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실 만큼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던 바깥 날씨와는 다르게 촬영이 예정된 스튜디오는 조금 쌀쌀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으슬으슬할 정도의 냉기, 조금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예상 시간보다 조금 일찍 배우 김선영이 도착했다. 큰 키에 작고 동그란 얼굴, 동요 없는 곧은 표정과 몸짓으로 조용히 스튜디오에 들어온 김선영. 우리에게 익숙한 〈응답하라 1988〉의 ‘선우 엄마’, 〈동백꽃 필 무렵〉의 게장집 사장 ‘박찬숙’, 〈사랑의 불시착〉의 인민반장 ‘나월숙’이 아닌, 감히 말 붙일 수 없는 오라와 강인함이 느껴졌다.
1995년, 연극 <연극이 끝난 후에>로 데뷔한 배우 김선영은 2000년부터 영화 속에서 작은 역할을 맡으며 우리에게 얼굴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2014년에는 드라마 세 편에 연이어 출연했고, 2015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통해 농도 짙은 연기를 선보이며 단숨에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2023년, 영화 〈드림팰리스〉로 제20회 아시안필름 페스티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소위 ‘미친’ 연기력을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은 김선영. 소속사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는 그녀에게 소감을 묻자 “별거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되레 앞으로의 연기에 대한 고민과 걱정만을 내비친다.
김선영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연극 동아리 활동 때문에 졸업은 하지 못했다고 소탈하게 대답한다. “제가 철학과 전공 수업에 들어가면 ‘연극영화과 왔냐’고 말할 정도였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청춘과 함께 활짝 피어났을 연기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사실 저는 최선을 다하는 것을 싫어해요. 하지만 연기는 ‘저렇게까지 했었어야 했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연기에서만큼은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저는 연기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김선영은 인터뷰 내내 명료했고 직설적이었으며, 때로는 몽환적인 대답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모두가 아는 얼굴과 이름이지만, 우리가 몰랐던 김선영의 이야기. 솔직한 마음이 담긴 그녀의 선명한 목소리를 모두 담았다.
사실 저는 최선을 다하는 것을 싫어해요.
하지만 연기는 ‘저렇게까지 했었어야 했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연기에서만큼은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저는 연기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오늘 촬영 어땠어요? 즐거웠나요?
재미있었어요. 최근 드라마 촬영 때문에 간간이 밖에 나가는 중에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상반기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드라마 〈일타스캔들〉 〈퀸메이커〉, 그리고 칸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영화 〈리턴 투 서울〉을 통해 감탄할 만한 연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작품 모두 큰 호평까지 받았는데, 기분이 어때요?
욕 안 먹어서 다행이다.(웃음) 칭찬을 해주시면 그저 안심이죠. 사실 영화 〈리턴 투 서울〉은 크게 알려지지 않아 아쉽기도 하지만, 굉장히 좋은 작품이에요. 외국에서라도 인정해주고, 박수 쳐주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죠. 제목이 〈드림팰리스〉인데, 어떤 작품인가요?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고, 죽은 남편의 목숨값으로 분양받은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예요. 극 중 인물인 ‘혜정’과 ‘수인’(이윤지 분)은 남편들이 당한 사고의 진상 규명을 위해 함께 싸우는 각별한 사이죠. 그런데 혜정은 합의금을 받고 싸움을 멈췄지만, 수인은 다른 유가족들과 농성을 이어가요. 저는 극 중에서 ‘혜정’ 역할을 맡았습니다.
주목해서 감상할 포인트가 있을까요?
두 여주인공은 서로 애틋했던 관계였지만, 아파트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결국 대립하게 돼요. 가성문 감독님은 이 영화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피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갈등을 겪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부분을 주목해서 봐주셨으면 합니다.
촬영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내용이 가볍지 않은 만큼 즐겁게 웃으면서 찍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힘들어도, 괜찮지 않아도 해야죠. 배우니까요. 사실 촬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크게 감사할 뿐이에요.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인증된 시나리오인 만큼 탄탄하게 구성돼 있고, 큰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러닝타임 문제로 30분 넘는 분량이 편집됐는데, 그게 조금 아쉬워요. 하지만 생각할 만한 내용을 담은 의미 있는 영화이니 많이 와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드림팰리스〉로 제20회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죠. 축하드립니다. 수상 소감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사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드림팰리스〉를 한 달 정도 촬영했는데 무게 있는 내용이고, 감정의 폭도 큰 만큼 연기를 하는 게 쉽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제 선택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받는 느낌이었어요. 인간이란 살면서 주어지는 약간의 보상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거잖아요. 이 상으로 나름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명실상부 월드와이드 배우로 도약한 기분이 어떤가요?
‘내가 외국에서 먹히는구나’라는 생각? 만약 영어를 잘했더라면 외국에 가서 나도 연기할 수 있을 텐데, 영어를 못해 안타까울 뿐이죠.(웃음)
해외에서 작품 섭외가 오면 할 의향이 있어요?
무조건 해야죠. 하지만 영어 대사가 아닌, 한국말을 하는 역할이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나라 영화가 크게 주목받으면서 한국 배우의 해외 진출도 많아졌는데,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외국에 가서 한국말로 마음껏 연기할 수 있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지금 제 딸이 꽤 커서 같이 외국 생활을 해도 되거든요. 너무 앞서갔나요?(웃음)
‘믿고 보는 배우 김선영’이라는 말이 연기력을 넘어 필모그래피에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나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늘 같은 대답을 하는데, 저는 선택을 못 해요. 엄밀히 말하자면 선택당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죠. 최근 우리나라 영화와 드라마 제작이 어마어마하게 줄었어요. 배우로서 좋은 소식은 아니죠. 기회가 줄어드니까요. 배우 김선영이 선택하는 건 없어요. 선택받았을 때 잘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앞으로는 선택하는 입장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희망하기보다는 그냥 버티려고 해요.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마음을 주고받으며 덜 울적하게 살아가는 게 인생이니까요.
버티는 자가 승리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닐까요?
전 승리하고 싶지 않아요. 싸우고 싶지도 않고요. 승리한 자의 삶만큼이나 패배한 사람의 삶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한 개인이 그저 안전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에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제가 되길 바라고요. 승리하거나 잘 사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아요. 인생이 뭐 있겠어요. 그냥 좋아하는 게 요만큼이라도 있으면 그거 하면서 밥 먹고 살면 되는 거지.
그렇다면 김선영은 무엇을 좋아하나요?
연기요. 좋아하는 것은 오직 연기뿐이에요. 그래서 많은 기회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연기를 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연기로 먹고사는 배우 김선영의 삶도 괜찮은 것 아닌가요?
그렇네요. 생각해보니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돈도 벌겠다는 마음을 혹자는 못된 심보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재수 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맞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버는 삶은 축복받은 거예요. 사람이 어떻게 좋아하는 거 하면서 돈까지 벌어요. 그런 면에서 배우 김선영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맡는 역할마다 “실존 인물인 듯한 착각이 든다”라는 대중의 평이 많아요. 그만큼 역할마다 실감 나는 연기와 살아 있는 감정, 디테일 또한 남다른데요, 타고난 걸까요?
타고남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람이란 타고난 것, 습득한 것, 노력한 것 모두가 합쳐져 결과를 낸다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타고나야 한다는 저의 대답이 완전한 정답이 될 수 없는 건, 저는 제가 모르는 어마어마한 연기 교육이나 트레이닝을 안 받아봤기 때문이에요. 타고나지 않았지만, 어떤 대단한 교육을 받은 후 연기의 비밀을 깨친 사람도 어딘가에는 있을 테니까요. 배우, 감독이 모이는 여러 자리에서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요. 하지만 정답은 늘 ‘모르겠다’로 끝나죠.
늘 호평만 들었을 것 같은 배우 김선영도 연기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겠죠?
저는 연기 전공자가 아니에요. 그럼에도 연기 잘한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건, 다소 편집광적인 제 성격과 기질이 연기라는 분야와 잘 맞아떨어진 덕분인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적당히’로는 만족하지 못해 계속 고민하고, 생각하고, 탐구하는 타입이거든요. 누가 시키거나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릴 때부터 계속 생각하는 걸 좋아했어요. 집착한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연기에 관해서는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어요. 그런 저의 기질이 결과적으로 시청자 그리고 관객에게 진정성 있는 연기로 비치는 것 같아 참 다행이에요.
“연기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듣죠?
많이 듣죠. 하지만 그럼 뭐하나요. 연기 안 하고 집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은걸요. 유튜브나 보면서요.
유튜브도 봐요?
그럼요. 생각 없이 보고 넘기고, 보고 넘기고. 알고리즘으로 재미있는 영상 많이 추천해줘요.
그때가 휴식하는 시간일까요?
인간으로서 고통받는 시간이죠. 기다림의 연속이니까요. 배우라고 해서 따로 휴식 시간을 갖거나 하는 건 없어요. 일이 없으면 그냥 집에 있는 거죠. 하지만 저는 연기하는 사람이잖아요. 그 무엇보다 일을 많이 하고 싶어요.
우리는 늘 김선영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통해 보아왔는데, 연기를 벗어난 개인적인 일상 속에서 즐거웠던 기억은 없을까요?
최근에 집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꽤 재미있어요. 제목도 제가 붙여요. ‘눈 오는 날’, ‘친절한 산 아줌마’, ‘자화상’ 등등. 자화상은 저희 집 거실에 걸어놨어요. 그릴 때 특별히 영감을 받거나 그런 건 없어요. 그리고 칠하는 것을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고요. 그냥 제 눈에 좋고, 예쁜 걸 그리는 거죠.
지금껏 맡은 역할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는 뭔가요?
최근에 했던 드라마 〈일타 스캔들〉의 ‘수아 엄마’ 역할이 좋았어요. 극 안에서 어떻게 보면 악역 아닌 악역이었죠. 욕먹는 역할을 한 건 처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너무 재밌었어요. 보통 저는 “슬프다”, “안됐다”, “웃기고, 재밌다” 이런 반응에 익숙했으니까요. 촬영 내내 너무 신이 났고, 카타르시스도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런 역할을 또 해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김선영이란 이름은 새 작품 소식이 들릴 때마다 또 어떤 놀라운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를 갖게 합니다. 배우 김선영을 이렇게 봐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있을까요?
진정성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로 바라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맡은 역할들이 극 중에서 비중이 크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저의 부족함을 잘 숨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답하면서 생각났는데, 사실 요즘 고민이 많아요. 어제도 촬영이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말하면 대본에 투자하는 시간, 맡은 역할에 쏟아내는 에너지의 양이 예전보다 약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에요.
평소 연기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쏟는 편인가요?
일상을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제가 연기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에요. 사실 전 연기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운전조차도요. 몇날 며칠 생각하고 연구하는 게 일상이고 습관이 될 정도로 연기를 위해 살아왔기 때문에 최근 연기 외 다른 곳으로 기운이 분산되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 고민이에요. 그 기운을 다시 가져와 연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신이 맡은 연기를 위해 또 그것을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배우 김선영으로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한 배우 김선영의 연기, 오래 볼 수 있겠죠?
영원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어요. 끊임없이 오래오래요.