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민이라면 TV 속 앳된 얼굴의 박세리 감독을 기억한다. 워터 해저드에 빠진 공을 치기 위해 벗어 던진 양말 속에서 나온 새하얀 발, 그리고 이어진 한국 여자 프로골프 선수 최초의 US 여자 오픈 우승까지. 박세리 감독은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과 아시아인 최초·역대 최연소로 LPGA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여전히 깨지지 않는 LPGA 투어 통산 25승의 주인공이다. 올해 초 미국 경제 전문지 <비즈니스 인사이더>가 선정한 ‘세계 여성 스포츠 발전에 공헌한 상징적 인물’ 36명 중 유일한 아시아 국적 선수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올해로 US 여자 오픈 우승 25주년을 맞은 박세리 감독. 뜻깊은 한 해를 보내고 있는 박 감독을 <우먼센스> 창간 35주년 기념호인 8월호 커버의 주인공으로 섭외했다. 촬영 현장에서 만난 그녀는 레전드 오라를 온몸으로 발산했다.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스타일링으로 초반에는 스스로도 어색한 듯 보였지만 촬영이 시작되며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골프채를 소품으로 사용한 컷에서는 눈빛부터 변하는 모습에 ‘역시 박세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분야의 선구자로서 후배 양성과 스포츠 환경 개선에 누구보다 진심인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릇 ‘길을 만드는 사람’은 이런 거구나 새삼 느끼게 된 인터뷰였다. 다른 촬영 현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에디터를 포함한 모든 스태프가 박세리 감독과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선 진풍경이 벌어졌다는 후문. 그녀는 셀럽 그 이상, 진정한 레전드다.
제 꿈이 누군가의 꿈이 되면서부터 생각도 많이 달라졌죠.
선수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늘어나다 보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올해로 창간 35주년을 맞은 <우먼센스>와는 첫 만남입니다.
안녕하세요? <우먼센스> 독자 여러분, 박세리입니다. 제가 표지 모델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먼센스>의 창간 3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촬영은 어땠나요?
저도 인터뷰나 촬영은 많이 해봤지만, 그동안 해보지 않은 콘셉트로 옷을 입고 헤어스타일도 해보니 낯설긴 해요.(웃음) 하지만 스타일링에 새로운 시도도 해볼만 한 것 같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미국도 다녀오고, 비즈니스도 많아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대전 집에 강아지 6마리가 있는데 자주 못 가고 있답니다.
MBC 예능 <전지적 참견 시점>에 출연해 박세리의 이름을 건 골프 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전했어요.
제가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은퇴하면서도 항상 생각하고 꿈꿔왔던 일인데 이제야 구체화됐어요. 원래는 한국 대회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국이 아닌 미국을 택한 이유는 현재 많은 선수가 해외 진출을 하고 있지만 좀 더 큰 무대(미국)에서 좀 더 빠르게 경험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예요. 알려졌다시피 이 대회는 참가한 선수 전원이 상금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에요. 미국에서 대회를 나가려면 경비가 꽤 드는데 모두 선수가 자비로 부담해야 하거든요.
후배 골퍼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재단 설립, 자선 대회, 최근에는 용인시와 골프 꿈나무 육성을 위한 협약까지 맺었다고요.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다방면으로 지원해주는 것이 저의 목표예요. 전 제 꿈을 위해 미국에 간 것이었지만 제가 만든 길을 후배들이 잘 따라와주고, 흔히 말하는 ‘세리 키즈’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저 역시 많이 배웠어요. 후배들이 자기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게 선배의 역할이자 위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아쉬웠던 것들이 있었지만, 후배들은 조금이라도 개선된 환경에서 운동을 하면 좋겠거든요. 실력이 늘고 좋은 선수가 많이 나오면 선수에 대한 대우도 좋아질 거라 믿고 있고, 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작년 LPGA의 레전드 골프 선수들이 한국을 찾아 우리나라 현역 선수들과 경기를 벌인 ‘LG전자 박세리 월드매치’도 그런 취지였죠. 올해는 용인시와 또 일을 추진했어요.
맞습니다. 지난 3월 용인시와 체육문화 발전을 위한 협약을 맺고 용인에 골프 R&D센터(가칭), 세리파크(가칭) 등을 만들어 골프 꿈나무 육성은 물론 시민들도 즐겨 이용할 수 있는 복합문화체육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골프 전문 학교도 제가 참 오랫동안 꿈꿔온 목표였어요. 선수들의 교육과 훈련이 동시에 가능하고, 좋은 환경에서 각자에게 맞는 프로그램으로 훈련할 수 있는 곳이 정말 필요하거든요. 엘리트 체육인은 물론 생활체육인, 시민들도요. 한국은 아직까지 그런 환경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해외의 경우 ‘생활체육’의 범위가 넓어 골프도 여기에 속하죠. 스포츠가 일상이 되고 놀이처럼 즐기다 보니 운동이 좋아지고 관심을 갖게 되면서 많은 선수가 나오거든요. 또 그중에서 특별히 재능 있는 선수를 발굴하기도 하고요. 한국은 생활체육이 아직까지 그 단계까지 형성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선수들이 편하고 자유롭게 연습이나 훈련을 할 수 있는 환경도 부족한 거죠.
모두가 입을 모아 ‘한국 골프의 선구자’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후배들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제가 모든 걸 다 겪어봤기 때문인 것 같아요. 불모지 같았던 한국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여자 골프 선수가 생소했던 환경에서 선수 생활을 했잖아요. 제 꿈이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생각도 많이 달라졌어요. 저처럼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한 명, 두 명 늘어나다 보면 들어주는 사람도 늘어날 거고, 그러다 보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우리 선수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가 많은데 다른 일을 해도 될까요?’
일단 해보세요.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고,
원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요?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는 건 정말 좋은 거예요.
올해로 US 여자 오픈 우승 25주년이 됐습니다. 박세리 감독의 우승 이후로 한국 여자 골프가 새롭게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세리 키즈의 탄생부터 골프 최강국이 되기까지, 앞으로도 계속 회자될 이 업적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25’라는 숫자가 너무도 낯설어요. 말씀하셨다시피 우승 이후 거의 매년 방송에서 그 장면이 방영되고 회자되다 보니 저는 아직도 어제 일 같아요. 제 기억 속에서조차 너무 생생하거든요. 얼마 전 미국골프협회(USGA)가 US 여자 오픈의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 첫 개최를 기념해 역대 우승자들을 초대한 행사에 참석했어요. 그날 참석한 레전드 선수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면서 굉장히 감회가 새로웠어요. 너무 영광스러운 자리였는데 ‘나 우승 못 했으면 여기 못 왔겠네’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웃음) LPGA에서도 박세리라는 선수는 굉장히 상징적이잖아요.
그런데 후배들은 저처럼 선수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일까요?
미국에서 선수 생활할 때 다른 선수들을 보며 내가 부족한 점이나 그들에게서 배울 점을 찾고 스스로 터득하며 독학을 했어요. 그렇게 18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죠. 시간적으로나 마음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했어요. 은퇴하고 보니 ‘이거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땐 왜 그러지 못 했을까?’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굉장히 많이 남았어요. 그래서 후배들은 진짜 저처럼 선수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에게는 “훈련 좀 열심히 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아요. 누구보다 열심이고, 누구보다 자신의 목표가 뚜렷하거든요. 그래서 골프적인 조언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라”라는 이야기를 꼭 해줘요. 대회를 치르고, 훈련하는 것은 당연히 힘들죠. 그런데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한 번도 갖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워요. 반면에 외국 선수들은 그런 마인드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골프를 좋아하고 선택했기 때문에 당장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오늘, 내일, 모레 하루하루 연습하면서 언젠가는 그 순간이 나한테 올 것이라는 여유 있는 마음이 전 참 부럽더라고요. 운동과 내 삶의 밸런스를 잘 맞추는 것이 선수 생활을 오래 할 수 있는 비결인 것 같아요.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미묘하게 달라진 나, 빠져나오려고 해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시기’인 슬럼프를 극복한 경험을 나눈다면요?
컨디션 관리를 위해 매일 반복되는 훈련, 지루하도록 같은 일상을 보냈는데 하루아침에 경기력이 달라진, 미묘하게 다른 나를 느끼면서 겁이 났었죠. 다시 골프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정말 무서웠어요. 그러다 보니 ‘아, 내가 정말 골프를 좋아했구나’라고 소중함을 느끼게 됐죠. 그 기간이 1년 반 정도였어요. 그 전에는 목표를 위해 골프가 도구처럼 사용됐다면 ‘아, 이래서 내가 골프한거지’라며 골프 자체를 사랑하고 다시 바라보게 됐죠. 그러니 골프를 오래 하고 싶은 생각에 마음의 여유도 생기더라고요. 이런 슬럼프가 저한테 또다시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헤쳐나가고, 그 시간이 힘들지만 결코 힘든 것만은 아닌, 나를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만들 자신이 있어요. 제가 강연도 많이 다니는데 다들 걱정이 많아요. “지금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다른 걸 해보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요? 나이가 많아서 될까요?” 이런 고민들을 들으면 저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해요.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고, 원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요? 일단 해보세요. 그러면 또 경제적인 부분이 걱정된다고 해요. 제 생각에는 이거 조금 해보고 그만두고 또 저거 해보면서 결국 그냥 다 해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에 뿌리를 두고, 시간을 쪼개 도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데 시간을 쪼개 할 열정은 없다? 그럼 진짜로 하고 싶은 게 아니죠.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는 건 정말 좋은 거예요. ‘과연 내가 될까?’라고 고민하기보다 실행하는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거든요.
운동선수로서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또 이것을 잘 이어준 후배들이 고맙죠.
모든 스포츠 후배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훈련하고
대한민국 스포츠를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 저의 꿈이에요.
은퇴하고 나서 골프를 거의 안 쳤다고 말했어요. 요즘은 어떤가요?
요즘도 거의 운동을 안 하고 있어요. 하긴 해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해야지, 해야지” 말로만 그러고 있죠. 제 인생을 쏟아 운동을 해서인지 은퇴 후에는 골프를 포함한 모든 운동과 멀어지고 있어요.(웃음)
몸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여름마다 챙겨 먹는 보양식이 있나요?
이제는 선수가 아니니까 매일 맛있게 잘 먹는게 보양식인 것 같아요. 먹는 걸 워낙 좋아하다 보니 가리지 않고 먹는 편인데, 은퇴하고 달라진 건 반주를 즐긴다는 거?(웃음) 지인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반주를 곁들이는 걸 굉장히 좋아합니다.
골프 외에 다른 관심사도 궁금합니다.
제가 강아지를 키우니까 동물과 관련된 것에 관심이 많죠. 벌써 6마리의 강아지를 키우고 있어요. 가족이 되려다 보니까 자꾸 인연이 되더라고요. 강아지들은 모두 대전 집에 있는데, 최근에는 제가 너무 바쁘다 보니 저희 자매들이 돌보느라 고생이 많아요.(웃음)
어느덧 2023년도 상반기가 훌쩍 넘어가고 있는데요, 하반기에는 어떤 계획이 있나요?
올 하반기에는 작년에 열린 월드매치를 다시 한번 멋지게 개최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또 저와 같은 LPGA 무대에서 활약한 레전드 선수 아니카 소렌스탐과 함께 월드 주니어 챔피언십을 한국에서 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끊임없이 달리고 있네요. 박세리 감독의 최종 꿈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운동선수로서 이루고 싶었던 목표는 다 이룬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그만큼 노력도 했지만 모두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운도 정말 좋은 사람이죠. 그리고 그게 끊어지지 않고 후배들이 잘 이어주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더 힘을 얻는 것 같아요. 그런 후배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선수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거죠. 그렇지만 꼭 골프에 국한된 건 아니에요. 저는 골프 선수이자 운동선수니까요. 대한민국 체육 꿈나무, 유망주들이 좋은 환경에서 훈련하고 선수로서 대우를 받게 만들고 싶은 것이 가장 큰 꿈입니다. 혼자라면 힘들겠지만 제가 시작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고 또 참여하게 하고 싶어요. 지금은 조금 느리더라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존경받는 선배로서 후배들이 대한민국 스포츠를 이끌어나가 꿈을 이루는 과정을 보는 것이 저의 최종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