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70년 만의 대관식
찰스 3세의 시대가 열렸다. 영국의 찰스 3세(74세) 국왕이 지난 5월 6일(현지 시간) 드디어 대관식을 치르고 영국과 14개 영연방 국가의 군주가 됐음을 전 세계에 공표했다. 찰스 3세는 이날 오전 11시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열린 대관식에서 영국 국교회 최고위 성직자인 저스틴 웰비 켄터베리 대주교가 수여한 2.23kg 무게의 왕관을 썼다. 왕을 상징하는 금색 망토를 걸친 찰스 3세는 보주와 홀, 검과 같은 군주의 힘을 나타내는 물품을 전달받았다. 윌리엄 왕자를 비롯한 왕족과 귀족들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국왕으로서 정의와 자비를 실현할 것을 맹세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의 본보기로서 나는 섬김받지 않고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각국에서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하객으로 가득 찬 웨스트민스터사원 안에서는 “신이시여, 찰스 국왕을 지켜주소서”라는 외침이 여러 차례 울려 퍼졌다.
대관식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 온 질 바이든 여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 등이 참석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한국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영국에서 국왕의 대관식이 열린 것은 1953년 선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이후 70년 만이다.
찰스 3세의 시대가 열렸다. 지난 5월 6일 드디어 대관식을 치르고 영국과 14개 영연방 국가의 군주가 됐음을 전 세계에 공표했다. 찰스 3세는 저스틴 웰비 켄터베리 대주교가 수여한 2.23kg 무게의 왕관을 썼다.
지난해 9월 여왕의 서거 이후 찰스 3세가 즉시 왕위를 계승한 지 8개월 만이기도 하다. 이날 대관식은 ‘정복왕’ 윌리엄 1세 이래 1,000년 가까이 이어져온 전통의 틀을 대체로 따랐으나 일부 의식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기도 했다. 찰스 3세가 성경에 손을 얹은 채 “모든 종교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는데 이 대목은 70년 전 대관식 때는 없었던 것으로 다양성 존중이라는 시대정신에 맞게 추가됐다.
불교,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대관식에 참석해 찰스 3세에게 비종교적인 대관식 물품을 전달한 것도 지금까지의 대관식 사상 처음이었다. 영어와 함께 웨일스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아일랜드어로 찬송가를 부르고, 여성 사제가 처음으로 성경을 낭독하는 등 영국 왕실이 다양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찰스 3세는 서약을 하고 나서 700년이 넘은 대관식 의자에 앉아 웰비 대주교가 손, 가슴, 머리에 성유를 바르는 의식을 치렀다. 이 의식은 신과 왕의 사적인 순간으로 여겨져 대중에 공개하지는 않았다.
앞서 찰스 3세와 아내 카밀라(75세) 왕비는 오전 11시 대관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사원으로 가기 위해 오전 10시 20분경 ‘다이아몬드 주빌리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전을 떠났다. 찰스 3세 부부가 웨스트민스터사원으로 향하는 2km 구간은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을 흔들며 왕의 행렬을 지켜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오전부터 빗방울이 떨어지는 궂은 날씨였지만, 대관식 행렬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트래펄가광장에서 버킹엄궁전으로 이어지는 ‘더 몰’ 거리는 전날 밤부터 줄을 서 자리를 잡은 시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5월 6일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대관식 장면을 TV로 지켜본 순간 최대 시청자는 2,00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집계됐다.
찰스 3세 국왕의 장남 윌리엄 왕세자는 웨일스 근위대 제복을 입고 참석했으며,
부인인 캐서린 왕세자빈은 알렉산더 맥퀸의 흰 드레스 위로
‘로열 블루’와 빨강이 어우러진 예복을 입었다.
군주제 가치 입증과 영연방 체제 통합이 급선무
이날 찰스 3세의 여동생 앤 공주(72세)는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당당히 대관식장에 등장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승마 선수 출신인 그녀는 왕실 근위대와 기마병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아 위엄 있는 자세로 행렬을 이끌었다.
주인공인 국왕 가족의 패션도 관심사였다. 불륜녀에서 왕비로 등극한 카밀라 왕비는 찰스 3세의 첫 부인인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옷을 디자인해 유명해진 영국 디자이너 브루스 올드필드의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가 ‘다이애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새 시대 왕비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 아니냐는 호사가들의 해석이 뒤따랐다. 찰스 3세 국왕의 장남이자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윌리엄 왕세자는 웨일스 근위대 제복을 입고 참석했으며, 그의 부인인 캐서린 왕세자빈은 영국 브랜드인 알렉산더 맥퀸의 흰 드레스 위로 영국 귀족을 상징하는 ‘로열 블루’와 빨강이 어우러진 예복을 걸쳐 패셔니스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녀가 착용한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된 귀고리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생전 사용했던 것이다.
윌리엄 왕세자의 세 자녀는 각각 빨강, 하양, 파랑 복장으로 등장해 유니언잭(영국 국기)을 연상시켰다. 반면 왕실과 갈등을 빚으며 2020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떠난 해리 왕자는 대관식에 참석했지만, 부인 메건 마클과 아들 아치, 딸 릴리벳은 오지 않았다. 아치의 생일이 대관식 날짜와 같다는 이유로 불참한 것. 그는 어머니인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즐겨 입었던 프랑스 명품 디오르의 스리피스 정장을 입었다. 10년 동안 군에서 복무한 그는 군복을 입고 싶어 했지만, “왕실과 결별한 이가 공식 행사에 영국 군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왕실 의례 때문에 일반 정장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1월 자서전 <스페어>를 출간하면서 아버지 찰스 3세와 형 윌리엄 왕세자와 사이가 더 틀어진 해리 왕자는 이날 대관식에서 윌리엄 왕세자보다 두 줄 뒤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홀로 참석한 그는 대관식 전통인 발코니 가족사진 촬영에도 빠졌다.
세금으로 치러진 대관식의 비용은 1억 파운드(1,7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왕세자에 책봉된 지 65년 만에 왕의 자리에 오른 찰스 3세는 경제 위기 상황을 고려해 행사를 대폭 축소해 진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막대한 혈세를 투입해 왕실을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군주제 반대 여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 젊은 층으로 내려갈수록 왕실 지지율이 낮아지고, 물가 급등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거부감도 크다. 이날 대관식에 맞춰 반군주제 단체 ‘리퍼블릭’ 등이 “나의 왕이 아니다(NOT MY KING)”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웨스트민스터사원 인근에서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 단체를 이끄는 그레이엄 스미스 대표는 트래펄가광장에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호주, 캐나다, 자메이카, 바하마 등 영연방 12개 국가 원주민 지도자들은 대관식 전날 찰스 3세에게 서한을 보내 식민 지배에 대한 공식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기도 했다.
찰스 3세 국왕은 대관식 시간을 기다리던 중 부인 카밀라 왕비에게 “지루하다”고 말하는 듯한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돼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대관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해 사원 바깥 마차 안에서 5분 정도 기다리는 상황에서, 카밀라 왕비를 향해 이야기하는 찰스 3세의 입 모양이 한 독순술 전문가의 눈에 들어온 것. 이 전문가에 따르면 찰스 3세는 “우리는 절대 제시간에 못 맞출 것”이라는 말에 이어 “항상 뭔가 있지… 이건 지겨워”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보도한 영국 스카이뉴스는 찰스 3세가 그토록 기다려온 대관식을 앞두고 긴장한 것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짜증 섞인 발언이 포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북아일랜드 힐스버러성을 찾아 방명록에 서명하던 중 펜의 잉크가 손에 흘러내리자 “너무 싫다, 못 참겠다”고 짜증을 내 주목받은 전적이 있다.
찰스 3세는 65년을 기다린 왕관을 머리에 썼고, 불륜으로 지탄받았던 부인 카밀라는 공식 왕비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전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훨씬 못 미치는 지지도는 왕관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한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처럼 세금 낭비에 특권 논란, 젊은 층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군주로서 적지 않은 과제를 짊어졌다. 영연방 이탈 움직임과 해리 왕자와의 갈등 등 왕실 안팎의 위기도 극복해야 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얼굴이 그려진 영국 파운드화 지폐가 찰스 국왕의 얼굴로 모두 바뀌기까지는 약 2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영국 시민들이 새 국왕에 적응하기까지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찰스 3세는…
1948년 11월 14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남편 필립 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2년 여왕이 즉위한 후 6년 만인 1958년 왕세자로 낙점되면서 장장 65년 동안 승계 1순위였다. 1970년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하고 공군과 해군에 복무했다. 그의 가정사는 불륜과 다이애나 왕세자비와의 이혼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기 일쑤였다. 1981년 다이애나와 결혼해 윌리엄 왕세자와 해리 왕자를 얻었지만 부부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1992년 별거를 시작으로 1996년 결국 이혼했다. 다이애나는 BBC 인터뷰에서 찰스 3세의 불륜 사실을 밝혔고,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왕비로 기억되고 있다. 찰스 3세는 2005년 불륜 상대였던 카밀라 파커볼스와 결혼했다. 영국 역사상 최고령인 73세에 즉위한 그는 지난 5월 6일 대관식을 치르고 영국과 14개 영연방 국가의 군주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