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쉰들러’ 수퍼맨 목사와
‘든든한 후원자’ 이지성의 탈북 로드 5년 스토리
<꿈꾸는 다락방> <리딩으로 리드하라> <에이트> 등의 저자 이지성 작가. 1993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자기 계발, 인문학, 교육, 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40여 권 출간했고 총 5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의 대표작인 <꿈꾸는 다락방>에서 언급한 꿈을 현실로 만드는 공식, ‘R=VD (Realization=Vivid Dream,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를 유행시키며 자기 계발서 작가의 대표 주자로 손꼽혔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출간과 함께 우리 사회에 인문 고전 독서 열풍을 불러일으킨 영향력 있는 작가이지만, 사실 최근 몇 년 동안은 당구 국가대표 선수 출신인 ‘당구 여신’ 차유람의 남편으로, 또 정치적 구설수에 오르며 더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탈북민 구출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책 <1만 킬로미터>로 돌아온 그의 정체성은 역시 작가다.
그는 사회 공헌에도 적극 참여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동안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의 낙후 지역에 100여 개의 병원과 학교를 건립하는 ‘드림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최근 5년간은 한국에 탈북인 현실을 알리고 동참 후원을 독려하는 데 힘을 보탰다.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중국, 동남아를 거쳐 대한민국에 와서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무려 1만km에 이른다고 한다. 신간 <1만 킬로미터>는 그 1만km를 설계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탈북인을 구출한 ‘수퍼맨’이라는 인물과 이지성 작가가 함께한 5년간의 생생한 수기 형식의 기록이다. 이지성 작가는 왜 이 목숨을 건 여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목숨을 건 여정에 동참하는 이유
<1만 킬로미터>는 탈북민들의 탈북 로드와 그들의 인권에 관한 이야기인데, 지금까지 낸 책들과 성격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저도 사실 북한 관련 책을 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프리카 봉사 활동이나 국내 지역아동센터 쪽 일을 오랫동안 해왔으니까 그런 내용들을 책으로 쓸 줄 알았죠. 어떻게 보면 180도로 방향이 달라진 겁니다. 북한 인권 프로젝트 일을 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좀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혔어요. 저는 그냥 책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인데 제가 할 수 있는 한계는 이미 지난 거 같아요.
<1만 킬로미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퍼맨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작가이고 제가 쓴 책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책에 나오는 수퍼맨 목사님 관련 내용은 인적 증거와 물적 증거가 확실하게 있는 것만 썼어요. 둘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 건 안 썼죠. 이분은 그냥 북한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원래 남한 사람이지만 탈북인들하고만 30년 넘게 생활하다 보니 북한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된 거죠. 그 정도로 한국 사회 실정에는 무지하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분이에요. 하지만 북한 관련 이야기나 탈북인 구출에 대해서는 100% 믿을 수 있는 분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존경하게 됩니다.
탈북인 구출 외에는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분이니 처음 만났을 때는 의심스러운 부분도 많았겠네요.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나를 노리는 암살조가 있다”, “일본 정보기관에 정보를 줬다”, “동북아시아 정보기관에 정보를 줬다” 뭐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니까 너무 황당하잖아요. 솔직한 말로 ‘요즘은 사기 수법도 참신하구나. 내가 어쩌다 이런 사기까지 당하나’ 생각했죠. 수퍼맨과 같이 있으면 휴대폰으로 그에게 영상과 사진이 막 와요. 탈북인이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다 뭐 그런 내용들인데, 이게 조작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제가 종교 단체에 사기를 많이 당했던 터라 그냥 돈이 많이 급한가 보다 생각했죠.
정말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잖아요. 그러다 수퍼맨을 어떻게 신뢰하게 됐나요?
책에도 나오는데, 중국 단둥에서 만난 할머니의 신앙 간증을 듣기 전까지는 안 믿었어요. 수퍼맨을 통하면 단둥에 가서 탈북인을 만날 수 있다고 하니 한번 가보자, 작가로서 북한을 가까이 경험하고 끝내자는 심정으로 단둥에 간 거였어요. 이 사람이야 다시는 안 보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죠. 그런데 그 할머니의 신앙 간증을 들으면서 새로운 관점에서 봐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할머니의 사연이 어떤 내용이었나요?
중국에 정착해 25년 넘게 신분 세탁을 하고 살고 있는 분인데, 이분이 북한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나흘 동안 매일 꿈에서 나무에 못 박혀 죽는 사람을 봤다는 거예요. 그리고 살아서 하늘로 올라가더랍니다. 글자도 모르고 교회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분이 그런 꿈을 꾼 거죠. 20년 넘게 잊고 지내다가 한국계 미국인 선교사가 몰래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에 갔다가 예수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간증을 듣고 나니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수퍼맨 목사에 대한 신뢰도 생겼어요. 결정적으로 사이버 보안 전문가인 문종현 씨로부터 “수퍼맨 목사가 북한 넘버원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믿게 됐죠.
제3자가 검증을 해준 거네요?
네. 문종현 씨는 저에게 “탈북인 구출은 가족에게도 위험한 일이라 수퍼맨과 이지성 작가 두 사람은 미국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권유했을 정도예요. 특히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탈북인을 구출하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절대 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코로나19 와중에 목사님을 돕던 분들이 사고로 사망했는데, 비슷한 유형의 사고가 목사님에게도 일어날 뻔했어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으니 찝찝했죠.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탈북인 구출에 전념하는 목사님은 참 순수하고 착한 분입니다.
이 위험한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아내인 차유람 씨는 걱정하지 않았나요?
제 아내는 정말 독특하면서 쿨한 사람이에요. 같은 기독교인이고 북한 여성 인권에 대해 굉장히 가슴 아파하는 사람인데, “내가 직접 못 하니까 당신이라도 하라”는 입장이었어요. 심지어 최근에는 “이 정도면 감옥 한 번쯤 갈 때 되지 않았느냐”, “이왕 하는 일이니 제대로 해라”라고 농담을 할 정도입니다.
제가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며 굉장히 마음 아파하면서 아프리카를 돕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해도 되지만, 탈북인을 돕는 일은 꼭 제가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어요.
위험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차유람 씨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군요.
그동안 탈북인 구출 작전을 위해 중국과 동남아를 열 번 이상 갔다 왔고, 6월에도 갑니다. 아내에게 고마운 점은 중국 등 위험한 곳을 가도 단 한 번도 싫어하거나 두려운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냥 쿨하게 마치 <우먼센스> 인터뷰하러 가는 것처럼 “잘 다녀와라” 이런 반응이에요. 제가 하버드대 프로젝트로 미국에 보름 동안 가 있고, 이스라엘도 역시 보름 동안 다녀왔는데 일 열심히 하라고 저한테 연락도 잘 안 해요. 오히려 이 일이 잘되면 저를 따라 미국에 가서 하버드대도 가고 다른 인권 단체들과도 교류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을 정도예요.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해서 영어를 잘하는 편인데, 지금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니까요.
그런 지지를 받고 현장에 가도 사실 굉장히 무섭고 두려울 것 같아요.
저는 늘 걱정이죠. 태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중국보다는 안전하다고 하지만, 북한 정권을 위해 일하는 위장 북한인이 방콕에 최소 1,000명 정도 있다고 하니 늘 테러의 위험이 있는 거죠. 우리가 주로 활동하는 태국의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은 마약 사범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악명 높기도 하고요. 제가 유튜브에 태국에서의 활동 영상을 올릴 때 일부러 고급 리조트에서 찍은 걸 올리기도 해요. 탈북인 구출 작업이 끝날 때까지 대기해야 하는 장소가 필요한데, 처음 목사님을 따라 태국에 갔을 때는 오지에서 대기했어요. 오지에 있으면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무섭습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리조트에서 대기하면서 애써 밝은 척 영상도 올리고 그럽니다. 그러면 공포를 좀 잊을 수 있거든요. 현장에 있는 동안 제 목숨은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삶에 대한 감사가 더 많아진 것 같아요.
그런 위험에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실 책에 쓴 그대로 아직도 혼란스럽고, 빨리 발을 빼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제가 이 일을 그만두면 할 사람이 없어요. 수퍼맨 목사님은 후원금 모금 같은 것도 못하고, 경제활동을 전혀 못합니다. 쉽게 말해 목사님은 그냥 달리기 선수예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사인 볼트처럼 달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이 사람을 선수로 데뷔시키고 대회 출전이나 광고 계약, TV 출연 등을 성사시키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요. 그 프로듀서의 역할을 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목사님이 빠지면 북한 인권 세계 네트워크가 무너지는 거고, 제가 빠져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긴밀하게 결합돼 있는 구조라, 지금은 제가 빠지면 당장 탈북인 100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을 10명밖에 못 구하는 상황이 됩니다. 구레네의 시몬처럼 저 말고는 십자가를 질 사람이 없어 제가 지고 가야 하는 상황인 거죠.
탈북인을 돕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신앙인가요?
만약 신앙의 힘이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한다면 저보다는 더 훌륭한 목사님들이 이 일을 해야겠죠. 그런데 알아도 안 하는 사람이 많아요. 신앙의 힘이 클 수 있지만, 북한의 아이들과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냥 멈칫하게 되는 거죠.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가장 큰 원동력이겠죠.
목사님이 빠지면 북한 인권 세계 네트워크가 무너지는 겁니다.
우리는 긴밀하게 결합돼 있는 구조라, 지금은 제가 빠지면
당장 탈북인 100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을
10명밖에 못 구하는 상황이에요.
작가는 시대의 흐름을 먼저 읽는 오피니언 리더
그동안 굉장히 다양한 분야의 책을 썼어요.
의도한 건 아니고 기본적으로 제 책에는 제 라이프가 다 들어가 있어요. <꿈꾸는 다락방>도 제가 그렇게 해서 꿈을 이룬 거고, 인문학 도서인 <리딩으로 리드하라>도 제가 인문학 공부를 한 거고, AI에 관한 책 <에이트>도 제가 오랫동안 연구한 내용이에요.
<미래의 부> 역시 제가 실제로 미국 주식에 투자한 것을 바탕으로 썼어요. 모두 내 경험이 녹아든 책들입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 내가 직접 터득하지 않은 것, 내가 직접 발을 적셔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쓸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제가 갖고 있는 작가로서의 가장 큰 모토입니다.
원래 꿈이 작가였나요?
20살부터 작가를 꿈꿨고, 그 전까지는 꿈이 없었어요. 20살 때는 시인이 꿈이었는데, 집이 쫄딱 망하고 온갖 일을 다 겪으면서 비현실을 버리게 된 거죠. 1999년쯤인가 당시 분당의 부자 동네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어요. 저는 월급이 압류되는 도시 빈민으로 살고 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이 사는 고급 아파트와 거기에 딸린 외국 물건만 파는 슈퍼마켓을 보고 충격을 받았죠. 내가 살아남으려면 현실을 변화시키고, 현실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기 계발서를 좀 더 치열하게 읽고 내가 실천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독자들과의 그런 신뢰가 쌓여 여기까지 같이 온 거죠. 내 글에 책임지는 작가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살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책을 쓸 겁니다.
사실 이지성 작가 하면 아내인 차유람 씨와의 로맨스를 빼놓을 수 없죠.
우리 둘 다 항상 하는 말이 서로가 아니었으면 평생 결혼 못 했을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둘이 결혼해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에요. 너무 다른데 또 너무 비슷해요. 정말 감사한 건 결혼한 지 곧 10년이 되는데 지루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권태기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마치 어제 만난 거 같고, 지금도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고 있죠. 많은 분들이 비결을 물어보는데 아무 비결도 없어요. 우린 기념일도 안 챙겨요. 그냥 같이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좋습니다. 진짜 날로 먹는 결혼 생활이라고 할 수 있죠.(웃음)
남매를 키우고 있죠? 아이들이 아빠가 작가라는 걸 알고 있나요?
딸이 9살, 아들이 5살인데 딸은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집에서는 티를 안 내지만 밖에 나가면 아빠가 이지성 작가라는 이야기를 한 번씩 하는 것 같아요. 엄마, 아빠가 일반인은 아니라는 걸 몇 년 전부터 알게 돼 자랑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못 하게 주의를 줬더니 아이가 미술 학원에 가서 “우리 엄마 이름은…” 하고는 말을 안 한대요. 아빠한테 주의를 들었으니 자랑은 하고 싶어 말을 꺼냈는데 막상 이름은 말하지 않는 거죠.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잖아요. 아이들 교육에도 관심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관심을 좀 가지려고요. 가장 중요한 건 경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자립이 이뤄져야 나머지가 해결되는데,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좋은 직장을 가져야 자녀가 경제적으로 문제없는 행복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좋은 직장과 행복한 인생은 크게 상관이 없어요. 대신 경제적 능력과 행복도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건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애들 이름으로 좋은 주식을 사주고 있고, 부동산 계약을 할 때도 아이들을 데려갑니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경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거군요.
맞아요. 일단 경제적 능력을 키워주는 게 우선입니다. 만약 AI 시대가 아니었다면 저도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강요했을지도 몰라요. 초등학교 교사를 해봤기 때문에 잘 아는데, 공부에 재능이 있어야 해요. 우리 아이들은 그쪽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편해졌어요. 아내한테도 욕심부리지 말자고 말해요. 애들이 어떤 직업을 갖든 투자 소득이 있다면 굳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즐겁게 일할 수 있죠. 제 아내도 명품 백은 한 개밖에 없지만, 명품 회사 주식은 많이 갖고 있어요. 결혼하면서 조금씩 모은 거죠. 아이들에게도 투기가 아닌 투자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도록,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사실 작가들은 경제관념이 좀 없다는 생각을 하기 쉬운데, 요즘은 시대가 변했죠?
한국만 유독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조선시대 퇴계 이황이나 고산 윤선도는 노비를 수백 명씩 거느린 부자들이었죠. 일제강점기 때도 대부분 일본 유학을 할 정도로 부유한 이들이 글을 썼어요. 저는 작가가 글 쓰는 것밖에 모른다면 진정한 오피니언 리더, 지식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건 제 생각입니다. 어른이고 가장이라면 경제적인 책임을 당연히 져야 하는 거죠.
1993년부터 글쓰기를 시작했으니 30년 동안 글을 쓰셨네요. 왜 글을 쓰나요?
저도 모르겠어요.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웃음) 이제는 인생의 전환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글로 전달해 세상을 바꾸는 시대는 끝난 것 같아 저도 유튜브, SNS 등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해요. 그동안 작가에 몰두했던 건 글 쓰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글을 통해 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굉장히 강렬했고, 또 잘 먹혔으니까요. 그런데 이미 그런 시대가 끝났죠. 시대의 변화에 맞게 앞서 나가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겠지만 북한 인권 메시지를 전달하고 ‘유대인과의 네트워크 형성’ 등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것은 굳이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시도해보고 싶어요.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게 많을 것 같은데,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요?
이미 펼쳐놓은 게 너무 많아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앞으로 5년 정도는 가족에게 충실한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꿈이에요. 사실 <1만 킬로미터>를 쓰면서 책이 끝나고 나면 평범한 후원자로 돌아가겠다고 수퍼맨 목사님에게 이야기했는데 당분간은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수퍼맨 목사님이 연세도 있고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라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동안엔 저도 옆에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 뒤에는 자연스럽게 목사님과 저는 이 활동을 못 하게 되겠죠. 대신 그동안 시스템을 잘 구축해 우리가 없어도 원활하게 돌아가기를 바라죠. 그 후에는 북한 인권에 대한 팩트를 전달하러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강연을 좀 할 테고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잊히겠죠. 나중에 한국 사회가 “이지성 작가가 한 말들이 다 진짜였구나”라고 저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