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격차’를 만든 EBS 박혜민 PD에게 듣는 ‘교육격차’
EBS1 <다큐멘터리K> 5부작 ‘교육격차’는 1년 정도의 제작 기간을 거쳐 탄생했다. “사실 그동안 교육격차를 다룬 방송이나 언론 보도가 많았기 때문에 어떻게 더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고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어요. 우리 내부에서조차 대안이 있겠냐, 달라지겠냐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걱정했죠.” EBS 박혜민 PD는 처음부터 방송 준비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방송이다 보니 시청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치열한 사교육 현실 등 시청자들을 자극할 만한 내용을 어느 정도까지 다뤄야 할지, 그 수위를 정하는 것도 어려웠다. 5부작인 만큼 여러 명의 PD와 작가, 조연출 등 다양한 제작진이 모여 방송을 만들었다.
그중에는 대치동 출신은 물론 지방 출신도 있고, 수능 세대가 아닌 학력고사 세대도 있었다. 각자 교육에 대한 다른 경험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육격차에 대한 심각성과 해결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어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방송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고 했다.
Q 교육과 입시에 워낙 관심이 많아서일까요.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거웠죠?
박혜민 PD(이하 ‘박’)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해 사실 시청자들이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일지 몰랐어요. 시청자들의 가장 큰 피드백은 “결국 대안은 없는 건가? 현실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어떻게 하자는 거냐”는 내용이었어요. 교육 문제가 교육 안에서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잖아요. 사실 교육격차도 소득불평등이나 양극화가 먼저 해결돼야 하는 사안이라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Q 교육격차에 대한 확실한 해법이 없다는 것을 제작진도 고민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만든 이유가 있을 거 같아요.
박 우리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에요. 교육격차라는 것이 교육격차의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 그리고 지금의 이 교육을 지속해서는 더 이상 희망과 가능성이 없다, 바꿔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갖도록 하는 데 좀 더 집중했던 것 같아요. 자극적인 내용보다 진정성 있는 내용을 더 담고 싶었어요.
Q 방송에 나오지 않은 더 강렬한 내용도 있었군요?
박 사전 취재에서 제가 놀랐던 건 한 교육상담 관련 유튜브였는데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학부모들이 교육상담을 하는 라이브 방송이었어요. 웩슬러 지능검사 같은 걸 하고 나서 우리 아이가 서울에 있는 의대를 갈 수 있을지, 서울은 아니더라도 지방 의대는 가능할지 하는 식의 질문을 하더라고요. 대형 병원 소아정신과를 사전 취재했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의 학업 스트레스가 심각했어요. 취재가 어려워 방송이 안 된 부분도 있고, 다른 내용에 좀 더 집중하려고 방송을 안 한 부분도 있어요.
Q 촬영 현장에서 체감한 교육격차는 그동안 박 PD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나요?
박 저는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어요. 대학을 졸업한 지 15년이 넘었고. 이 프로그램을 하기 전에는 입시 교육에 별 관심이 없었죠. EBS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교육 내용보다는 일반 교양 위주의 프로그램을 많이 했고요. 그래서 사실 이 프로를 하기 전에는 제가 받은 주입식 교육과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더 심각하더라고요. 초등학교 2, 3학년 아이들을 인터뷰했는데 “대학 가는 게 걱정”이라는 말을 해서 많이 놀랐어요. 다들 교과목 학원을 다니고 선행학습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했어요.
Q 서울과 지역의 교육격차도 심각한 상황이라 지방 학부모들의 고민이 큰 것 같아요.
박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방 학생들에게 강남에 있는 일타강사의 수업을 쉽게 들을 수 있도록 연결해준다거나 하는 지원이 있어요. 하지만 이런 방법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교육 문제가 교육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 노동문제, 복지 문제 등 여러 방면으로 다 연결돼 있기 때문에 지역격차의 문제도 지역 소멸의 문제와 연결돼 있는 거죠. 지역에서도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양질의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끔 지역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대학 입시는 쉽고,
대학 졸업은 어렵게 만드는 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Q 이런 격차 속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박 지속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초등학교에서도 1년마다 담임교사가 바뀌니까 현수가 지속적인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아이들을 알 만하면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고, 전 학년 담임에게 아이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다행히 초등학교에는 지역사회교육전문가라고 하는 복지 전문가 선생님이 있어서 아이를 돌보는데, 이 제도가 중학교로 이어지지는 않아요. 아이 곁에 좋은 부모가 없다면, 좋은 어른이 지속적으로 있어주면서 아이와 건강한 상호작용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건 학교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학교와 사회가 함께 아이를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돌봐줄 수 있는 네트워크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Q 5부 ‘스포일러’ 편에 등장하는 특성화고 출신부터 명문대 출신, 의대 출신 등 다양한 청년을 통해 교육격차를 실감할 수 있었어요. 직접 그들을 만나보니 어땠나요?
박 여러 다양한 조건과 환경에서 자란 청년들을 섭외해 촬영하는 당일 날 대기실에 관찰 카메라를 설치하지 못한 게 내내 아쉬웠어요. 놀라운 건 이 청년들이 서로 처음 만나는 집단이었던 거죠. 의대나 특목고 다니는 친구들은 특성화고 출신을 처음 봤고,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과도 처음 이야기를 나눠봤다고 했어요. 특성화고 출신도 주변에 명문대나 의대 다니는 친구가 없으니 다들 처음 본 거죠. 사실 제가 자랄 때만 해도 다양한 청소년이 학교에 모여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생활수준이 비슷한 아이들끼리 학교를 다니는 것이 일상적이죠. 이렇게 비슷한 계층끼리 모여 살다 보니 나와는 다른 상황의 사람들을 만나본 경험이 전혀 없는 거예요. 20년이 넘도록. 그러면서 그 안에서 열띤 토론이 이뤄졌어요. 서로가 처한 상황과 경험을 이야기하고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다들 되게 뜻깊었다고 했어요.
Q 교육격차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요?
박 한국의 대학 입시 기조를 바꾸지 않으면 교육격차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정시 비중을 몇 퍼센트, 수시 비중을 몇 퍼센트 나누는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대학혁신이 필요해요. 오로지 대학에 가려고 공부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대학에 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서 그때부터 진짜 공부를 시작해야 하거든요. 대학 입시는 쉽고, 대학 졸업은 어렵게 만드는 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한 줄 세우기식 대학 서열화가 아닌 다양한 좋은 대학을 많이 만들어 입시 경쟁을 낮추는 것이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서 구태의연한 입시 교육식 공부로는 미래에 필요한 창의적이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길러낼 수 없어요.
Q 대학이 바뀌어야 입시도 바뀌고, 교육격차도 해소된다는 거죠?
박 네. 어쩌면 교육격차에 대한 해법으로 준비한 것이 5월 17일부터 31일까지 방송하는 <다큐멘터리 K> 5부작 ‘대학혁신’입니다. 한국 교육의 문제는 대학에서부터 비롯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제 대학도 자기 혁신을 해야 합니다. 높은 교육열과 입시 경쟁률로 학생을 뽑는 경쟁만 하다 보니 대학 원서비로 건물을 세웠다는 말까지 나왔죠. 앞으로의 저출생 시대는 달라요. 자기 혁신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대학혁신’에서는 학생을 뽑는 경쟁이 아닌 가르치는 경쟁, 좋은 교육을 가르치는 경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학 구조가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대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학벌과 스펙을 주는 기관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와 해결책을 제시하는 곳으로 대학 구조가 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다룰 예정입니다. 대학의 변화가 교육격차를 줄이는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