종교인들이 모여 화제가 된 ‘만남중창단’. 불교의 성진 스님, 천주교의 하성용 신부, 개신교의 김진 목사, 원불교의 박세웅 교무가 함께했으니 그야말로 종교 대통합을 이룬 셈이다. 만남중창단 결성의 일등 공신인 성진 스님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아담하고 고즈넉한 사찰, 성관사를 찾았다. 절을 둘러싼 녹음 짙은 산, 법당에서 퍼지는 은은한 향 냄새 덕분에 여름 무더위와 습기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너무 좋은 분들이라 방송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우리 네 종교인이 함께 모인다면 종교와 상관없이 더 많은 사람이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모임을 제안한 겁니다. 그런데 노래가 이렇게 어려운 줄 알았다면 섣불리 중창단을 만들자고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웃음)”
출중한 노래 실력은 아니지만 만남중창단의 인기는 뜨겁다. 노래뿐만 아니라 봉사 활동도 하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진심을 전하기 때문이다. 만남중창단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다는 성진 스님은 “종교와는 상관없이 종교인이 돼가는 과정은 모두 다 성스럽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종교 대통합 ‘만남중창단’
방송 출연 덕분에 주변에서 많이 알아보죠?
알아보는 분이 좀 늘어나기는 했죠. 하지만 어차피 스님들은 어떤 공간에 가도 혼자예요. 눈에 띌 수밖에 없어요. 서울역에서 다른 스님을 마주칠 확률은 열 번에 한두 번 정도? 스님들은 아무래도 늘 복장을 갖추고 있으니까 좀 부담스러워 대중이 아는 척을 잘 안 하세요. 대신 절로 찾아오는 분은 좀 있죠. 스님이 된 후로는 평생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방송 출연으로 인해 더 의식할 것도 없습니다.(웃음)
만남중창단이 처음에 어떻게 결성됐는지 궁금합니다.
중창단을 하자고 제가 먼저 말씀드렸어요. 신부님, 목사님과는 SBS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이 했어요. 교무님은 JTBC 시사 교양 프로그램 <다수의 수다>에서 처음 뵙는데, 그때 네 명이 만나 정말 좋았죠. 그 후 동국대에서 열린 ‘세계명상엑스포’에서 네 명이 명상 대담을 했어요. 우리 만남이 일회성 방송 프로그램으로만 끝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거예요. 남들이 보면 정말 안 어울릴 것 같지만, 만나 대화를 나누면 너무 좋으니까요. 종교 구분 없이 다 같이 만나 위안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우리가 잘하는 걸로 만나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을 하자” 해서 노래를 하게 된 거죠.
특별히 노래에 큰 관심을 갖고 시작한 중창단은 아니군요.
사실 서로가 잘할 줄 알았을 뿐이지 한 번도 노래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요. 김진 목사님 말고는요. 개신교는 워낙 찬양을 많이 하니까요. 실력이요? 목사님이 제일 잘하시고 나머지는 다 도토리 키 재기예요. 저는 염불을 오래 한 사람이라 성량은 큰데, 모든 노래의 발성을 자꾸 염불처럼 하는 습관이 남아 있어 굉장히 어렵습니다.
만남중창단. 어떻게 탄생한 이름인가요?
첫 연습 때 이름을 못 정했어요. 신부님은 무념무상이라는 매우 불교적인 이름을 제안했고, 저는 잘 섞이자는 의미에서 비빔밥, 교무님은 곱창밴드라는 이름을 제안했죠. 곱창밴드는 저에겐 종교적으로 좀 걸린다고 했더니 그 곱창이 아니고 머리 끈을 곱창밴드라고 하는데 서로 잘 묶여야 한다는 의미로 교무님 사모님이 제안한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결국 못 정하다가 첫 연습곡이 노사연의 ‘만남’이었는데, 이것도 인연이니 그냥 노래 제목대로 하자고 해서 만남중창단이 된 겁니다. 큰 의미는 없어요. 종교인들이 되게 철저할 거 같아도 웬만한 일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이름입니다.(웃음)
연습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았을 거 같아요.
거의 좌절했죠. 다행히 지휘자님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군부대 내 성당에서 피아노 반주도 하고 합창도 가르친 경험이 있어 상당히 씩씩하고 포기를 모르는 성격입니다. 남편도 군인이고요. 그래서인지 다행히 우리 노래 실력을 듣고 많이 놀랐지만 포기하지는 않았어요. 아마 평생 맞을 야단을 중창 연습하면서 다 맞은 것 같아요. 물론 지휘자님은 야단친 게 아니라 가르친 거라고 하시죠.(웃음) 우리가 너무 못하니까 화를 내지는 않으세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노래 연습을 한 지 3개월 만인 지난해 12월에 명동성당에서 공연을 했어요. 노래 실력에 비해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종교인들은 대부분 각자 자기의 종교성이 최고의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최고가 꼭 하나는 아닙니다.
다양한 종교인들과 교류하면서 느낀 점은,
각자 그 믿음을 향해 가는 길만큼은 모두 성스럽고 가치 있다는 겁니다.
야단맞으면서 노래 연습을 하고 고생한 보람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노래를 꼭 귀로만 듣는 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관객들이 우리 네 명의 노래를 마치 마음으로 듣는 것 같았어요. 언젠가는 그분들을 다시 모셔 우리의 달라진 실력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8월에도 종교 행사를 비롯해 몇 군데 초대를 받아 공연은 계속될 겁니다.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곡은 어떤 곡인가요?
좋아하는 곡과 잘하는 곡은 굉장히 다릅니다. 잘 못 부르지만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를 가장 좋아합니다. 사실 제가 우겨서 불러보자고 했다가 엄청 야단맞았죠. 그래도 가사가 너무 아름다워서 하고 싶었습니다. 가사 내용을 보면 자신이 힘든 것이 아니라 친구가 힘든 걸 보고 같이 떠나는 내용입니다. 이거 진짜 어려운 겁니다. 상대가 힘든 걸 보고 그 사람을 위해 같이 떠날 정도의 마음을 가진 친구라니.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이런 친구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살면 좋지 않을까 늘 생각합니다.
저도 ‘도망가자’ 참 좋아하는데요, 가사도 좋고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따라 부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죠.
예전에 조계사 대학생회에서 함께했던 남녀 커플이 결혼하는데 저에게 주례를 서달라고 했어요. 주례사 대신 주례가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살면서 두 사람이 서로가 힘든 걸 알아주면 좋겠고, 그럴 때 같이 떠날 정도의 마음이 있다면 제일 좋은 것 같다고 했죠. 양가 부모님에게 제목이 발칙하더라도 절대 그런 뜻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웃음) 가사가 주는 힘이 대단한 것 같아 이 노래를 정말 좋아합니다.
중창단 멤버 중 특히 스님과 잘 맞는 멤버가 있나요?
없어요. 다 안 맞거나 다 잘 맞거나 둘 중 하나죠. 우리는 서로 가깝다, 안 가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과의 관계는 철저한 매너의 관계입니다. 각자의 역할과 방향성이 너무나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죠. 관계라는 것은 원래가 서로 가까워지면 다 알고 싶어 하는데, 거기서 문제가 많이 생기는 겁니다. 세상은 그렇게 다 알 필요가 없어요. 왜 그 사람에 대해 다 알려고 합니까? 중창단을 만들고 노래를 함께 부른다고 해도 서로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과 뜻, 마음에 의해 이 만남을 이어가는 겁니다.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관계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친구로 만나 이 일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에게는 친구의 의미도 조금 다를 겁니다. 종교인들이 만나 같이하면서 그분들 자체를 신뢰하는 거죠. 서로를 신뢰한다는 건 그분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그분이 지금까지 종교인으로서 살아온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다른 의견이 나와도 억지로 조율하지 않고 그냥 따라가면 됩니다. 서로 목적을 위반하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가끔 지휘자나 반주자님이 우리와 대화하면 좀 답답하다고 해요.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하자면 하고 하지 말자고 하면 안 한다고 하죠.(웃음)
만남중창단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세 분이 종교인의 길을 가게 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짜 종교인이 돼가는 과정은 다 성스럽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출가를 했으니 내 길인 출가가 가장 성스러운 길일 거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종교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길을 가는 것이 최고의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최고가 꼭 하나는 아니거든요. 세 분의 종교인이 가는 길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제 시야가 열리고 넓어졌습니다. 왜 우리가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줘야 하는지, 종교인들이 각자의 방법과 형태는 다르지만 그 믿음을 향해 가는 길만큼은 모두 다 성스럽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저희가 많은 분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바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 공감입니다.
타인의 고민 아닌 자신의 고민 제대로 알기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고민을 많이 들어주시는데, 정작 스님도 스트레스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입니다. 종교인의 길은 기본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길이라 전체 스트레스가 100이라면 이미 60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것이 이미 충분한 연습이 돼 있어 그냥 힘든 상황을 넘어가는 것뿐입니다. 종교인들의 경우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합니다. 내 숙제 때문에 종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망치지 않는 거죠. 이게 각 종교인이 갖는 종교적인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저의 고민거리는 ‘내가 과연 공감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입니다. 이 세상에 익숙한 걸 버리는 것만큼 두렵고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혹시 불교 안에서 어떤 식으로 공감하겠다고 만들어놓은 틀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만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게 됩니다. 신부님, 목사님, 교무님이 하시는 걸 보면서 더욱 저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다른 방법으로도 넓게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대신 스트레스가 길게 가지는 않아요. 한 달 전 고민을 지금도 하고 있다든가 그런 건 없습니다. 중요한 건 고민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내가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지 고민거리는 아닙니다.
종교인들의 경우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합니다.
이 역시 종교적인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스트레스가 길지도 않아요. 중요한 건 고민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내가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지 고민거리는 아닙니다.
고민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어떤 이야기를 해주시나요?
안타까운 게 다들 고민을 말하는데 정작 본인의 고민이 아닙니다. 자식 고민, 남편 고민, 직장 상사 고민입니다. 남의 고민을 내 고민으로 갖고 있는 거죠. 제가 남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이야기해주지만 내일 다시 찾아올 거라는 걸 너무 잘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 고민을 정확하게 못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고민이 아닌 것은 결과의 문제인 겁니다. 술 먹는 남편 때문에 고민이라면 그걸 아내가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남편의 문제로 인한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제대로 질문하는 분은 10명 중 2명밖에 안 됩니다. 그래도 젊은 층으로 갈수록 진짜 자신의 고민을 말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런 면에선 젊은 사람들이 더 현명하군요.
한 중학생이 저를 찾아와서 자기랑 친한 친구에 대한 질투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 아이는 참 잘 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시절에 자기가 남을 질투하는 마음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구체화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그 학생은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엄청난 방법을 찾은 겁니다. 어른들도 그렇게 못 합니다. 대부분 스스로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아플 때 자기를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자신의 고민을 알고 치유할 수 있나요?
종교가 그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신을 믿어라 혹은 가르침을 믿어라”라고 하면 그게 무슨 가르침이냐고 여기기 쉽지만, 믿지 않고 의지할 마음을 갖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다리가 부러졌으면 목발을 짚어야 하는데, 나는 목발에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면 다리가 더 상하고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다리가 부러져도 일상을 살아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도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힘들다고 일상을 망가뜨려서는 안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회사 일이 힘들다고 밖에서 술 마시고 또 집에 와서 아내한테 인상을 쓰고 짜증 내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회사 일과 가족은 아무 관계도 없는데 말이죠. 이럴 때 정신을 차리게 하고, 술을 마시거나 가족을 괴롭히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 바로 종교의 힘입니다.
우리 삶에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내일 바꾸면 되고, 내가 바꾸면 됩니다.
청소년을 위한 활동도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우먼센스>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중고등학생을 위한 ‘파라미타 청소년연합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어 청소년을 만날 기회가 많습니다. 그들은 알 수가 없어요. 청소년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른의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냥 지켜봐야 합니다. 물론 부모가 힘들겠지만, 그러니까 어른인 겁니다. 그 정도 인내가 없다면 어른 노릇을 못 하죠. 어른들이 그 감당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하고 싶어 아이들을 학원에 빨리 보내는 거죠. 물론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이해하지만, 자녀에 대해 알려는 노력을 적게 하는 것 같습니다. 대학에 가면 다 해결된다는 말을 하지만 다들 가봐서 알지 않습니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러고 보면 부모의 역할이 참 어렵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단 한 번도 제 성적을 물어보거나 제가 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해 간섭하신 적이 없습니다. 딱 한 번 제 인생에 간섭하셨는데, 바로 대학 입시 때 서울대 원서와 동국대 원서 딱 두 개만 가져와서 서울대 아니면 동국대 불교학과에 가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여쭤보니 당신 아들이 이 세상 속에서 남들과 아웅다웅 경쟁하며 살 거라는 생각이 안 들었답니다. 서울대를 나오면 세상이 다 인정해주니 그냥저냥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게 아니라면 불교학과에 진학해 학문을 벗어난 학문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어머니가 절에 열심히 다니셨는데, 운전기사 역할로 따라간 아버지가 본 사찰의 풍경과 스님들의 삶이 편안해 보였던 거죠.
아버님의 적절한 간섭이 스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거군요.
제 인생에 딱 한 번 간섭하셨고, 저도 모르는 제 진짜 모습을 알고 계셨던 거죠. 부모의 눈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의 삶의 모든 길을 미리미리 수정해주려고 노력하는 방식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부모가 수정해줍니까. 자식의 인생은 계속되는데 말입니다. 자식이 원할 때 답을 주고 자식이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겁니다. 제가 22살에 출가했는데 저의 은사 스님 역시 그냥 저를 묵묵히 기다려주셨습니다.
22살에 출가를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과가 마음에 안 들어 학생운동만 열심히 했습니다. 심적으로 혼란을 겪던 중에 우연히 은사 스님이 계신 절에 가서 스님을 뵙는 순간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22살 남자가 웬만해서는 안 우는데, 최루탄이 터져도 안 울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왜 우는지 이유도 모르고 그냥 눈물이 났습니다. 딱 하나 든 생각은 ‘내가 다 잘못 살았구나’ 하는 거였죠. 그러다 은사 스님이 저에게 “네가 누구냐?”라고 질문하시는 순간 정말 카오스였습니다. 전혀 예상 못 한 질문이었죠. “제가 누군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알게 되는지 가르쳐주십시오” 했더니 당신이 아는 방법을 알려주셨고, 그 방법대로 수련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출가하게 됐습니다.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어머니가 절에 열심히 다니셨는데 의외로 많이 망설이셨죠. 아버지는 바로 “신중하게 생각했냐?”고 물으시더니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일주일 뒤에 아버지가 은사 스님을 만나러 오셨는데 “제 역할은 다 끝났으니 큰스님께서 잘 맡아주십시오” 하신 게 전부입니다. 모든 게 너무 간단명료했어요. 제가 사고를 치거나 말썽을 부린 적도 없는데 아버지는 항상 저를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너무 쿨하게 나오시니 반대도 못 하고 좌불안석이었죠. 제가 행자 때 어머니가 매주 법회 때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저 대신 스님들의 옷을 빨아주다 은사 스님에게 걸려 야단도 맞고 했습니다.(웃음)
다음 생을 위해 지금 당장 삶의 태도를 바꿔라
사실 오늘 스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님 표정만 봐도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웃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마음을 편하게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이미 정확한 결론이 있습니다.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행복은 몰라도 됩니다. 힘든 게 뭔지를 알고 내가 그걸 안 하면 되는 겁니다. 힘든 것을 빨리 제거하면 그게 행복인 거죠. 행복은 대단히 형이상학적이라 안 보이는 데 반해 고통은 굉장히 형이하학적이기 때문에 분명합니다. 잘 안 보이는 행복을 좇지 말고 괴롭히는 것을 없애는 게 문제 해결의 방법입니다. 그 해결 방법으로 종교인들은 당연히 종교를 추천합니다. 40년 넘게 절에 다닌 분이, 부처님이 자신을 항상 반겨준다는 말을 합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부처님은 나를 반겨주고, 어떤 힘든 일이 생겨도 부처님은 한결같다는 거죠. 종교성은 그런 겁니다. 그렇게라도 스스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결국 건강하게 잘 삽니다. 부디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것들을 빨리 정리하기 바랍니다.
흔히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에 잘 살아야겠다”는 말을 합니다. 스님이 보시기에 다음 생에는 정말 희망을 가져도 되는 겁니까?
오죽하면 불자도 아닌 사람까지 윤회를 믿겠습니까. 부러운 사람을 보면 “전생에 업을 쌓았나,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하는 말도 하죠. 현실이 타개가 안 되니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과거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별로 좋지 않은 말입니다. 이번 생이 틀렸으면 다음 생도 틀렸습니다. 누가 새로 만들어주는 다음 생은 없으니까요. 오로지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 생을 바르게 잘 살기 위해서는 지금 빨리 수정해야 합니다. 지금 뭔가를 바꾸면 다음 생을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생이나 다음 생이나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달린 거군요.
실제로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연세가 여든이 넘었는데 피아노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 배워둬야 다음 생에 태어나면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사고방식은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단정적으로 생각하면 포기하기 쉽죠. 하지만 지금 배워야 다음 생에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삶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불교가 무상하다고 하는 말은 ‘고정된 것은 없기 때문에 내일 바꾸면 되고 내가 바꾸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끝없이 긍정적인 것이죠.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니 멈추지 말고 자신을 한정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물론 제가 무계획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그저 사는 게 계획입니다. 나머지는 그 과정에서 그냥 하는 겁니다. 제가 내일도 스님으로 잘 사는 것, 그 안에서 역할을 더 할 수 있다면 대단히 행복한 거죠. 내일도 내가 이걸 지켜가고 잘 사는 것이 제 계획입니다.
성진 스님과 나눈 대화는 한편으로는 종교성을 이야기하면서도 다시 곱씹어보니 우리 삶의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부모의 평생 숙제인 자녀를 기다려주는 법, 지금 자신을 괴롭히는 고민과 고통에서 벗어나야 행복해진다는 진리, 그리고 다음 생을 기약하기 전에 이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삶의 태도까지. 만남중창단이 만국 공통어라고 하는 ‘노래’로 종교 대화합을 이룬 의미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